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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바라봄

신앙 기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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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 Transcripts

예배, 바라봄

예배. 바라봄 .
건강에 대한 여러 프로나 기사를 볼 때,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장수마을 같은 경우, 오래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이웃과의 유대감. 가족과의 친밀함. 또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삶의 기본적인 것이 잘 이루어지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기본적인 것.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이 잘 세워져있을 때 신앙도 건강하고 교회도 건강해진다.
기본적인 신앙의 습관 1. 예배
군인들이 군인으로서 제식 훈련을 받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차렷 자세이다.
우리가 학교에서나 차렷 자세를 아무렇게나 대충하지, 군대에서 차렷 자세는 기본자세임과 동시에 모든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왜? 차렷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자세들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군인의 가장 기본자세가 차렷 자세인 것처럼 성도에게 있어 가장 기본자세가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성도로서 모든 것이 흐트러지게 되는 성도의 기본자세. 바로 예배이다.
성도의 차렷 자세가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 예배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게 되면 신앙생활 전반이 흔들려 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예배태도와 그 사람의 현재 신앙상태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예배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상태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고전 14장 26절을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온다.
특별히 예배와 연관된 모습이 나오는데 본문 같이 한번 보자.
한 구절을 보면 초대교회 예배에 대한 힌트.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볼 수 있다.
1. 예배는 모임에서 시작된다. 홀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하려면 반드시 모여야 한다.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꾸준하게 보여주시고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집에서 인터넷 예배 이런 것은 예배가 아니다.
전부 자기 위안이고 자기만족이다. 예배는 모여서 함께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2. 예배에는 찬송시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예배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자꾸 오해를 해서 마치 음악회에서 공연 시작할 때 나오는 그런 소리처럼 찬양을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찬양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주간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활짝 열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하늘의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찬양이다.
3. 그리고 예배 가운데 말씀이 있었다.
여기서 말씀은 4가지 형태로 나온다.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
계시라는 것은 예언적 차원에서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고, 방언과 통역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 방언으로 말하고 그것을 통역함으로 말씀의 전달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 4가지 개념의 말씀이 각각 어떤 말씀인지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각 각의 개념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각 각의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점은 말씀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때로는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은밀한 것을 보이게도 하시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이 예배는 덕을 세우는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에게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예배.
그들의 성숙함에 도움이 되고, 은혜가 되는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예배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였고, 찬양했고 말씀을 들었고 그것이 모두에게 은혜가 되었던 예배의 현장을 경험했다. 그것이 처음 교회의 예배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예배 역시 모두에게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됨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에게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예배를 소망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대하는 것을 의미할까?
예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1. 자신의 인생에서 예배를 최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1순위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 듣고 은혜를 나누는 것은 성도의 최우선 순위여야 한다.
덕이 되고 은혜가 되는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좋은 찬양과 좋은 설교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삶이 내가 드리는 이 예배를 내 인생에 첫 자리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히11장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첫 출발을 아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4절 읽어보자.
아벨의 죽음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기에 그 분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 순교자 아벨은 예배 때문에 시기와 질투에 빠지게 되었고 그는 비참한 죽음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그 아벨의 주음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호소하는 것. 때로는 예배가 나의 죽음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예배가 우리 인생에 첫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가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싫을 수 있다. 예배가 기쁨이 되지 않고 자원함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가장 앞세우고 예배를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길게 소개한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은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로마서 12장인데 로마서 12장이 가장 먼저 무엇을 말하냐면 예배를 말한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영적 예배니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다.
성도의 삶은 예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배를 가장 앞세운 이후에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도 분별하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한 몸을 이루고 등 다양한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한다.
성도의 삶은 예배하는 삶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어떤 성화보다 가장 앞서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또 오해해서 성도의 삶은 예배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만 쓰고 안썼을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배 이후의 삶이 엄청나게 많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예배를 가장 우선시 하고 귀히 여기는 것은 성도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기초이고 가장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이고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억지로라도, 비자발성을 가지고서라도 우리 삶에서 지켜내야 한다.
예배가 항상 자원함 가운데 드려지고, 자발적으로 드려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의 죄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태도 중에 예배를 향한 억지의 요소, 비자발적 요소도 넣어 두신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을 읽다보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는 장면이 있다.
화목제사이다. 다른 제사는 온전히 다 태우는 것인데 화목제사는 극히 일부만 하나님께 태워드리고 남아있는 것들은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
그런데 나누어 먹는 것과 관련해서 의아한 표현. :15절.
제사를 드리고 나서 그 날 먹으라고 한다. 이틀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상은 남겨두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화목 제사를 드리고 남은 제물을 제사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다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제한 시간은 이틀이라는 것이다.
