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유다

창세기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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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유다를 통해 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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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다와 유다
(2018.7.22 요코하마 온누리교회 주일예배-서 현 목사)
본문: 창38:1-10
주제: 죄 앞에서 상반된 반응이 있다.

1. 서론-두 명의 유다.

성경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동생 요셉을 팔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 이름도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로마가 인구 조사를 하려고 할 때 저항한 지도자 이름도 유다입니다.(행5:37) 이방인을 아내로 맞이했던 레위인 중 한 사람의 이름도 유다입니다.(스10:23)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유다가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몇 명의 유다를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다는 두 명일 것입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 상인들에게 은 20에 판 유다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유다가 있지만, 사람을 팔고 돈을 받은 유다는 두 명 밖에 없습니다.
이 두 명의 인생은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같습니까? 죄인이라는 점이 같습니다. 이들은 돈 받고 사람을 팔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람을 배신한 것이 같습니다. 한 사람은 가족을 배신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습니다. 또한, 죄 짓고 나서 후회하는 모습도 같습니다.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동생 요셉을 판 유다는 한 지파를 이룹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태어납니다.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죄를 지었지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스스로 생명을 버립니다. 죽고 나서도 비참한 모습이 됩니다. 영원히 좋지 않은 이름으로 기억되고 맙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오늘 유다와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두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야곱의 아들 유다처럼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와 같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2. 본문

1) 가나안 사람을 만나러 내려가다.

창38:1-2 를 읽어 주십시오.
그즈음에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히라라고 하는 아둘람 사람에게 갔습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사람의 딸을 만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동침했습니다.
유다가 형제들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야곱을 떠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야곱을 떠난 아들은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유다고, 다른 한 명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버지를 떠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떠났다고 합니다. 유다는 아버지와 관계가 나빴습니다. 오히려 형제들과 유대감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을 떠납니다. 동생 요셉을 팔자고 한 사람이 유다입니다. 그는 형제들이 비밀을 지켜줄까 의심했을 것입니다. 같이 있으면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납니다. 형제들을 떠납니다. 문제는 그가 가나안 지역에 갔고, 가나안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디나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디나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가족을 살려주셨는데, 유다는 다시 죄의 기억으로 돌아갑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항상 범죄자는 다시 범죄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유다도 그랬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고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제사장들에게 돌아갑니다. 그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유다는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세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유다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 지켜야 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의 아들 두 명이 죽습니다. 그것이 유다의 가정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러분, 갈등이 있어도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십시오. 떠나면 안됩니다.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유다에게는 어떤 비극이 있었습니까? 맏아들 에르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될 정도면, 유다의 장자가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르가 죽자, 에르의 동생 오난이 에르의 아내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여성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가족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동생이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결혼하고 형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위해 형수를 이용합니다.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인은 동생에게 이용당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습니다. 결국 오난도 죽게 됩니다. 창38:9-10 를 읽어 주십시오.
그러나 오난은 그 자손이 자기의 자손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녀의 침소에 들 때마다 형의 자손이 생기지 않도록 땅에 설정했습니다. 그가 한 짓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셨습니다.
이제 막내 아들 셀라가 남았습니다. 셀라가 다말과 결혼해야 합니다. 유다는 불안합니다. 셀라까지 죽으면, 아들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에게 말합니다. “셀라가 자랄 때까지 친정에 가 있어라.” 이것은 며느리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남편을 잃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다말은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셀라가 성장해도, 유다는 결혼시키지 않습니다. 다말을 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다의 아내도 죽었습니다. 유다는 두 명의 아들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며느리를 버렸습니다. 가나안에 간 결과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유다와 다말의 관계.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다말은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자녀도 없는 여인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요? 누군가가 유다가 다말이 있는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다말은 그 소식을 듣고 계획을 세웁니다. 시아버지와 함께 자서 아이를 얻으려고 하는 계획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다말은 절실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유다의 책임으로 기록합니다. 연약한 다말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38:14 를 읽어 주십시오.
그녀는 과부 옷을 벗고 베일로 얼굴을 가려 변장을 하고는 딤나로 가는 길가에 있는 에나임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셀라가 다 자랐는데도 자기를 셀라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말은 변장했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처럼 옷을 입고,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을 보고 당연히 창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말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고,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말과 떨어져 지낸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다말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다말과 함께 잡니다. 다말은 유다에게 담보를 받습니다. 도장과 도장 끈, 그리고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신분증을 의미합니다. 신용카드를 의미합니다. 자동차 열쇠를 의미합니다. 본인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받습니다. 나중에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다말의 계획입니다. 나중에 유다가 담보물을 받으려 할 때 이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쌍둥이를 임신합니다.
유다는 다말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말을 기억하십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다말에게 쌍둥이를 주십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은 ‘종려나무’를 의미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쌍둥이를 낳게 되는 것이 그 이름에 어울립니다. 남편 없이 오랜 시간을 지낸 불쌍한 여인을,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유다는 그때야 며느리를 기억합니다. 남편 없는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 아이들이 유다의 아이임을 설명합니다.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습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유다의 아내가 누구인지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낳은 아이들이 유다의 아이들임을 기록합니다. 다말이 유다의 자손을 이어가는 중요한 사람임을 기록합니다.

3) 유다의 변화.

유다의 모습을 보십시오. 형제를 팔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 결과 아들 둘이 죽고, 아내가 죽습니다. 며느리가 자신의 아이를 낳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운 사건이 가득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다의 결말은 축복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창44:33-34 를 읽어 주십시오.
그러니 제발 이 아이 대신 이 종이 내 주의 종으로 여기 남게 하시고 이 아이는 자기 형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 아이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제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께서 불행한 일을 당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시험했습니다. 형들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입니다. 오랜만에 형제를 만납니다.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옛 모습 그대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시험의 상황 속에서, 유다는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는 다른 동생 대신 자신이 남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고통 받는 것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동생을 팔았던 유다가, 변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야곱에게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 축복대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태어납니다. 다윗 왕조가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다말은 남편을 잃고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다는 부끄러운 이름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통로로 쓰임 받습니다.

3. 결론-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동생 요셉을 판 유다는, 가나안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들들이 악한 일로 죽었습니다.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이름은 성경에 기록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며느리와 잤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가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시간이 지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태어납니다. 다말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다시 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주며 후회했습니다. 그는 성전 뜰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는 후회는 했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몸이 나무에서 떨어졌습니다. 몸이 갈라졌습니다. 내장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피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유다의 이름은 지금도 부끄럽게 남았습니다. 행1:18-19 를 읽어 주십시오.
유다는 자기 불의의 대가로 밭을 샀는데 거기서 그는 곤두박질해 배가 터지고 내장이 온통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이 밭을 그들의 지방 말로 아겔다마라 불렀는데 그것은 ‘피의 밭’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유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죽음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똑같이 죄 짓고, 누가 봐도 부끄러운 삶을 살던 두 유다가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놀랍게도,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요셉도, 예수님도 돈 받고 팝니다. 같은 일을 한 유다 중 한 사람은 변화되고, 한 사람은 자살합니다. 가룟 유다가 태어났을 때, 아마 예수님의 조상 유다를 생각하며 그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죄 지었지만 변화된 것처럼, 너의 삶도 그렇게 되기 바란다’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 집의 비밀. 나의 과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다윗의 조상.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가 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기 원하십니까? 죄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로서, 회개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후회만 하며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선포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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