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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4.수요예배설교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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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심, 그 가는 여정, 힘듬, 현실의 부딛힘, 그러나 포기하지 않음.

Notes
Transcript

본문 분석

וַיֹּ֤אמֶר יְהוָה֙ אֶל־אַבְרָ֔ם1/4
לֶךְ־לְךָ֛ מֵאַרְצְךָ֥ וּמִמּֽוֹלַדְתְּךָ֖1/8
וּמִבֵּ֣ית אָבִ֑יךָ1/2
אֶל־הָאָ֖רֶץ1/4
אֲשֶׁ֥ר אַרְאֶֽךָּ׃1/2
( WTT)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칼 바익톨)1/4
너는 너의 땅[나라]으로부터 그리고 너의 친척으로부터 떠나라(칼 명령)1/8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1/2
그 땅으로1/4
내가 너에게 보여줄(히필 미완)1/2
- 재귀의 레가 쓰였다. 즉, 아브라함을 2번 말한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을 꼭 집은 것이다.
- 나라와 친척, 아버지의 집이 나뉜다. 자신의 아버지의 집이란 자신이 기반이 있는 모든 것이다.
- 마치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땅을 떠나 자신의 땅으로 올 것을 명하셨다.
וְאֶֽעֶשְׂךָ֙ לְג֣וֹי גָּד֔וֹל1/4
וַאֲבָ֣רֶכְךָ֔1/8
וַאֲגַדְּלָ֖ה1/16
שְׁמֶ֑ךָ1/2
וֶהְיֵ֖ה1/4
בְּרָכָֽה׃1/2
( WTT)
내가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 것이다(칼 익톨)1/4A
그리고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피엘 익톨)1/8B
그리고 내가 위대하게 할 것이다(피엘 익톨)1/16A’
너의 이름을1/2
그리고 너는 될 것이다(칼 익톨)B’
축복이1/2
- 전형적인 평형법이다.
- A그룹은 위대함 B그룹은 축복이다.
- A는 복수의 위대함(나라), A’는 단수의 위대함(네 이름)이다.
- B는 단수의 축복(너), B’는 복수의 축복(너는 축복)이다.
- 문법은 칼-피엘-피엘-칼이다.
- 즉, 한 구절을 통해 정말 축복이란 축복은 다 들어가있다.
- 1절에서 아브람이 책무를 말했다면(떠남), 2절은 부르심의 상급이 들어가있다.
여기서 나라는 보통 이방인을 가리킬때 쓰는 말이다.
וַאֲבָֽרֲכָה֙ מְבָ֣רְכֶ֔יךָ1/4
וּמְקַלֶּלְךָ֖1/8
אָאֹ֑ר1/2
וְנִבְרְכ֣וּ בְךָ֔1/4
כֹּ֖ל1/8
מִשְׁפְּחֹ֥ת הָאֲדָמָֽה׃1/2
( WTT)
내가 너를 축복한 자를(피엘 분사) 축복할 것이다(피엘 익톨)1/4
그리고 너를 저주한 자를(피엘 분사)[하찮게 여긴 자를]1/8
내가 저주할 것이다(칼 미완)1/2
그리고 너 안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다(니팔 완)1/4
그 땅의 모든(1/8) 족속들이1/2
- 축복과 저주가 전반절에서 나온다.
- 축복한 자를 축복은 피엘과 피엘로 나온다.
- 그런데 저주는 피엘과 칼로 나온다. 뉘앙스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 앞에 저주는 가볍게 여기다 하찮다라는 말이 피엘로 강조되어 저주의 뜻이 된다. 그래서 다른 뜻으로 쓰일 땐 빠르다, 날쌔다란 뜻도 있다.
- 뒤의 저주는 처음부터 뜻 자체가 저주하다라는 뜻이다.
- 어떤 식으로 아브람을 욕하든지 하나님께서 갚으시겠다는 뜻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지키심이기도 하다. 이방인가운데서 고생할 아브람에게 지키시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 후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할 때 족속은 혈연관계란 뜻이다. 작게는 가족, 크게는 한 혈통으로 묶여진 씨족마을을 뜻한다.
- 이것은 아브람과 전혀 관련없는 자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브람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고 한다.
- 이것은 그렇기에 아브람으로부터 올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 또한 아브람 개인에게, 너가 만나든지 만나지 않든지, 너를 본 사람은 그 본 것때문이라도,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있었다면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죄인들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는가. 아브람때문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아브람이 그들 중에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10명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했다. 그만큼 강한 축복을 아브람은 받았다.
