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7.저녁예배설교(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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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약식)

설교
서론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일하던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서 또 넘어지고 맙니다. 조카 롯을 방치한 아브라함이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아브라함을 붙드십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본론
첫째로 온전함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부족함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재앙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랄로 가서 또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답답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애굽왕 때와 달리 분명히 ‘사라’란 이름을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갔을 때, 사래는 ‘여인’으로 표현됩니다. 사래란 이름은 아브람의 아내란 명칭이 붙을 때와 아브람이 계획을 꾸밀 때만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 본문에서는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다고 나옵니다. 언약의 어머니가 될 사라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도 잊어버린 아브라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전능함도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그는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아비멜렉은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취합니다. 또한 아내로 취함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동맹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어떤 자인지 모르는 아비멜렉으로서는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다. 왜냐면 그 당시 아브라함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정착민입장에서 언제 강도떼로 바뀔지 모르는 험악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아비멜렉은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냐’고 반문합니다. 5절에서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6절에서 아비멜렉이 온전하다고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아비멜렉의 호의와 온전함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온전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지키는 그 모든 온전함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온전함이란 선물을 주십니다.
두 번째, 이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믿지 않는 아비멜렉을 온전하게 하셨습니까. 꿈에 나타나셨습니까. 바로 믿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라는 지금 특별한 상황입니다. 애굽왕때와는 다릅니다. 그 때, 성경은 사라가 불임이었다고 이전부터 강조합니다. 하지만 지금 사라는 내년에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에게 팔려갔습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 이루어질 순간인데, 이루어지지 않는게 더 좋을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라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계획을 이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셨습니다. 바로 이순간 사라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왜 애굽왕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후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1장 22-34절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맹관계, 최소 불가침조약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 덕을 아비멜렉과 그랄도 보고싶다는 것입니다. 만약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행하셨다면, 아브라함은 애굽에 정착했을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아야할 아브라함이 오히려 애굽에서 더욱 머물렀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14장에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2장의 사건으로 애굽과 아브라함은 완전히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가나안에서 살며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성취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조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하신 것입니다. 그와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를 초대하시고, 결국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되는 거룩한 화합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니 어떤 일에도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지자라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우리와 하나님의 뜻이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지자라 하십니다. 솔직히 오늘 본문을 보면 선지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야기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아비멜렉과는 길게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4절에서 언급한 ‘의로운 백성을 멸한다’는 표현은 18장 25절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탄원하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때 분명, 죄를 지은 자는 소돔이고 아브라함이 중재자였는데, 지금은 그 역할이 바뀌어 있습니다. 선지자 다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아비멜렉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단언하십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너를 위해 기도해야 너가 살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죄를 지은 자가 죄를 짓지 않은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높은 지위에 있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잘못한 아브라함에게 배상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지자라 하십니다. 우리가 약하고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선지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아비멜렉이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러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사는 자입니까. 특별히 태신자전도주일을 앞두고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선지자의 모습을 보이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함의 근본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통해서 온전함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선지자라 칭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선지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온전함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하시고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지자의 사명, 복음전도를 다하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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