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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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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본문

Acts 27:27–44 NKRV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서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힘들기 마련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련들과 어려움들이 찾아오곤 하죠. 아니, 사실 더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술술 잘 풀리는 일도 우리는 이상하게 안 풀리고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고 하곤 하죠. 겉으로 보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어 봤자 별 볼일 없구먼. 예수 믿어 봤자 그렇게 힘든데 대체 왜 믿는겨? 그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말에 솔깃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잘되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잘 안 되는데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까지 예수님 잘 믿겠다고, 예수님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예수님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으면 좋겠으니 이 한 몸 던지겠다고 나선 위대한 사도의 끊임없는 어려움과 풍파와 괴로운 사건들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도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상한 모습을 관찰하게 됩니다. 대체 이렇게나 힘든데, 대체 그의 행동과 말은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었을까요?
이쯤되면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은 복음이 주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의 중심에서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강력하게 이리로 저리로 운전하며 앞으로 엑셀을 밞는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잘 되기 위해 전도하는 것도 아니었고, 잘 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잘 되어야 하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잘 되어야 하는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바울은 이태나 구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드디어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는 길마저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험한 바다에서 이리저리 표류하고 떠돌며 불안한 가운데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자정쯤 되어서 드디어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닻 넷을 내렸습니다. 상륙하고자 한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배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배가 운항되며,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떻게 일을 해야 배가 올바르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상황 속에서, 사공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도망 치려고 닻을 내리는 체하면서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는 것을 보고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찾아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긴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사공들이 배를 바다에 놓으려 하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모두가 살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죠.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버려서 더 큰 사건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날이 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진맥진해있었고 먹을 힘도 없었습니다. 이 때도 바울을 일어나 음식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와 동일하게, 태연하게 이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마치 동일한 상황 속에 처하지 않은 것 같은 바울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놀랍니다. 그는 감옥에서 찬양했습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일이 남 일인 것처럼요. 그는 매를 맞기 전에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그냥 놓아달라고 하면 무죄 선언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지만 로마로 굳이 가겠다고 사서 고생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마치 매 맞는 일이, 고생스럽게 목숨을 걸고 로마로 가는 일이 마치 남 일인 것처럼요.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는 이 배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명료하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주 동안 배고프고 굶주린 이들에게 음식을 권합니다. 마치 자기는 배고프지 않고 굶주리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죠. 바울을 보면요, 뭔가 같이 있는데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제까지 살펴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왜 그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이 주장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만, 곁에서 보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행동과 말들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참 생명과 다함 없는 기쁨에 비하면, 그 복음이 올바르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또 한가지 새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방금 읽은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두 번이나 ‘구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구원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을 생각해보시면, 배에 사공이 없어 죽을 상황에서 구원 받는 것이나, 굶어 죽는 상황에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지 어디서도 사도 바울의 말만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이라고 유추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그들에게 전도하려는 의미로, 힘들어 죽겠는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위로를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 것 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이 주장하는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말에 완전히 배여 있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말 속에서, 그의 행동 속에서 고스란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 같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조차 그랬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연기한 것도 아니었고, 복음을 전해야된다는 목표의식에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마치 이 상황이 자신의 상황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고 객관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고 불안해하며 이 정도 상황에서는 사공들처럼 도망가려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짜. 믿었던 겁니다. 진.짜. 복음 안에 거했던 겁니다. 바울은 참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 복음이 너무나 귀하여 그 안에 던졌던 겁니다. 그렇게 복음에 사로잡힌 자로서 사도 바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배고픔도 아니었고 질병도 아니었고 구타도 핍박도 아니었고 망망대해에서 파선할 지경이 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이기게 하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복음 자체에서 흘러나왔으며, 굳이 복음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과 말을 다른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누가는 복음서가 기록하는 최후의 만찬 때의 예수님을 묘사했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을 써서 바울이 행한 일을 씁니다. 35절입니다.
Acts 27:35 NKRV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성찬을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모습은 완전히 복음에 잠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찬을 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의 떡을 나누는 손길과 올리는 기도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할 만했습니다.

결론

이것이 바로 복음에 사로잡힌 자의 모습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입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진짜 복음에 사로 잡힌 자는 굳이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조차 그 모습을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선택에서, 작은 단어 사용에서, 작은 행동에서부터…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 진짜-가짜가 판별되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과연 복음에 우리 삶을 던진 자들인지 검증받게 됩니다. 특별한 기회에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하게 통로가 제공되었을 때에 의지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열심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 또한 쉽지는 않지만 말이죠. 하지만 소망이 끊어졌을 때, 고통 가운데, 심지어 행하는 일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찾아왔을 때도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음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태연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을 격려할 수 있는 그 힘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 안에 자신을 깊이 담구었던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치 세상은 이 배와 같습니다. 파선해 갑니다. 그리고 파선하는 배 안에 있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통이 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함께 힘들고 심지어 더 힘듭니다. 그리고 그 파선해가는 배 안에 있는 바울과 우리를 곰곰히 비교해보길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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