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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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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본론

2절부터 오늘 본문 바로 앞까지 사도바울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전으로 간 바울을 유대인들이 잡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큰 소란을 일으키자 로마군 천부장이 부대내로 데리고 가라고 명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천부장에게 허락을 얻어 히브리어로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났는지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주요 내용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Acts 22:17–18 NKRV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Acts 22:22 NKRV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Acts 22:21 NKRV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Acts 22:17,18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거기 모였던 유대인들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습니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다가 말고 소리를 지르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다! 죽여라, 죽여라!’를 외쳤습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습니다.

본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할 때도 그랬습니다. 스데반을 향해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째깍째깍 흘러서 어느덧 위대한 예루살렘 공회의 결의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바울의 선교팀을 통해 유럽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서 보듯이 탄탄하고 단단한 믿음의 선구자들이 바울 뒤로 많이 나왔습니다. 이미 성령의 손에 들린 복음은 날개를 단듯 수많은 영혼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언약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오래된 가르침과 확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과 같이 그들이 이제까지 더럽다고 여겼던 것을 이제 깨끗하다고 말해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 쌓아온 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에 동의해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의를 포기할 수 없었고,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그들의 타협하지 않는 확신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이에 대해 말합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주셔서 바울 당시에도 기록된 말씀으로 남아있던 성경을 도구로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사용하시며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곳곳에서 그 놀라운 새생명이 꽃피는 사역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를 구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 영광이 빼앗기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죠.
과연 우리는 어떠한지 살펴보아야합니다. 결코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우상을 만들기에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든, 그게 가정이든 사회든 친구들 사이에서든 심지어 교회에서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에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무리 가운데 서게 될 때 우리가 포기하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명을 새롭게 꽃피우게 하시는 부활의 역사를 본다면 우리는 바람과 같이 움직이시는 성령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그 부활의 역사는 우리에게 현재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영혼 가운데 역사하시며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너무 소란을 피우자 사도바울을 천부장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수상하니까 일단 채찍으로 때리며 심문하라고 명합니다.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나무막대에 가죽 채찍을 달고 끝에는 쇠붙이를 붙힌 끔찍한 채찍이었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 건 다반사였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나요?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로마 시민을 함부로 때리면 큰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은 깜짝 놀라서 직접 내려와 바울과 얘기합니다. 자신은 큰 돈을 주고 시민권을 얻었다며 바울의 말을 의심합니다. 바울은 얘기합니다. 내 시민권은 그 정도가 아니라 날 때부터 얻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 온 가족이 로마 시민이다. 라고요.
우리가 바울의 행동을 유심히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다소 출신 유대인이라고 천부장에게 얘기했을 뿐입니다. 다른 도시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거나 했을 때 그는 참았습니다. 자신을 로마인이라고 밝히기보다는 말이죠. 갑자기 바울이 고통이 두려워졌던 것일까요? 대체 왜 느닷없이 예루살렘에 와서는 몸을 사린 것일까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단지 버려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권리는 잊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을 보며 복음을 위해 사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육신에 속한 이름표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리소스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 삶의 일관성을 유지시켜주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론 얻어맞는 고통을 참았습니다. 수모를 견뎠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고 감옥에 던져지기를 수차례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로마인이라는 사실로 그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데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전파하는데 더 유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다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뛰어든 셈이었습니다.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활용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있으면 자랑하지 않고는 못견디고, 없는 것이 있으면 없다고 징징대지 않고는 못견디지만, 사도바울은 그 모든 것을 강력한 힘으로 컨트롤했습니다. 바로 복음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도 함께 보아야했기에, 복음의 아름다움을 그들도 맛보아야 했기에, 사도바울은 자랑할 수 있을 때 참았고 징징댈 수 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를 자랑했습니다. 고통을 피할 수 있을 때 정면으로 받아내었고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주눅들고 두려움에 휩쌓일 수 있을 때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결론

유대인들과 사도바울.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지요. 우리 삶을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의를 포기할 수 없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소리지르며 복음을 향해 달려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마치 ‘이미 들은 사람들'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머물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까지 얻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자신의 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상 제조공장인 우리 마음을 항상 살펴야 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능력과 지혜와 리소스들을 잘 살피고, 적극적으로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주장해야합니다. 어쩌면 ‘목사'라는 타이틀로 예를 들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목사가 목사이기 때문에 목을 뻗뻗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모든 성도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뻗뻗하게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말씀을 전할 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내가 잘나서 당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목사'라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할며 당당하지 않을 때, 그것은 제 체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앞세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각자 가진 능력과 리소스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무너지면 너무 체면구기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 앞에 우리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이야기해줍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을 Gospel-Driven Life, 복음이 밀어 움직이는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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