진리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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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경에 몇 사람이 모여서 교회 개척을 결의하고 교회 이름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생각해 낸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돈 그린 목사님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개척한 교회 이름을 모방하여 진리 성경 교회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이름을 좋아하며 너무나 잘 생긴 이름이라고 마음에 흡족했는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던 한 두명의 친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한 친구는 그런 이름은 이단들이 잘 사용하는 이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해성 장로도 별로 좋지 않아면서 반대했습니다.
이름이 중요하지만 그 이름을 교회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고수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에 우리는 다른 이름들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레이스 성경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 등록을 하였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리, 사실 진리라는 이름이 이단들이 잘 쓰는 단어라는 것은 몰랐지만 나는 좀 딱딱한 느낌을 주는 단어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공부를 하다 보니 1세기 경에 ‘복음의 진리’라는 책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영지주의 색채가 강한 이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한국에 성행하는 이단, 구원파와 비슷한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단이었고, 교부인 아리아스가 이단으로 정죄한 그런 깨달음의 신학을 가진 그런 이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라는 단어가 절대 나쁜 단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진리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우려한 대로 진리라는 단어는 왜곡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왜곡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진리라는 단어를 이름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는 슬로건을 정하고 아무도 이에 이의를 달지 않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는 어떤 제약도 조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건없는 사랑… 어떤 의미에
저는 오늘 우리가 선포해야 할 진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다시 정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오늘 저는 진리와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 자주 가던 맛집들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여의도에 살때에 여의도 한강 다리를 건너면 마포인데 마포에 주물럭 집이라는 고깃집이 엄청 맛있는 고기집이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옛 기억을 더듬어 주물럭을 먹기 위해 마포 그 골목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입니까? 온 골목 곳곳에 같은 이름의 음식점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 앞에 원조 주물럭, 진짜 주물럭, 옛날 주무럭, 진짜 원조 주물럭....등의 이름을 가진 음식점로 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드는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바로 예전에 내가 가끔 가서 먹었던 그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의 간판에는 주물럭을 수식하는 다른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냥 예전과 같이 주물럭 집이었습니다.
아무리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인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수식어에 속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네이버 한글에 사전은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과연
그리스도인이 가장 즐겨하는
한글 사전에는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2.<논리>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3.<철학>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는 말로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주장하니 마치 음식점 이름 앞에 원조, 진짜, 등등의 이름을 붙이듯이 진리에도 “근본 진리", “객관적 진리" “확실한 진리"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자기가 주장하는 진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애 쓰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전에서 말하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인 법칙이나 사실"이라고 정의는 대한 바른 정의는 아닙니다. 진리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법칙이나 사실은 아닙니다.
사전에서 말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적인 법칙이나 사실"은 진리를 바르게 정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단지 사람들의 승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 타당한 진리로 인정된 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찌 되었던 간에 일반적으로 진리를 설명하라면 진리란 변할 수 없는 법칙이나 사실이다. 그러나 사전에서 말하는 “보편 타당한 사실"이라고 정의는 사실 진리에 대한 바른 정의가 아니다. 진리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법칙이나 사실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틀린 것이라는 것은 몇 가지 사실만 되집어 보아도 틀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한 다른 예로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 어떤 사람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거나 시대 조류와 좀 다른 주장을 대하면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앞에서 지구의 예를 들었지만 또 다른 예들이 많이 있다. 특히 진리를 벗어난 이단들인 가톨릭 교회의 예를 보자. 그들은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난 후 300년이 지나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마리아가 신성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 매주 고리에라고 하여 성모 발현지를 정해 놓고 성모가 신성한 인물로 만들어 숭배하며 그것이 진리인 양 받든다. 어디 그것 뿐인가? 교황 무오설 등등의 거짓 진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을 지옥길로 인도하고 있다. 또 다른 이단인 몰몬은 어떠한가? 그들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진리를 말하면서 조셉 스미스라는 사람의 계시를 새로이 만들어 성경에 덧 부쳐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얼마 전 강 민구 집사가 그레이스 투 코리아 올린 이단의 정체를 밝힌 글에서도 신 옥주라는 여자가 만든 이단은 자신을 계시자로 만들어 사람들을 온갖 거짓과 공갈 협박하여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진리로 믿게하여 황당한 짓을 하게 만든다. 놀랍게도 이 여자가 구속되자 그를 추종하는 거짓에 미혹된 자들이 오히려 투옥을 반대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너무나 많다.
