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15.수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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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한 본문이다. 이때 본문 정황을 살펴보자.

Notes
Transcript

본문분석

וְשָׂרַי֙ אֵ֣שֶׁת אַבְרָ֔ם1/4
לֹ֥א יָלְדָ֖ה1/8
ל֑וֹ1/2
וְלָ֛הּ שִׁפְחָ֥ה מִצְרִ֖ית1/4
וּשְׁמָ֥הּ הָגָֽר׃1/2
( WTT)
그리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1/4
아이를 낳지 못했다(칼 완)1/8
그에게1/2
그리고 그녀에게 이집트 여종이 있었는데1/4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1/2
- 15장에 하나님께서 자손을 약속하셨다.
- 그리고 가장 강력한 언약식을 하며 확정하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사래에게는 이집트출신의 여종이 있었다. 이름은 하갈이었다.
- 이집트인 여종이란 것은 아마 사래가 파라오에게 팔렸을 때 얻었던 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아브람에게 주기 위해 특별히 얻은 종인가? 3절을 보면 그럴수도 있을거같다. NICOT는 하갈이 아브람이 사래를 팔았을 때 얻은 종으로 보고 있다.
- 이집트사건 이후 그래도 시일이 좀 지난 상태인데 언급된다.
וַתֹּ֙אמֶר שָׂרַ֜י אֶל־אַבְרָ֗ם הִנֵּה־נָ֞א עֲצָרַ֤נִי יְהוָה֙ מִלֶּ֔דֶת1/4
בֹּא־נָא֙ אֶל־שִׁפְחָתִ֔י1/8
אוּלַ֥י אִבָּנֶ֖ה1/16
מִמֶּ֑נָּה1/2
וַיִּשְׁמַ֥ע אַבְרָ֖ם1/4
לְק֥וֹל שָׂרָֽי׃1/2
( WTT)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내가 아이 낳는 것을(칼 부정사) 막았으니(칼 완)1/4
내 여종에게 가소서(칼 명령)1/8
내가 얻을 지도 모르니까요(니팔 미완)1/16
그녀에게서1/2
- 사래는 자신의 불임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히 인지한다.
- 그런데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다.
- 이때 사래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 아브람에게 가라고 한다.
- 그리고 얻을 지도 모른다라는 불확실하고 수동적인 표현을 쓴다.
- 즉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남편에게 새 여자를 주는 것이 내킬리가 있겠는가.
- 라헬과 레아는 서로의 경쟁 때문에 줬다. 사래가 이럴 이유가 무엇인가.
- 아마도 15장의 언약식 후, 아브람이 계속 사래를 조르지는 않았을까? 계속 아이를 바라는 눈초리를 임신의 눈치를 주지 않았을까? 추측이지만, 이런 사래의 수동적인 태도는 아브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명령형을 쓴다. 아브람을 최대한 존중한 것이다. 내키지 않은 정도로 떠나 싫지만, 그래도 아브람을 생각하며 명령한 것이다.
וַתִּקַּ֞ח שָׂרַ֣י אֵֽשֶׁת־אַבְרָ֗ם אֶת־הָגָ֤ר הַמִּצְרִית֙ שִׁפְחָתָ֔הּ1/4
מִקֵּץ֙ עֶ֣שֶׂר שָׁנִ֔ים1/8
לְשֶׁ֥בֶת אַבְרָ֖ם1/16
בְּאֶ֣רֶץ כְּנָ֑עַן1/2
וַתִּתֵּ֥ן אֹתָ֛הּ לְאַבְרָ֥ם אִישָׁ֖הּ1/4
ל֥וֹ לְאִשָּֽׁה׃1/2
( WTT)
그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애굽인 여종 하갈을 취했다(칼 바익톨)1/4
10년후에1/8
아브람이 정착한지(칼 부정사)
가나안 땅에1/2
그리고 그녀(사래)가 그녀(하갈)를 그녀(사래)의[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그의 아내로 주었다(칼 바익톨)1/4
그에게 아내로1/2
- 가나안땅에 정착한지 10년 후에 사래가 하갈을 준다.
