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사역과 그 주인공

새벽 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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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위대한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습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다녀온 선교 팀과 베드로의 보고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얼마까지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해야하는 것이었고 이 중대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했습니다. 거룩한 회의 후에 모인 이들은 성령의 복음의 확장 사역이 너무나 분명하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을 절제시키기 위해 우상에 드렸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 것만을 말하고 이외 의식에서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중요한 회의 후에 우리는 위대한 선교사들의 다툼을 목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다툼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를 잘 살피고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본론

회의가 끝나고 모였던 이들은 흩어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와 실라와 함께 원래 선생으로 섬기고 있었던 안디옥 교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 사역을 함께 하다가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 안디옥에 머물며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Acts 13:36 NKRV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Acts 15:36 NKRV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여기서 우리말로 ‘며칠 후'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에서 며칠 후는 상당히 짧은 기간이지만 그것보다는 길 수도 있습니다. 얼마 동안 안디옥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바울은 바나바에게 두 번째 선교 여행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주된 이유는 1차 선교 여행 때 이미 방문했거나 개척했던 교회들을 방문해서 그들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 여행에 누구를 동역자로 데리고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게 됩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였는데요. 함께 데리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이 1차 여행 때 중도 하차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하지 않고 중간에 떠난 사람을 뭘 믿고 데리고 가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갈라섰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실라와 함께 북쪽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아시다시피 유럽으로까지 넘어가 처음으로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를 하게 됩니다. 반면 바나바는 1차 여행 때 바울이 처음 방문했던 구브로로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며 위대한 사도가 어떻게 이렇게 혈기를 못 이기고 다툴 수 있을까 생각하실 수도 있고, 바울에 이입되어서 ‘그렇지. 무르고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사람과 같이 일하면 내가 고생이지. 바울 선생님이 잘 결정하셨어.’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 위로자라는 별명을 지녔던 바나바는 사람이 참 좋아서 마가를 용서하고 데리고 가 함께 성장하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상당히 목표 중심적이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마가를 보고 답답해서 같이 갈 수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행전을 성령께서 영감하셔서 누가에게 기록하게 하셨을 때, 사사로운 개인의 성격 차이로 생긴 다툼을 기록하셨으리라 생각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그 힌트를 사실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 앞부분을 살피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30절부터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돌아온 바울과 그 일행은 교회에 편지를 전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사항이었죠. 그 결정사항이 무엇이었나요? 그 결정사항이 그렇게 결정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령께서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실 수 있도록, 이방인 가운데 거침 없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방해물을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했던 사항들은 단지 이방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불편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는 지켜야 당시 음란하고 우상숭배가 가득한 사회 속에서 거룩함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금지사항들 역시 성령께서 온전히 그들 가운데서 말씀으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편지를 성경은 ‘위로한 말'이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여기서 끝맺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편지를 들고 온 유다와 실라도 그냥 멀뚱멀뚱 있다가 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초청 목사님들이 오셨으니 설교를 들어봐야겠죠.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였습니다. 신약에서 선지자는 메시아를 예언하는 자들이 아니었죠. 이미 그리스도는 오셨으니, 말씀으로 권면하고 종말을 향해 소망 가운데 살도록 촉구하는 말씀사역자들을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굳건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사항을 힘입어 힘써서 안디옥 교회 내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했습니다. 그러다 2차 여행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계기는 또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형제 자매들의 영혼에 온전히 심기워 뿌리내리도록 하고자 하는 열망에 잔뜩 사로잡혔습니다. 다시 목숨을 내 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계로 뻗어나가 전파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얼마나 사도들이 성령의 힘과 지혜로 사역하는 가운데 그분께 자신들의 마음을 일치시키며 사역할 때, 얼마나 그들이 말씀에 집중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머물러서는 안 됐습니다. 이 좋은 소식은 반드시 이방인들에게 퍼져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련하게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롯 왕의 핍박을 사용하셨고, 지진과 같은 놀라운 표적도 사용하셨으며,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고,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툼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추악함이 드러나고,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상황을 통해서도 당신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바나바와 마가가 구브로로 가지 않았다면 바울이 말한대로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가자는 말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겁니다. 바울은 유럽으로 올라갔으니까요. 구브로는 작은 사역지였지만 그곳에서 말씀으로 굳건케 하는 사역자는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바울의 개인적인 다툼을 통해서도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열망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바람과 같아 성령님 자체는 보이지는 않으나 너무나 선명하게 어디로 이 성령의 바람이 부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다툼과 분열과 욕심이나 정욕에 따른 시기와 질투를 절대 합리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가 아름다울 수 있더라도 그 결과 때문에 과정에서 발생한 추악함이 덮어지는 것은 인간의 역사나 그렇지 하나님 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참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은, 위대한 사도인 바울마저도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그 복음을 향한 열정을 사용하셨고, 그 다툼의 결과마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초점은 하나님의 복음을 향한 놀라운 열심과 열망입니다. 결코 우리의 다툼 자체가 아닙니다. 과연 우리의 열망은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내가 열심히 해서, 우리가 열심히 해서 사람이 붙고 사람이 오고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놀라운 열심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망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의 힘있는 선포에 있습니까? 그리고 동시에 현재 주신 서로 다른 성도들과의 연합, 서로 다른 교회와의 연합에 힘쓰되, 과거에 이미 엎질러진 물들을 놀랍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의 다툼마저도 당신의 놀라운 도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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