진리는 불변하며 사람들이 인정하던 안 하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 이었지만 지금 만일 누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기억에 제가 찾았던 그 음식점은 아직도 예전의 그 이름을 그대로 붙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 많이 돈을 많이 벌어서 단층이던 음식점이 주변의 집들을 더 사 들여서 더 큰 빌딩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앞에 진짜 음식점, 원조 음식점이라는 수식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의 내용도 메뉴도 예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는 단어 앞에 원조 진리, 객관적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내가 찾던 음식점 동네에 온갖 수식어가 붙여 놓고 자기 집에 진짜라고 설명하는 음식점 이름들을 생각나게 하였다.
과연 진리 앞에 이러한 수식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두개의 진리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constricted
새로운 교회의 개척을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하고 생각 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진리였다.
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진리라는 단어 앞에 원조진리, 객관적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라는 수식을 하지 않는다.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
진리는 오직 하나 밖에 없고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매력적인 캐치 프레이즈였고 정말 그대로 바른 진리를 선포하자고 모인 몇몇 젊은이들이 다 같이 동의하였다. 교회 이름도 진리 성경교회로 정하자고 마음이 모아졌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하면서 부터 사탄의 도전을 받기 시작 했습니다. 세상에 단 두 사람만 있을 때에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아담과 이브를 거짓으로 꾀어서 속였고, 그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오게 만들었습니다.
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시작부터 진리에 대한 사탄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뱀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아담과 이브를 꾀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온 이래 사탄은 쉬지 않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 사탄은 쉬지 않고 진리를 공격하고 거짓을 만들어서 진짜 진리라는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을 속였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고 예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기 시작하자 이제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서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라고 격려한 것도 이러한 사탄의 공격이 교회를 거짓 진리로 채우려는 공격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지인들의교회에 동참하는 사람뿐 아니라 지인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당연한 일인데 뭐 이름까지 그렇게 하느냐? 이단들이 주로 이런 이름을 쓴다. 등등의 이유로 반대하는 반대이었다.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복음의 진리라는 책으로 초대 교회에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이단이 실제로 존재 하였던 것을 알았다.
교회를 공격하는 일에 어김없이 그들은 직접적 간접적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그럴듯하게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들의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궤계에 미혹되지 말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진리를 온전히 분별하고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2.<논리>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3.<철학>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진리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진리를 “보편 타당한 사실"이라고 정의하지만 보편 타당한 것이란 사람들이 인정한 것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할 때 진리라는 단어를 바로 정의하는 것 같지 않다.
진리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진리를 “보편 타당한 사실"이라고 정의하지만 보편 타당한 것이란 사람들이 인정한 것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할 때 진리라는 단어를 바로 정의하는 것 같지 않다.
이어서 객관적 진리, 영원한 진리… 등등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 이었지만 지금 만일 누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는 바뀌지만 창세 이래 절대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이렇듯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는 바뀌지만 창세 이래 절대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 타당한 진리라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바뀌지만 창세 이래 절대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
진리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살펴 보겠습니다. 가장 정확한 정의는 이 세상의 만드신 분이 정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 분이 이것을 정의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합의로 보편 타당한 진리가 진리일 수 밖에 없고 시대에 따라 바뀌는 믿지 못할 진리로 우리는 항상 내일은 무엇이 진리일까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한글의 문법이 늘 바뀌어서 헷갈리게 하는 것처럼 말입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은 일점일획이라도 바뀌지 않는다.” 단 한 마디도 바뀌지 않았고 않을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 스스로 진리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요 17:17).성령님이 진리이시다(요 16:13) 하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분 하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요 17:17).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가 이것입니다. 만일 이 진리가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절망과 암흑속에서 아무 소망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한 진리를 눈 앞에 두고도 새로운 진리를 찾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진리를 찾아 헤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진리를 만들어서 그것에게 헌신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셨을까?