- 그런데 본문은 사래가 그전부터 하갈을 데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10년후, 하갈을 취하여(데리고와서) 남편에게 주었다고 한다.
- 10년후가 따로 강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래의 심정이 나타난다.
- 또한 마지막 1/4에 자기 남편이라 나온 것을 봐도 사래의 심정이 나타난다.
- 마치 사래가 둘을 중매서서 결혼시킨 것 같은 모양새다.
- 이것은 둘의 결혼의 권리, 즉 하갈의 권리가 사래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 하갈이 아이를 낳든 어쩌든 사래는 하갈 위에 있는 자다. 성경은 확실히 하고 있다.
וַיָּבֹ֥א אֶל־הָגָ֖ר1/4
וַתַּ֑הַר1/2
וַתֵּ֙רֶא֙ כִּ֣י הָרָ֔תָה1/4
וַתֵּקַ֥ל גְּבִרְתָּ֖הּ1/8
בְּעֵינֶֽיהָ׃1/2
( WTT)
그리고 그가 하갈에게 갔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칼 바익톨)1/2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칼 완) 보았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여주인을 무시했다(칼 바익톨)1/8
그녀의 두눈에1/2
-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 아브람은 절대 거부하지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행한다.
- 그리고 정말 쉽게 임신한다. 마치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듯이 너무나 쉽게 임신한다.
- 오해할만하지 않은가?
- 모든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매끄럽게 진행된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같다.
- 지금까지 마음 졸였던 것이 헛일인듯하다.
- 하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 하갈은 자신의 ‘여주인’을 두눈으로 보며 무시한다.
- 사래를 무시하는게 하나님의 뜻인가?
- 너무나 자연스럽게 된 일, 임신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그 결과는 악이다.
- 자신을 이렇게 해준, 둘을 붙여준, 그래서 둘의 결합, 결혼의 권한을 가진 사래가 무시당한다.
-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진행되게 하셨을까?
- 다음절에 나오겠지만, 이제 조급해진 아브람을 위해서다.
וַתֹּ֙אמֶר שָׂרַ֣י אֶל־אַבְרָם֘ חֲמָסִ֣י עָלֶיךָ֒1/4
אָנֹכִ֗י נָתַ֤תִּי שִׁפְחָתִי֙ בְּחֵיקֶ֔ךָ1/8
וַתֵּ֙רֶא֙ כִּ֣י הָרָ֔תָה1/16
וָאֵקַ֖ל1/32
בְּעֵינֶ֑יהָ1/2
יִשְׁפֹּ֥ט יְהוָ֖ה1/4
בֵּינִ֥י וּבֵינֶֽי֗ךָ׃1/2
( WTT)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칼 바익톨) 나의 모욕은(모욕당함) 당신의 것이오[당신의 책임이오]1/4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에 주었다(칼 완)1/8
그런데 그녀가 임신함을(칼 완) 보고[알고]1/16
나를 무시한다(칼 바익톨)1/32
그녀의 두눈으로1/2
여호와께서 판단하실 것이다(칼 미완)1/4
나와 당신사이를1/2
- 이 무시, 멸시에 대해 사라는 하갈을 건드리지 않는다.
- 자신이 바로 할 수 있지만, 할 수없다. 왜냐면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 사래는 이상황에서도 순리에 따라 아브람을 찾아가 말한다.
- 그리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를 원한다.
- 동시에 남편인 아브람을 어쩔거냐고 압박한다.
- 왜냐면 아브람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6 וַיֹּ֙אמֶר אַבְרָ֜ם אֶל־שָׂרַ֗י הִנֵּ֤ה שִׁפְחָתֵךְ֙ בְּיָדֵ֔ךְ1/4
עֲשִׂי־לָ֖הּ1/8
הַטּ֣וֹב בְּעֵינָ֑יִךְ1/2
וַתְּעַנֶּ֣הָ שָׂרַ֔י1/4
וַתִּבְרַ֖ח1/8
מִפָּנֶֽיהָ׃1/2
( WTT)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다(칼 바익톨) 보라 당신의 손안에 (있는) 당신의 여종이오1/4
그녀에게 행하시오(칼 명령)1/8
당신의 눈에 좋을대로1/2
그후 사래가 학대했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녀(하갈)은 도망쳤다(칼 바익톨)1/8
그녀(사래)의 앞으로부터1/2
- 사래가 2절에 아브람에게 명령형을 쓴 것은 아브람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 자신은 상관없이 취하여 자손을 보란 뜻었다.
