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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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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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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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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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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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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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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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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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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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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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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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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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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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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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특징과 목적
그런 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행적에 관해서 네 방면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을 향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록한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한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이다라는 것을 증언하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마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으로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로마 사람들은 군대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로마 사람들은 군대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기관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냐면 원로관이라는 정치기관 아래 두 호민관이 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의 상원의원 하원의원식으로 로마에는 호민관이 두개로 나뉘어져 군사 호민관과 민정호민관이 있는데 민정 호민관은 백성들을 위한 기관이었고 군사호민관은 군사들을 위한기관이었다.
그런데 로마 원로원이 되려면 아무나 되지 못하였고 로마군에서 복무 경험이 필수로 꼭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복무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이론보다도 행동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마가 복음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행적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그 복음사역을 위해서 어떻게 이땅에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종인 완전한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누가복음에서는 누가는 안디옥 수리아 출신이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복음서의 시작에 데오빌로 각하에게라고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그리스의 헬라어의 이름을 가진 로마의 관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그리스의 헬라어의 이름을 가진 로마의 관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누가복음은 이방인인 누가가 이방인인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사람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인 헬라인이었다.
그런 헬라의 문화와 사고 방식으로 누가는 이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누가가 이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사람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요한복음에서는 처음 시작을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우주의 기원으로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태초에라고 시작합니다.
그런 빛에 대하여 세례요한은 증거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태초에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성경에서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성경은 신약과 구약에서 딱 두번 나옵니다.
창세기1: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절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태초에라고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이 태초라는 단어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의 태초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만물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라는 말은 만물의 시작이 출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작점보다 더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요한이 이 태초를 선포하면서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원어는 로고스라고 되어 있다.
그 로고스라는 단어의 뜻은 헬라 사상에서 우주의 기원 혹은 원리를 말하는데
그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의 원어는 뭐라고 되어 있냐면 로고스라고 되어 있다.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것이다.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고대근동이나 소아시아에서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익숙한 단어를 유대인인 사도요한이 사용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와 함께 어두움속에서 빛으로 만물이 시작이 되어졌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어느 특정인들만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것 입니다.
자기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입으시고 자기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되신 예수님을 세상이 알지 못했다라는 것이죠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원어로 보면 뭐라고 되어있냐면 로고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로 칭하게 되는 것이다.그런 로고스는 헬라철학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원리와 생각과 혹은 이성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의 근거이자 시작을 말한다.
그런 빛에 대해서 세례요한도 일찍이 증거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이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입으셔서 오셨는데 그 빛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속에 오셨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다라는 것이죠
그런 요한복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은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를 말하는데 그런 로고스는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것이다.
그 로고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고대근동이나 소아시아에서 익숙한 단어였습니다.
그런 익숙한 단어를 유대인인 사도요한이 사용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입으셔서 오셨는데 그 빛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속에 오셨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다라는 것이죠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로고스인 하나님으로 지으심을 받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 세상속에서 유대인은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것인데 그런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셨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빛에 대해서 세례요한도 증거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땅에 왔을때 오늘 성경의 11절에 뭐라고 말하냐면
그래서 성경에 11절에 뭐라고 말을 합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유대인들이 빛되신 예수를 거부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참 빛되신 예수께서 세상에 왔지만 그의 지으심을 받은 백성이 그분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그런 빛에 대해서 세례요한도 일찍이 증거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고 거부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거부한 것은 세상 전체가 예수를 거부한 것을 뜻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뜻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세상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을 뜻한다.
그런 세상이 로고스로 인해 지음받았으므로 그의 것이라 할 수 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 더더욱 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세상 전체가 예수를 거부한 것을 뜻하게 되어지는 것이빈다.
세상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에 11절에 뭐라고 말을 합니까?
그런데 11절에 뭐라고 말을 합니까?
그런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유대인들이 빛되신 예수를 거부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참 빛되신 예수께서 세상에 왔지만 그의 지으심을 받은 백성이 그분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그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세례요한은 그분에 대해 증언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못하고 11절에 뭐라고 말하냐면 끝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것이죠 그런 참 빛되신 예수께서 세상에 왔지만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의 지으심을 받은 백성이 그분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그런 빛에 대해서 세례요한도 일찍이 증거하였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고 거부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곧바로 12절에 뭐라고 말하냐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곧바로 12절에 뭐라고 말하냐면 이렇게 말한다.