성령님이 진리이시다(요 16:13)
만일 이 진리가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절망과 암흑속에서 아무 소망도 의미도 없다. 사람들은 진정한 진리를 눈 앞에 두고도 새로운 진리를 찾는다. 자기 마음에 드는 진리를 찾는다. 그들은 진리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진리를 만들어서 그것에게 헌신한다. 이는 마치 나무나 금, 은으 만든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사람들과 같이 말 못하는 그 우상을 의지한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기업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인을 좇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우상을 따르며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시 115:4-7). 이러한 사람들을 시편 기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시편 115편은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Psalm 115 NKRV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 기자는 주님만이 진실하다고 합니다. 진실하다를 영어 성경은 truth 혹은 faithfulness 인데 진리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하며 하나님 만이 진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진리를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겼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우상은 말도 못하고 말을 듣지도 못하는 나무나 은, 금, 돌로 만듭니다. 생명이 없는 무 생물입니다.
다. 이는 마치 나무나 금, 은으 만든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사람들과 같이 말 못하는 그 우상을 의지한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기업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인을 좇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우상을 따르며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시 115:4-7). 이러한 사람들을 시편 기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시편 기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했습니다.
마음의 우상을 만듭니다. 마음의 우상 돈, 명예, 등등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우상은 말을 못한다. 잔소리도 없고 그 속에 진리도 없다. 다만 이것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행하는데 편하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진리는 정말 중요한 것이고 진리가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절망과 암흑속에서 아무 소망도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한 진리를 눈 앞에 두고도 새로운 진리 자기 마음에 드는 진리를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로 생각하고 믿는다. 그 마음에 진리를 두기 싫어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의지한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기업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인을 좇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우상을 따르며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시편의 이어지는 말씀처럼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이 다” 그와 같다(시편 115:4-6).
이와같이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거짓 진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그 진리는 계속 바뀔 수 밖에 없고, 계속 진화하여 점점 더 하나님의 진리와는 멀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새로운 거짓 진리를 새롭게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기고" (빌2:10)
예수님이 바로 진리 이시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씀(요17:17)”은 진리이고, “성령(요 16:13)”님을 진리라고 하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진리이신 것을 알려 주셨다.

The entire intelligent universe is called to worship Jesus Christ as Lord (cf. Ps 2). This mandate includes the angels in heaven (Rev 4:2–9), the spirits of the redeemed (Rev 4:10, 11), obedient believers on earth (Ro 10:9), the disobedient rebels on earth (2Th 1:7–9), demons and lost humanity in hell (1Pe 3:18–22). The Gr. word for “confess” means “to acknowledge,” “affirm,” or “agree” which is what everyone will eventually do in response to Christ’s lordship, willingly and blessedly or unwillingly and painfully.

빌립보서 2:10 은 말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기고" 이 세상의 끝 날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나 따르지 않는 자들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일어날 일이다.
이 세상의 끝 날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나 따르지 않는 자들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일어날 일입니다.
무릅을 꿇고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너무나 잘 알려 주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빌립보서 2:10 은 말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기고" 이 세상의 끝 날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나 따르지 않는 자들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일어날 일이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1-15 )
그러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른 진리를 인정해야 하고, 그 진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날에는 이미 늦습니다. 그날에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하신 창조주의 말씀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으로 이 세상은 창조 되었고,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지각있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이 세상의 구원주로 받아 들여서 영원한 생명 얻는 길로 나아 와야만한다.
그러므로 지각있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이 세상의 구원주로 받아 들여서 영원한 생명 얻는 길로 나아 와야만 합니다.