- 그런데 여기 아브람의 명령형은 책임회피다.
- 니종이니 니맘대로 하란 것이다.
- 그것도 ‘눈’이란 표현을 씀으로 하갈이 한 그대로 갚아주라고 은근히 말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 사래가 아브람에게 온 것은 아브람에게 조치를 하라고 해서였다.
- 하지만 아브람은 사래에게 떠맡겨버린다.
- 아브람과 사래가 함께 나올 때, 아브람은 한번도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 심지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이가 있을 것이라 했을 때, 사라는 웃고 만다. 이때도 아브람은 나서지 않는다. 구약에서 아내의 서원을 남편이 파기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남편의 책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여기서도 사래의 학대와 하갈의 도망침에 아브람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 한명은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 아내이며, 한명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다.
-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
- 결국 하갈은 임신한 그 무거운 몸으로 도망치기에 이른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그러고서야 정리가 된다.
l 하갈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성경기자의 소개때만 나오고 사래는 한번도 하갈이라 칭하지 않고 자신의 ‘여종’이라 칭한다.
l 6절에서는 아브람도 하갈의 이름이 아닌 ‘여종’이라고 칭한다.
l 기자가 사라에 대한 사실을 말할 때는(1,3절) 아브람의 아내란 칭호를 꼭 붙인다. 반대로 사래가 자신의 말을 할 때는 그냥 사래라고 한다.
l 이 당시, 그리고 약 1000년 후까지 본부인이 임신하지 못하면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임신하게 하는 일이 계속 됬다. 당시의 문화였다. 일종의 대리모 개념이다. 이런 개념은 우리에게도 있다.
l 3절에서 하갈은 정말로 ‘도구’같다. 사람이 아니다. 하갈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l 또한 이것은 결혼의 의미의 퇴색이다. 에서 결혼은 두사람의 결합이었다. 자식은 그 결과다. 현재 주객전도가 되었다. 10년이란 가나안의 생활이 이 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다 나쁘게 나타났다.
l 사래가 하갈에게 한 것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온 법규 그대로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임신한 여종이 여주인에게 막대한다면 그 여종에게 노예인장을 찍고 주었던 모든 특권을 거둬들이고 다시 종으로 다루라고 되어 있다.
l 그리고 사래는 학대하는 자가 되었고, 하갈은 학대받는 자가 되었다.
l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l 이 일련의 행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가?
l 그렇다면 심판받아야 하는 자가 사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l 물론 하갈의 오만이 있었기에 이집트의 경우와는 다르다.
l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는 않는거같다.
l 실제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l 마치 아이를 주고 그 행위를 감찰하시는 것 같다.
l 을 생각해보자.
설교
서론
우리는 지난시간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온전한 순종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정말 영웅적으로 행했습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롯을 구하고, 두려움에 빠졌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최선의 때에 임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브람이 알고 있는 가장 극적인 언약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이런 아브람이 삐긋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함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우리가 인내하고 순종함에 있어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하나님앞에 바로 설수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지난 시간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후손에 관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자식하나 없는 아브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이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16장의 일을 이해할 수있습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 사래는 계속해서 불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으로서는 뭔가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 생각합니다.