화목제는 보통 소를 잡는다. 소 한 마리를 잡아 화목제를 드리고 그것을 이틀동안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이 안올 것이다. 어제 고기 유통업을 하시는 사장님께 물어봤다. 소 한 마리를 몇 명이서 먹는지. 적어도 100명이라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한 가정에서, 한 식구만으로는 절대로 다 못먹는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화목 제사를 드리고 싶으면 내가 드려야 할 예배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다 불러야 한다. 왜? 제사 끝나고 고기 다 먹어야 하니까.
그 고기는 남겨서도 안되고 누구 싸줘서도 안된다. 불러서 같이 먹어야 한다.
한번 상상해봐라. 화목제사 드릴 때마다 최소한 100명 불러야 한다.
고기 안좋아한다고 말해도 초청해야 하고 바쁘다고 해도 초청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 안친한 사람. 때로는 싫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부를 수 밖에 없다. 마음에는 안들지만 이 제사를 오늘 빨리 마무리 해야 하니까 내 초청에 와서 먹어만 줘도 고마운 것이다.
나랑 안친한데, 그래도 내 화목제물 처리하는 것 도와주겠다고 와서 먹어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안좋은 감정이 있다가도 괜히 고마움이 들지 않겠나? 그러다보면 옆에서 말 한마디 더 하게 되고.
그것이 화목제의 특징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사람과의 화목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일부러 말도 안되는 제사법 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렇게 제사법을 지키면서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 억지로라도 초청해서 고기 먹이게 하고, 너도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초청했을 때 억지로라도 가서 먹어주고, 그렇게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너희끼리도 서로 화목하라고. 그것이 화목제사의 특징이다. 화목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에 안드는 사람도 억지로라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화목 제사라는 이 예배의 특성 속에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비자발적인 마음이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요소들을 넣어두신 것이다.
억지라는 표현 자체가 강요적이고 비자발적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해야 할 것이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중에 하나가 예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정리하면 로마서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예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자발성과 기쁨이 되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그것을 우리의 삶에 일 순위로 두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삶을 강조하시면서 그것을 제사로 비유하시고, 우리가 그 제물 되는 것이 예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 그런 맥락에서이다.
로마서 12장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 억지성을 포함하는 화목제사가 아니라 다른 제사를 말하는 것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25절. .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리고 요한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맥락에서 예수가 화목 제사의 제물 되셨던 것처럼 너희도 화목 제사의 제물 되라고 12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 되셨던 것을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십자가를 자원함으로 지셨나? 기쁨으로 지셨나?
성경은 양면을 동시에 이야기 한다. 자발성도 있지만 억지로도 있다.
도망치고 싶었고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 분에게 찾아가서 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면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이 그런 것이다. 백 프로 자원함과 기쁨으로 가셨나?
하나님은 자원하는 예배만 받으시나? 자원하는 것만 기뻐하시나? 아니다.
화목 제사의 특징이 바로 억지의 요소, 비자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높은 수준의 차원은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차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원함, 자발적이 아니면 안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뭘 모르는 것이다.
자원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수준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가운데 감동도 은혜도 없으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어쩌면 값진 사람일 수 있다. 힘들지만 억지로 와서 예배하는 사람.
예전에는 참 이해를 못했는데 어쩌면 그런 사람도 하나님이 참 귀하게 보시겠다는 생각을 이 말씀 준비하면서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전에 공부할 때 행복해서만 책상에 앉아있나?
아니다. 억지로라도 앉아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부모님이 보면서 어떻게 느끼시나? 안쓰러움과 함께 동시에 고마움과 행복함을 느끼신다. 억지로 공부하는 것 아는데도 그런 나를 보면서 행복해 하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높은 차원의 예배만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인간의 죄성이 그것을 깨뜨린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항상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예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사의 비유를 하시면서 부르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 예배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나와 예배하는 삶.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예배를 우리 삶에 가장 귀히 여기시기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예배를 우리 인생에 가장 귀한 것으로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예배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예배를 최우선되기를 원하시는가? 두 가지 살펴보자.
1-1.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임재 현장이기에 억지로라도 가서 머물러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기에 우리의 삶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신다.
내 이름으로 찬양하고 모여 있으면 내가 거기에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동시에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힘입어 하늘 성소에 들어간다고 한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주님이 찾아온다는 그림과, 또 예수를 힘입어 하늘에 있는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
그것이 예배이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임재하시는 것이 예배이고, 우리의 찬양과 기도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계시록은 성도의 기도를 천사들이 받아 보좌 앞으로 가져가 쏟아 붓는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예배는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임재를 향한 기대 가운데 나아가는 것이고 그 소망 가운데 드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속에 주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배를 실패한 사람이다.
왜? 예배의 핵심은 예배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주님을 만나는 자리기에.