וַיֵּ֣לֶךְ אַבְרָ֗ם כַּאֲשֶׁ֙ר דִּבֶּ֤ר אֵלָיו֙ יְהוָ֔ה1/4
וַיֵּ֥לֶךְ אִתּ֖וֹ1/8
ל֑וֹט1/2
וְאַבְרָ֗ם בֶּן־חָמֵ֤שׁ שָׁנִים֙ וְשִׁבְעִ֣ים שָׁנָ֔ה1/4
בְּצֵאת֖וֹ1/8
מֵחָרָֽן׃1/2
( WTT)
그래서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피엘 분사) 대로 갔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와함께 갔다(칼 바익톨)1/8
롯도1/2
그리고 아브람은 75세였다.
떠났을 때(칼 부정사)
하란으로부터1/2
-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 피엘동사에서 나타난다.
- 특이한 것은 롯도 따라붙었다는 거다. 왜 따라갔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담백하게 적지만 앞으로 문제가 될 것 은근히 드러낸다.
- 사라는 부부로 나오지 않은 것같다. 남편가는데 아내가 가는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 하란에서 떠났을 때, 75세란 말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갔단 소리다.
- 이것은 아브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다는 뜻이다.
- :2에 따르면 그 집안은 우상숭배집안이었다.
- 그러나 아브람이 100살이 넘을 때까지 셈은 살아있었다. 아브람은 셈이나 하나님을 믿는 친척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것같다. 영접여부는 확실치 않다. 유대문헌은 영접하고 오히려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설득히 우상에서 돌이켰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וַיִּקַּ֣ח אַבְרָם֩ אֶת־שָׂרַ֙י אִשְׁתּ֜וֹ וְאֶת־ל֣וֹט בֶּן־אָחִ֗יו וְאֶת־כָּל־רְכוּשָׁם֙ אֲשֶׁ֣ר רָכָ֔שׁוּ1/4
וְאֶת־הַנֶּ֖פֶשׁ1/8
אֲשֶׁר־עָשׂ֣וּ בְחָרָ֑ן1/2
וַיֵּצְא֗וּ לָלֶ֙כֶת֙ אַ֣רְצָה כְּנַ֔עַן1/4
וַיָּבֹ֖אוּ1/8
אַ֥רְצָה כְּנָֽעַן׃1/2
( WTT)
그리고 아브람이 사래를 그의 아내로 그리고 그의 형제의 아들[조카] 롯을 그리고 그들이 모았던(칼 완) 모든 재산을 취했다(칼 바익톨) 1/4
그리고 그 생명을[사람을]1/8
하란에서 얻었던(칼 완)1/2
그리고 아브람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위해서(칼 부정사) 떠났다(칼 바익톨)1/4
그리고 왔다(칼 바익톨)1/8
가나안땅을 향해1/2
- 아브람과 롯은 자신들의 종과 재산을 모두다 챙긴다.
- 이것으로 보아 그리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그곳에서의 삶도 충분히 만족스런 삶이었던 것같다.
-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 굳이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들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혹시 가축도 포함되어 있을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하반절에 출발해서 도착했다가 엄청 쉽게 말해져있다.
- 하지만 가축과 종들을 이끌고 하는 이주가 쉬울리가 없다. 거리와 날짜를 계산해보자.
- 직선거리로 650-700정도이며, 현재 알려진 경로로는 약 861km로 추정된다. 850-900사이로 보면 될 거같다.
- 가장 최적의 환경에서 도보로 갈 때 하루에 32km를 간다. 성경에서 하룻길이라고 표현된 거리는 일반적으로 32km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신약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런 표현은 쓰였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 아브람은 롯과 종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갔다. 일반적으로 숫자가 커지면 이동거리도 짧아진다.
- 그렇다면 아브람은 25-30일 정도를 이동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동안에 식량과 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식량은 준비한다 쳐도 가축까지 먹일 물은 분명 부족했고, 어떤 때는 사야 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 이것은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וַיַּעֲבֹ֤ר אַבְרָם֙ בָּאָ֔רֶץ1/4
עַ֚ד מְק֣וֹם שְׁכֶ֔ם1/8
עַ֖ד1/16
אֵל֣וֹן מוֹרֶ֑ה1/2
וְהַֽכְּנַעֲנִ֖י1/4
אָ֥ז בָּאָֽרֶץ׃1/2
( WTT)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났다(칼 바익톨)1/4
세겜 지역까지1/8
모레의 상수리나무 까지(1/16) 였다1/2
그리고 그때 그 가나안인이 그 땅에 (있었다)1/2
- 아브람의 여정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 세겜, 모레의 상수리나무까지라고 2번 나온 걸보면 먼거리인거같다.