왜 10년이나 지났는데, 지난 10년간 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 하고 있을까요. 고대 중동에는 이런 경우에 대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자신의 여종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종의 대리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지난 10년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 행동의 배경에는 아브람의 무언의 재촉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당신이 불임이니 어떻게든 아이를 가질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사래는 아내의 의무로서 자신의 여종을 자신의 남편에게 내어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이미 떠나왔고, 지금도 세상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습을 따라 하갈을 취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인내의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인내와 기다림에 세상의 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란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임인 사래를 인내해 왔습니다. 언젠가 자신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렸습니다. 의 약속, 자신으로 인해 큰 민족이 세워질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온지 10년, 그의 기다림에 세상의 논리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람의 생애에 제대로된 전투와 전쟁의 경험은 14장밖에 없습니다. 분명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인내와 기다림에 세상의 방식을 섞었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기자는 여러가지 부분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래의 소개입니다. 1,3절에 성경기자가 사래를 소개할 때, ‘아브람의 아내’란 말을 꼭 붙입니다. 반대로 사래가 말을 할 때는 이 호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말하는 2, 5절은 모두 여종에 관련된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사래를 향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가 지금 아브람의 아내가 맞느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사래의 그 결정에 대해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래의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갈과 동침하여 임신 시킵니다. 실제 4절에서 아브람과 하갈의 동침과 임신은 너무나 간단하게 나옵니다. 정말 아침에 밥을 먹었다라고 적듯이 너무나 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관하심이 보입니다. 마치 아브람에게 그래, 네 맘대로 한번 해보라고 하시는 것같습니다. 아브람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둘째, 온전한 인내와 기다림없이 일어난 일은 오히려 악을 불러옵니다.
마치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편을 드시는 것같습니다. 왜냐면 하갈이 너무나 쉽게 임신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갈과의 동침이 하나님의 뜻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모두 악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 시작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하란을 떠나고 가나안의 본거지도 떠났습니다. 애굽도 나왔습니다. 정말 하나님께만 의지할수 밖에 없는 광야의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습을 따른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과정은 어떻습니까. 과정의 악함은 하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절 전반절까지 하갈은 철저하게 도구입니다. 오로지 임신을 위한 도구입니다. 하갈은 애굽에서 사래에게 온 후 사래를 섬겼습다. 그리고 지금은 주인의 뜻에 따라 몸을 바칩니다. 거기에 하갈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임신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창세기 12:3 NKRV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 후반절은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래와 아브람은 하갈의 이름을 한번도 부르지 않습니다. 모두다 ‘여종’입니다. 이름한번 부르지 않습니다. 철저한 도구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그 결과도 악합니다. 하갈은 임신을 깨닫자 자신의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아브람에게 항의합니다. 아브람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내 맘대로 하라고 합니다. 정말 14장의 영웅적 면모와 15장의 인내는 사라지고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자 한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이것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온 법 그대로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여주인이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는데, 여종이 교만하게 행할때, 모든 특권을 빼았고 철저히 종으로서 대하라고 합니다. 사래는 함무라비 법전을 그대로 이행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갈은 결국 아이를 임신한 채로 도망가기에 이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과 사래가 정말로 믿음의 조상답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 당시 귀족중 하나같습니까. 노예를 학대하고 자기 좋을대로 살아가던, 하나님모르는 자와 똑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애굽에서 아브람의 후손들이 학대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심판하고 있으며 희망의 내일이 아브람과 후손들에게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반대가 되었습니다. 사래가 애굽인 하갈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가학자와 피학자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학대하는 자, 가학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내와 기다림에 실패한 자의 결말입니다. 세상보다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셨습니다. 마치 시험하시듯 아브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쉽게 하갈이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마치 아브람에게 그래 너가 원하는대로 한번 해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어땟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도망간 하갈에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하갈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아이역시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태가 최악으로 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인 하갈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믿게 하셨습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풍습을 따랐을 때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인내하지 못함은 세상의 논리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면 해결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을 따랐을 때, 그 시작부터 과정 결과까지 모두다 악으로 점칠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에게 죄악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갈을 살리셨습니다. 이스마엘을 살리셨습니다. 오히려 애굽인 하갈이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기다림 속에 세상의 논리가 개입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인내가 온전하지 않다면, 우리의 삶속에 그리스도의 빛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갈을 살리고 이스마엘을 살리신 것처럼 분명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악을 우리는 다시한번 그리스도께 떠맡겨야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겁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도 대신 짊어져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 거친 십자가가 힘들어도,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무겁고 거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에게 미소지으시는 그리스도를 느끼기 원합니다.
그를 위해 이 세상의 논리와 유혹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를 향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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