거짓 진리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그 어떤 유전도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골 2:19).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행 4:19). 그 어떤 선한 행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엡 2:8-9).
구원은 오로지 영원하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그를 주님으로 받아 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놓치지 말야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의로운 사람이 없다(롬 3:9,10).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이고 이를 그리스도의 복음(막 1:1; 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고후 9:13; 고후 10:14; 갈 1:7; 빌 1:27; 살전 3:2), 하나님의 복음(막 1:14; 롬 1:1; 롬 15:16; 고후 11:7; 살전 2:2; 살전 2:8; 살전 2:9; 벧전 4:17)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복음의 진리(갈 2:5; 2:14)라고 말하면 거짓된 복음과 구분할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또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리 안에서 진리로 거듭났으며 진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잘못 왜곡하여 진리가 자신을 얽매는 사슬로 생각한다.
진리만을 고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틀렸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주장은 주로 진리만을 주장하기에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사랑이 포함된 것이다. 만일 사랑이 없이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마스터스 신학교의 교수이셨던 토마스 박사는 “진리가 의의 영원한 친구이기 때문에 역시 진리는 사랑의 영원한 친구도 된다.”고 하시며 진리와 사랑의 관계를 잘 표현하셨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의 부류의 교회들을 만난다. 어떤 교회는 진리만을 강조하지만 사랑이 없는 교회와 또 그 반대로 사랑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진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회들입니다. 저는 감히 이 두 극단의 교회는 둘다 진리와 사랑을 모르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의 부류의 교회들을 만난다. 어떤 교회는 진리만을 강조하며 사랑이 없다. 또 그 반대로 사랑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진리를 등한시 하는 교회도 있다.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두 극단의 교회는 사실 둘 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이다.
진리를 아는데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대로 사랑은 있는데 진리가 없다고 한다면 그역시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고 진리만 강조하는 교회나 진리는 없고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는 진리도 사랑도 없는 교회입니다. 양 극단에 서 있지만 결국은 같은 종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진리하고 말하면 딱딱한 율법이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 성경에 근거한 바른 교리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요즈음 어떤 교회들은 교리는 필요없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다라고 외치며 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고 자신들은 교리보다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너에게 가르친 것을 신실하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했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도 했습니다.
교리가 없이 무엇을 가르치며 교리가 없이 어떻게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지 진리가 네 발목에 쇠사슬을 채울 것이다하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이 지워 주시는 멍에가 가벼운 멍에이고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좁고 험한 길이 좁고 험한 길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서 자유는 주는 은혜의 길이며 평강의 길입니다.
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이 두 극단적인 교회들을 생각나게 한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급히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사람에 가는 길에 밀로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부른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온갖 정성을 들여서 세웠고 가르친 교회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행 20:25)을 가면서 그가 사랑하던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고 삼 년이나 그들에게 훈계하던 말을 기억하라며 거짓 교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그는 거짓 교사의 특징인 돈을 탐하지 않았던 자기가 가르쳤던 복음에 착념하라고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눈물로 헤어진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약 40년 후에 사도 요한은 이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 에베소에서 온 사자에게 편지를 전한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장로들을 만나 부탁하였던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아셨다고 말씀하셨다(계 2:1-3)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2-7)”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은 에베소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싫어했고 미워했던, 바른 교리를 지키고 교리를 잘 고수한 교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을 주님으로 부터 칭찬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부터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을 듣습니다. 그들은 바른 교리를 분별했지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는 반쪽 진리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60여년 후에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를 없애 버리시겠다는 책망이다. 그들이 주님이 싫어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바른 교리를 지키고 나름대로 진리를 지킨 교회가 아니었던가?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는 진리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사랑을 버린 그들은 진리 안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60여년 후에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얼마 전 제가 다니던 그레이스 교회의 리더십 미팅에서 필 존슨 목사님이 교회 역사를 돌아 보면 어떤 교회도 50-60년을 바른 교리를 지키며 잘 버틴 교회가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신학생이 우리 교회는 그렇게 않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학생이 말하는 이유는 그레이스 교회는 마스터스 신학교가 같이 있고 그곳에서 바른 진리를 배우는 학생들이 직접 온갖 미니스트리에 다 열심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절대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필 목사는 말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했고, 디모데, 아볼로, 요한이 목회한 교회이었는데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의 제자들이 그 교회를 이어 받았는데 교회가 생긴지 불과 50-60년이 지난 후에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로 자신의 말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사실 관계없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바른 진리를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재 확인합니다.