- 그리고 가나안인이 벌써 살고 있었다.
- 즉, 아브람이 정착할 수 없는 곳이란 말이다.
- 25-30일간의 여정끝에 도착한 곳이 정착할 수 없는 곳이었다.
וַיֵּרָ֤א יְהוָה֙ אֶל־אַבְרָ֔ם1/4
וַיֹּ֕אמֶר1/8
לְזַ֙רְעֲךָ֔1/16
אֶתֵּ֖ן1/32
אֶת־הָאָ֣רֶץ הַזֹּ֑את1/2
וַיִּ֤בֶן שָׁם֙ מִזְבֵּ֔חַ1/4
לַיהוָ֖ה1/8
הַנִּרְאֶ֥ה אֵלָֽיו׃1/2
( WTT)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칼 바익톨)1/4
그리고 말씀하셨다(칼 바익톨)1/8
너의 자손에게1/16
내가 줄 것이다(칼 미완)1/32
이 땅을1/2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지었다(칼 바익톨)1/4
여호와께1/2
그를 향해 나타난(니팔 분사)1/2
- 약속의 땅에 도착했는데, 정작 아브람이 살 곳은 없었다.
-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이 땅을 자손들에게 줄 것이라고 말하신다.
- 아브람은 아무말 없이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이것은 그 약속을 믿는다는 의미다.
- 이 약속을 믿는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떠돌이 신세고, 가축과 사람들이 먹을 물과 땅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제단부터 지었다.
וַיַּעְתֵּ֙ק מִשָּׁ֜ם הָהָ֗רָה מִקֶּ֛דֶם לְבֵֽית־אֵ֖ל1/4
וַיֵּ֣ט אָהֳלֹ֑ה1/2
בֵּֽית־אֵ֤ל מִיָּם֙ וְהָעַ֣י מִקֶּ֔דֶם1/4
וַיִּֽבֶן־שָׁ֤ם מִזְבֵּ֙חַ֙ לַֽיהוָ֔ה1/8
וַיִּקְרָ֖א1/16
בְּשֵׁ֥ם יְהוָֽה׃1/2
( WTT)
그리고 거기서부터 벧엘 동편의 산악지대[고원지대, 산지]로 이동했다(히필 바익톨)1/4
그리고 텐트를 쳤다(칼 바익톨)1/2
서쪽에는 벧엘 그리고 동쪽에는 아이(가 있었다)1/4
그리고 거기에 여호와께 제단을 지었다(칼 바익톨)1/8
그리고 그는 불렀다(칼 바익톨)1/16
여호와의 이름을1/2
- 산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정착했다.
- 정착해서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했다.
- 아마 말씀따라왔으니 축복해달라는 예배였을까? 아니면 믿는다는 예배였을까? 제사장도 없이 그저 드리는 예배였다.
וַיִּסַּ֣ע אַבְרָ֔ם1/2
הָל֥וֹךְ וְנָס֖וֹעַ1/4
הַנֶּֽגְבָּה׃ פ1
( WTT)
그리고 아브람은 여정을 계속했다(칼 바익톨)1/2
서서히 갔다[가며 여정을 계속했다](칼 부정사)1/4
그 네게브를 향해1
- 그런데 정착한게 아니었다.
- 장막을 친 것은 정착한 거같은데 아니다.
- 다시 예배까지 했는데 아니다
- 살수 없어 네게브, 남쪽으로 갔다.
- 네게브는 사막이다.
- 2번이나 제단을 쌓았지만 아브람이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네게브 사막으로 가는 것이다.

설교

서론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두다 같습니다. 그 부르심은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알게 하고 십자가로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이중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는 부르심을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을 십자가로 초청하는 부르심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도입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의 삶을 사는 것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잃은 양을 찾는 것에 있습니다.