그런 11절에서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이라고 말을 한다.
그 이유는 11-12절은 다른 뜻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른 그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에서 갑자기 이방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들주에서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중에서 믿는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믿는 자들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두부류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두부류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세상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을 뜻한다.
세상이 로고스로 인해 지음받았으므로 그의 것이라 할 수 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 더더욱 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세상의 대표가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세상 전체가 예수를 거부한 것을 뜻하게 되어지는 것이빈다.
왜 유대인들이 영접하지 않았나?
어쩌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 예수님이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라서 초라해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은 율법교사나 서기관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품위도 없고 품격도 없어 화려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가 그 앞에만 서면 허물이 드러나고 약점들이 보였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밀어내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 세상 전체가 예수를 거부하였지만 그러나 성경속에 12절에 이렇게 말한다.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말한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똑같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곳에 살길이 있다 생각해 주님을 영접한 자를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왜그렇습니까?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앞에 서면 그 허물이 보이기 때문인 것 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를 믿으면 살길이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한 자들인 것이다.
그 들을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도움을 입은 자들이 성경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앞에 서면 그 허물이 보이기 때문에 그곳에 살길이 있다 생각해서 주님을 영접한 자들을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그런 도움을 입은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그앞에만 서면 허물이 드러나고 약점들이 보였다.할말들이 없었다.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 앞에만 서면 허물이 드러나고 약점들이 보였다.할말들이 없었다.
요한복음 1:12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그런 영접하는 자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할말들이 없었다.
요한복음 1:12
그러나 그 들중에서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그런 영접하는 자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결국엔 두부류로 나뉘어진다.
빛이 있고 어두움이 있듯이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결국엔 두부류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다.
유대인의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똑같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곳에 살길이 있다 생각해 주님을 영접한 자를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마찬가지입니다.
두부류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어진다.
유대인의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부류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됨 다수가 아니라 소수이다.
하나님의 자녀됨 다수가 아니라 소수이다.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부류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어진다.
그런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말한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똑같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곳에 살길이 있다 생각해 주님을 영접한 자를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며 영접한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믿는 이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믿었다고 말하지만 온전한 믿음없이 점점 더 믿음에서 떠나간다.
돌아보면 그런 소수의 사람들만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영접하며 살아가게 되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며 영접한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믿는 이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믿었다고 말하지만 온전한 믿음없이 점점 더 믿음에서 떠나간다.
그런 이시간 저와 여러분이 전자가 아닌 후자의 사람인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 영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된자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부활절을 지나면서 우리의 다짐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직접 오셔 그 말씀을 선포한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 착해서 인가? 가난해서인가?
아니다.
똑같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곳에 살길이 있다 생각해 주님을 영접한 자를 하나님이 도왔다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여러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여러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어떤분들은 모태신앙으로 어떤이들은 미국에 와서 어떤 분들은 고난과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문때문이 아니다.
불쑥뛰어나와 믿는 것 아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태신앙
모태신앙
가문때문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고난과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미국에 와서 
고난과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문때문이 아니다.
불쑥뛰어나와 믿는 것 아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이다.
그런 소수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그런 소수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할때가 많다.
하나님의 자녀됨 우리는 머리로 압니다.
지식으로는 많이 압니다.
기도할때도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기도도 많이 합니다.
입으로도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내가 서있는 삶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사실을 잊어버릴때가 참많습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지식으로 끝날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 삶으로 돌아오면 아무런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머리로 지식으로는 알지만 막상 자신의 삶으로 나와오면 막상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머리로 지식으로는 알지만 막상 자신의 삶으로 나와오면 막상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생각과 습관과 마음이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음이 강퍅해 질 수 있습니까?
그분을 좀 더 닮고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행동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기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많이 느낄 때가 참많습니다.
왜그래요?
아버지를 인식하기 떄문인거예요.
그런 부활절을 지나면서 우리의 다짐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인식을 하며 살아가자 내가 서있는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오늘 하루 삶에서 승리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보아도 마음이 굳어져 있어 그 말씀을 계속 밀어내기 떄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시간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지 않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곡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진리로 충만할 수 있도록 기도 합니다.
그런 부활절을 지나면서 우리의 다짐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이땅위에 우리를 위해 내려오신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됨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인식을 하며 살아가자 내가 서있는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오늘 하루 삶에서 승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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