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사사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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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유다의 행동
()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왜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와 상관없이 해묵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받아들일까요? 이러한 의문은 설교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 우리와의 상관성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한 데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사사기의 이야기는 주로 신약의 본문을 설교하다가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교훈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화’로 등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예가 삼손(이방 여인과 결혼 문제를 언급), 입다(잘못된 서원의 문제), 기드온의 양털뭉치(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특정한 교훈을 드러내기 위한 도덕적인 예화로 주로 등장하다 보니, 사사기의 전체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남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사사기는 언뜻 보는 남의 역사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사기는 3000년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남의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에 쓰일 때부터 그 당시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로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인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사사기의 말씀은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사사기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사사기를 보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시고 싶어 하실까요? 역사 이야기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기억상실증 환자는 의식이나 지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상실하는 병입니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의 정체성은 상실됩니다. 우리가 듣게 되는 한 사람이나 민족의 과거의 이야기는 그 사람과 그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우리만의 독특한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독특한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각 민족은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며, 이야기들을 통해 각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이야기들을 후손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스스로 찾게 됩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나 민족의 정체성을 역사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믿는 신자인 우리는 그것의 정체성을 성경에서 근거하며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자아를 형성해갑니다. 그 정체성은 우리가 보아서 믿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주권적인 선택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필수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의 형성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삶의 실재적인 실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는 사사기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맨 땅으로 건너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분배해줬으며, 하나님을 따르도록 마지막까지 지도했던 탁월한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곁을 떠났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사사기의 앞인 여호수아 24장 29-30절을 보면,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을 청종하길 권면하고,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나이는 백십세였습니다. 여호수아를 장사하기 위해서, 그가 받았던 영토인 딤낫 세라에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사기 1장 1절에서 나타난 여호수아의 죽음은 사사기 내에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마냥 슬퍼하며, 애곡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새로운 시대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사사기의 서론인 1:1-2:5은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여호수아 12장의 정복과는 다르게 정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안식의 땅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해방시킨 데는 분명한 목적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질문했습니다. :1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한 이유는 목적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은 듣고 싶어서 여호와께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모세는 여호와를 대면하여서 이야기했으나, 모세 이후, 여호수아 때부터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확인함으로서 움직였습니다. -30과 -21이 그 예입니다.먼저 -30을 살펴보면,29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 때 대충입고 갔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나 직장이나 또는 예식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적절한 상황에 맞추어 옷을 입지 않습니까? 우리가 적절한 때에 절절한 방법에 맞는 옷을 입듯이 제사장 또한 하나님을 만날 때에 또한 적절한 옷을 입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이 옷을 입는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에 넣어라는 30절의 단어입니다. 여기 출애굽기에서만 본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에 맞춰 입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후에 나오는 -21을 보면, 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9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우림과 둠밈을 21절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요? 바로 우림의 판결로 하나님 앞에서 질문한다고 하지 않는가요? 우림과 둠밈은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 규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사를 묻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옛날처럼, 땅을 정복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정복해야 하는 사명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사명입니다. 전투하는 교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닌가요? 오늘의 교회는 이미 모든 전투에서 이기고, 승리를 얻는 교회가 아니라 아직도 악과 사탄과 영적 세력과 전투를 해야 하는 교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도로서 악과 사탄과 영적 세력과 전투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여호와께 물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을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올라갈 것이다’라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는 가나안 땅 정복을 하기 위해 떠나는 원정대의 행렬 중에 선봉 지파였습니다. :14이 그 예입니다. :14을 보면,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 로 행진하였으니 유다 군대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이끌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우림과 둠밈의 판결을 하는 제사장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가라’라고 명령을 단순하게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이에 유다 지파는 자기 근처에 땅을 분배받은 시므온 지파에게 함께 싸우자고 제안했습니다. 왜 유다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싸우자고 했을까요? :23을 보면,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3에서 유다와 시므온의 관계가 뭐라고 나옵니까? 