거기에 더한다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일하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들이나 선지자들같이 큰 사명을 감당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선교사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알맞게,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에 순종하고 따라간다면, 그 외 모든 것은 십자가의 부르심에 따르는 부가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르심의 삶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모두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아브람의 부르심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현실적인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주시는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세상속에서 부르심을 따라가야합니다. 오늘은 아브람의 부르심을 살펴보며, 우리가 이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반응했다면,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축복의 약속과 함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다른 말없이 바로 챙겨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출발합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모아서 출발합니다. 아마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5절후반절에 가나안에 마침내 갔다고 나오지만 이것은 이해를 돕기위한 의역입니다. 성경은 매우 심플하게 가나안을 향해 갔고, 가나안에 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왜냐면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로 720km, 고대의 길을 따라 갔다면 850-70km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850km를 간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재산이 있었으므로 걷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걸어야 했으므로, 실제 이동은 걸어서 하는 속도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 보통 하룻길이라고 표현되는 거리는 32km입니다. 이것은 최적의 조건에서 도보로 걷는 거리입니다. 하루에 32 km를 걸어간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죠. 이렇게 계산하면 아브람이 가나안에 가는데 걸린 시간은 22-25일정도라고 봐야 할것입니다. 왜냐면 혼자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재산을 다 가지고 자신의 하인들과 다같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느리니 약 한달정도 걸렸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한달동안 가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가축이 먹을 것도 챙겨야 합니다. 마실 물도 찾아봐야 합니다. 그 고생을 하고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마침내라고 표현할만 합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벌써 가나안인들이 다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살 곳이 없습니다. 살만한 땅은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세겜은 갈릴리호수와 사해 중간쯤 되는 곳입니다. 가나안의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간지점을 우리나라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냥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온게 아닙니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점점 살기 힘들어집니다. 왜냐면 남쪽에는 네게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앞에 제단을 쌓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약 30km정도 더 내려가 8절에 나오는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장막을 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마치 아브람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어디인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또 하나님께 제단을 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9절에 바로 이렇게 나옵니다.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남방은 네게브입니다. 네게브라는 단어자체가 남쪽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이스라엘 네게브라고 쳐보십쇼. 그러면 자동완성으로 하나가 뜹니다. 사막이죠.
네, 네게브는 유명한 사막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막지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는 뜻은 여기서 장막쳐서 안되서 다음날은 조금더 남쪽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그다음날은 다시 좀더 남쪽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뭄법상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처절한 상황을 잘 나타냅니다.
그래서 저가 앞서 7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한 것입니다. 아브람 입장에서는 더 내려가면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무엇을 하고 살것입니까.
처음부터 사막에서 살아본 유목민이라면 살수 있겠지만, 아브람은 하란에서 왔습니다.
당시 가장 발전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막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물론 사막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처음부터 나는 사막에 가서 살거야 하고 사막에서 생존법을 공부하고 갔을까요. 그건 아닐겁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어쩌면 8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브람의 절박함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 이 이상 내려가면 어떻게 삽니까. 이정도에 정착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점점 남방, 사막으로 옮겨갔더라라고 말합니다.
같이 따라온 사람들은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주인이라고 믿고 따라왔더니, 점점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아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의 삶은 정말 편하고 펼쳐진 길입니까. 아니면 좁고 험한 길, 한치앞도 알수 없는 길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람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내용에 바로 나오듯이 그땅에 극심한 가뭄이 듭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가뭄이 아브람이 이주한 그 해에 들었다고 합니다. 동의하는 학자도 있고 동의하지 않은 학자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주한지 얼마되지 않아 극심한 기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제쳐놓고, 여기가 정말로 사람이 살수 있는 땅은 맞는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속에서 아브람은 한번도 하나님께 원망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했을 뿐입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왜 아브람과 롯이 함께 갔을까요. 여기서 생각해 볼것은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롯이 실제적으로 자식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데라는 205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데라가 아브람을 낳았을 때의 나이가 70세입니다. 아브람이 75세에 출발했으니 그 때 데라는 145세로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이 롯은 자녀가 없는 아브람에게 키워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당시에 대가족으로 살았으니, 데라가 떠나는 아브람에게 권면하여 롯을 데리고 가도록 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데라는 아브람의 후계자로서 롯을 생각하고 보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2절에 나온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나로부터 큰 민족, 나라가 나올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자녀하나 없지만 나의 혈육으로 인해 땅의 모든 다른 혈육들이 복을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람은 끝가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환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지만, 그 부르심의 복에 걸맞는 환경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변 상황들은 가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아닌, 자손에게 준다는 말만 하십니다. 아들도 아니고 자손입니다. 어찌보면 아무 상관도 없을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부르심에 계속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곳이 점점 사막이 되어가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옵니까. 남방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점령하고 아이성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세겜으로 진격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바로 세겜근처에 있는 산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내려온 경로 그대로, 이스라엘백성이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평생 가나안의 변방, 네게브 근처에 살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나온 민족이란 단어 그대로, 이방민족들이 모두 아브람으로 인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의 삶은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부르심의 순종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아브람의 순종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처럼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현실의 부딛힘 속에서 승리하길 원합니다.
아브람의 발걸음을 그대로 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 하나를 헛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담대히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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