그런데 오늘날은 예배 가운데 임재를 맛보지 못하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정상적으로 여긴다.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여긴다.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예배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을 받으신다. 여기에 계신데, 그의 임재를 맛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주님과 만남을 기대해야 한다.
찬양하면서 찬양의 주인공이신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찬양을, 기도를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지고 와 닿을 때까지 찬양하고 말씀 듣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배란 주님이 임재하시는 임재의 현장이기 때문에.
임재를 기대하고 임재를 소망한다는 것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무엇인 줄 아는가? 예배에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 이라는 헬라어가 ‘함께 중심으로 나아간다’ 는 의미이다.
내 마음의 중심으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예배 가운데 내 마음의 중심으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래서 예배의 중요한 열쇠는 집중이다.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임재 하시는지. 기도가운데 어떻게 일하시는지.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는데 가장 큰 적은 예배의 집중도를 깨뜨리는 것이다.
내 작은 소리 하나, 움직임, 음향,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집중도를 깨뜨리지 마라.
동시에 졸지 마라. 졸더라도 나오는 것이 감사하긴 한데 조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을 향한 집중하는 것 깨뜨리는 것이다. 자신의 예배를 예배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배가 왜 중요한가?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함께 나아가는 시간이기에.
그렇기에 그 임재에 대한 갈망과 소망으로 예배 가운데 나오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부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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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예배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예배를 가장 일 순위 삼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가?
1-2. 예배는 자기 자신의 변화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예배 가운데 임재를 경험할 때 그 사람에게 축복이 임하는데 그 축복의 결과가 무엇이냐면 바로 자기 변화이다.
예배의 가장 큰 축복은 자기 변화이다. 은혜 받았다는 핵심은 예배를 통해 내가 변화되어지는 것. 그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좋은 강연을 들었다. 감동을 받았다. 수준 높은 음악회를 참석해 감동받았다. 그것과 내가 예배를 통해 감동 받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 분명한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이 나를 변화 시킨다는 것이다.
:18절 보자.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는데 그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한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 변화 되어지는 것을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 당시의 거울은 청동 거울이었기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 수 없는 주의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때 그 영광이 우리를 바꾸어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한번 더 생각을 해보면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왜 우리의 변화를 가져오는가? 주의 영광을 보는 것과 우리의 변화가 무슨 연계성이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 속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다보면 부모님의 어떤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 나를 발견하지 않는가? 그런 원리인데,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를 발견하는 방법이 제한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처럼 어떤 단점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거울을 비유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영광의 거울로 나를 비춰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의 거울에 비친 내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말씀 속에서 내가 보이고,
기도 가운데 내가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겨를이 없다.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꾸 판단이 되어 지는데 스스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니까 그 분의 거룩함이, 그 분의 거울이 나를 비추시는데 그 거룩함 앞에서 내 더러움이 드러나고,
그 분의 거울 앞에서 보지 못했던 내 실상이 드러나면서 내 자신의 실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 빛 안에서, 그 거울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 때에 자기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깨져버린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속이 문드러져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니까 그제서야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내가 보이는 것이다.
예배하러 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그저 저 사람 때문에 나만 억울하고 나만 고통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예배하다보니 하나님의 빛 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니까 그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나의 실체가 드러나고 보여지기 시작하면서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러 제물을 드릴 때에 다른 사람과 싸운 것이 생각이 나거든 해결하라는 것이다.
예배하러 왔는데 그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내가 저 사람과 싸웠었지. 깜박했네.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와야겠다. 그거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 가운데 내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저 사람 때문에 나만 억울하고 나만 고통 받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 때문에 저 사람도 고통 받고 있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면서 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고 그 순간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음에 똑같은 짓 또 하면 그게 더 상처이다. 다른 사람과 싸운 것 해결하고 오는 것은 그 한 순간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수양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만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울 앞에서 나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 사단은 나를 정죄한다.
너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이라고 정죄한다.
하나님이 그 거울로 우리를 비춰주시는 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러하기에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뀌고 싶지 않고 변화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절망하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 앞에서 엎드리며 나아갈 때 주의 은혜가 나를 찾아와 나를 만져주시고 나를 바꾸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 축복은 자기 변화이며, 화목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나는 계속해서 예배의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예배 가운데 만난 주의 임재는 반드시 나를 바꾸어 가신다.
그것이 눈에 띄게 더디더라도 반드시 나를 바꾸어 가신다.
내가 목록 만들고 노력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임재 앞에 머물기 시작할 때 어느 날부터 서서히 내 모습이 달라지고,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기 시작한다.
내가 스스로 달라져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을 누군가 알아채고 그것이 파문이 되어 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예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배가 성도의 삶에 시작인 것이고 출발인 것이다.
모든 것이 살아있어도 예배를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배를 최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한다.
임재의 현장. 변화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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