주님의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주님이 책망하신 에베소 교회가 잃은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진리 안에 있던 교회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에베소 교회는 반쪽 진리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른 교리로 거짓 교사들을 미워하고 배척하였지만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진리를 가지고 잃어 버린 교회이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또 요한 계시록에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의 인내를 보인 교회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실천했지만 진리를 저버린 교회입니다.
한편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19-23)”
두아디라 교회는 인내하고 사랑하였지만, 그들은 진리를 왜곡하는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이 저지른 배역의 행위를 벌하시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과 믿음과 섬김으로 충성하였지만 바른 교리를 저버림으로 이러한 엄한 경고를 들었습다.
한 교회는 사랑을 잃어서, 또 다른 교회는 교리(진리)를 잃어서 꾸지람을 들었다.
우리는 이 두 교회를 보면서 요한이 말한 요한일서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 사도 요한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계시록을 쓰면서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요한일서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촉구했습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요일 3:18-19 강조포함)”
우리는 요한의 촉구를 명심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온전하게 주님께 영광 드리게 되고,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하여 달려 가게 되기를 주님께 간구 드린다.

2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60여년 후에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를 없애 버리시겠다는 책망이다. 그들이 주님이 싫어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바른 교리를 지키고 나름대로 진리를 지킨 교회가 아니었던가?
주님의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신다.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진리 안에 있던 교회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에베소 교회는 반쪽 진리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른 교리로 거짓 교사들을 미워하고 배척하였지만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진리를 가지고 잃어 버린 교회이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지켰지만 그 좋은 예가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교리(진리)를 지킨 것을 칭찬하시지만 그들이 첫 사랑을 잃었다고 꾸짖으신다. 그리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그들이 거짓을 미워하고 물리 쳤지만 첫 사랑을 잃은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말한 사랑을 무엇일까?
2.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가장 큰 본이 누구일까? 물론 가장 큰 본은 하나님이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요일 3:18-19)”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속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을 잃어 버리므로 진리에 속하지 않은 교회이었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교회를 없애 버리시겠다는 주님의 무서운 경고를 들었던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리므로 그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교회가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가장 큰 본이 누구일까? 물론 가장 큰 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 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 3:16)”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은 거룩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도 무너지니 않을 것이 없다. 살아 있는 생물이나 천지에 있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 복종한다.
요한은 말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것도 말이나 혀로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라고 말한다. 물론 요한의 이 말이 말과 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표현 되어야 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말한다. 말로 하더라도 진실한 행함으로 말로 하지 않더라도 진실한 행함으로 하라는 것이 요한의 명령이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가장 두드러진 표식이 사랑이라도 말한다.
진리에 속했다는 말이 무엇일까? 세상이 정의하는 진리는 누구나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 논리에 일치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이러한 진리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는 시절에 따라 세태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아도 사람들이 보편 타당한 법칙이라고 만들어 온 진리가 너무나 쉽게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의 촉구를 명심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온전하게 주님께 영광 드리게 되고,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하여 달려 가게 되기를 주님께 간구 드린다.
The entire intelligent universe is called to worship Jesus Christ as Lord (cf. ). This mandate includes the angels in heaven (), the spirits of the redeemed (, ), obedient believers on earth (), the disobedient rebels on earth (), demons and lost humanity in hell (). The Gr. word for “confess” means “to acknowledge,” “affirm,” or “agree” which is what everyone will eventually do in response to Christ’s lordship, willingly and blessedly or unwillingly and painfully.