같은 어머니 밑에서 난 친형제라고 나옵니다. 이를 통해서 유다와 시므온은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친형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인지 분배에서 제외당합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분깃을 나누어 받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형제 지파라지만 왜 유다가 시므온 지파에게 자신들의 분깃을 나누어 주었을까요? :9이 그 예입니다. 19:9을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 유다 지파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웁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인해서 땅을 분배받을 때, 자기들에게 받은 땅이 너무 많아서 자신들의 형제지파인 시므온 지파에게 자신의 분깃들을 나누어 줍니다. 오늘 보는 3절에서 보인 유다의 행동은 형제에게 의지하는 유다와 시므온의 형제동맹은 인간 편에서 매우 적절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유다 지파는 부분적으로만 여호와의 명령을 들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시므온’이 올라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단순하게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다는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자기중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혼자 가는 것보다 형제와 동맹하여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만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물론 유다의 이 같은 자기 결정의 자유는 비록 여호와의 뜻에 합하지는 않았지만 처벌되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기 결정을 용납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같은 유다의 자기 결정 태도는 처음에는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주장의 경향은 사사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강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6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17:6을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유다의 행동은 이스라엘인들이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며’ 사사시대를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로 만들어 가는 첫 단추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지 결정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결코 바꿀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유다의 손에 붙였노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두 번이나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올라가서 싸웠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땅을 소유하게 되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유다 혼자 땅을 차지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1:4 유다가 올라가매1: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1: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1:10 유다가 또 가서1:18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를 취하였고.....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 내었으나 이 유다의 자기 중심적인 표현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욤? 언뜻보면, 땅이 유다에게 돌아갔으며 시므온에게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자기 결정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취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2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는 분명히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만의 영광만 취하려고 하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뜻을 아시면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센스 있게 행동하라고 요구합니다.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알아서, 잘해야지.” 그래서 종종 우직하게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을 센스가 없다고 욕합니다. 우직하게 일을 했다고 해서 욕을 먹거나 뒷말을 듣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센스 있게 행동해도 욕을 먹거나 뒷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성경에서는 센스 있게 행동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센스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 예가 바로 사무엘상 15장에서 자신의 딴에는 센스 있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사울왕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올 때, 길을 막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아말렉을 멸하기로 작정하십니다. 15:3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15장 7-9절을 보면,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과 백성은 아각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아각을 모욕을 주는 용도로 이용합니다.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없애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가치가 없고 하찮은 것만 남깁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각 왕과 양과 소와 소유물 모두를 죽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 딴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서 움직인 것입니다. 사울의 나름 센스 있는 행동에 대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을 통해서 사울 왕을 향한 책망과 후회를 듣게 됩니다. 화가 난 사무엘은 사울 왕을 찾아고 사울 왕을 향한 사무엘의 책망이 쏟아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성경 말씀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종종 격언이나 인생의 표어로 남기도 합니다. :22을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보다도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유다가 땅을 취할 때, 나름의 센스 있는 행동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센스가 아닙니다. 곰과 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행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송구영신 예배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던 학생인데, 이 아이를 엄마가 누나와 동생을 함께 데리고 왔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지간히도 장난꾸러기인 녀석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담임목사님의 축복기도 후에, 말씀카드를 뽑는데, 이 아이가 뽑는 주제가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이었는데, 자기는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카드를 뽑았더니 또 순종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순종의 주제의 카드가 나오자, 이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왜 또 순종이 나온거야?”하면서 다른 주제의 카드를 뽑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순종을 안하는 것을 자기 자신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은 자라가는 중이지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의 이야기로만 들었지, 사실 말씀카드를 뽑을 때, 자신이 뽑기 버거운 주제는 피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들은 송구영신을 보내며, 말씀카드를 뽑았습니다. 그 말씀카드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주거나 하는 삶의 지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성경에 나온 말씀 하나 하나를 온전히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됐던 신앙의 실패를 거울로 삼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말씀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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