The entire intelligent universe is called to worship Jesus Christ as Lord (cf. ). This mandate includes the angels in heaven (), the spirits of the redeemed (, ), obedient believers on earth (), the disobedient rebels on earth (), demons and lost humanity in hell (). The Gr. word for “confess” means “to acknowledge,” “affirm,” or “agree” which is what everyone will eventually do in response to Christ’s lordship, willingly and blessedly or unwillingly and painfully.
MacArthur, J. F., Jr. (2006).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John’s challenge in this section is for his readers to be genuine in their love. One of the distinguishing marks of the child of God is love, a love that originates in God, displays itself in actions of self-sacrifice, and is evidence of eternal life.
Akin, D. L. (2001). 1, 2, 3 John (Vol. 38, pp. 161–162).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이고 오늘 내가 말하려는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것일까?
진리와 사랑을 같이 말한 구절로 생각나는 구절은 요한일서 3장 18, 19절이다.
(NKRV)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사도 요한은 사랑을 진실하게 행하는 것을 진리와 연결하고 있다.
그것도 사람들이 진리에 속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사람들 적어도 요한 시대에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믿는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진리의 의미
진리와 사랑의 관계
John’s challenge in this section is for his readers to be genuine in their love. One of the distinguishing marks of the child of God is love, a love that originates in God, displays itself in actions of self-sacrifice, and is evidence of eternal life.[1]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그 어떤 죄인도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은 먼지 만한 죄도 보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구원하시고 명령하신 것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사랑이 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인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작한 사랑으로 그 어떤 세상의 권세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장으로 불려지는 고린도전서는 사랑, 믿음, 소망을 말하면서 그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들의 많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짜로 밝혀 지고 다시 다른 진리로 대체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
러하다.
아마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16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 어떻게 하셨는가?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독생자 예수님은 본체 하나님이시나 그렇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나긋나긋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피 흘려 자신을 바치는 실천한 사랑이다.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려서 실천한 어머 어마한 사랑이다.
피를 흘린 대상이 전혀 가치 없는 오히려 자신을 반대하고 죽이기 까지한 대상을 위해 행동한 사랑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다.
과연 사랑과 진리는 다른 것인가? 하나는 딱딱하고 하나는 나긋나긋하게 느껴지는 것은 왠 일일까?
그러나 성경의 본문들을 살펴 보면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하는 동반자인 것을 알 수 있다. .
사랑과 진리는 영원한 친구이기 때문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이 진리는 참되고 옳은 인생의 길을 넘어서서,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복음을 구성하고 있는 가르침의 본체이다(갈 5:7; 엡 1:13; 골 1:5; 살후 2:12-13). 거짓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는 조화되지 않는다. 비록 한 행동이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큰 유익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거짓과 결부되어 있으면 결코 사랑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약 40년 후에 사도 요한은 이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 에베소에서 온 사자에게 편지를 전한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장로들을 만나 부탁하였던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아셨다고 말씀하셨다(계 2:1-3)
그러나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 책망은 그들이 처음 가졌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자신의 교회를 돌아 보아야 할 경고이다.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처음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왜 예수님은 앞에서 사도 바울이 염려하였던 거짓 교사와 사도들을 이겼을 뿐 아니라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며 자신을 지켰던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잊었다고 꾸짖으며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엄청난 경고를 하셨을까를 연구해 보며 우리는 그 첫 사랑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앞에서 말한 토마스 박사가 말한 것과 같이 사랑과 진리가 자매간이라면 어떻게 에베소 교인들은 진리를 지키면서 사랑을 잊을 수 있을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모본을 따르라고 하면서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에베소에 실제로 일어날 거짓 교사들에게 대한 경고를 하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에 교회의 은사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고전 12:30하) 하시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을 시작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전 13:4-7)
[1] Daniel L. Akin, 1, 2, 3 John,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1), 38: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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