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12 갈5:16~26

바울서신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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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욕구가 아닌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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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욕구가 아닌, 성령을 따라 살아라! (~26)
서 론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욕구는 쉬운 말로 하면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고, 이런 것들을 가리켜 욕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욕구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배가 고픈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래서 음식 섭취를 향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몸은 적절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해 건강에 이상이 오고, 심한 경우 목숨을 잃게 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욕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본 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욕구는 통제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할 만큼 적당한 양의 음식을 섭취하고 나면 멈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욕구는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우리를 통제하고 조종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구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멈춰야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는 욕구라는 녀석에게 굴복하여 ’그래 가는거야!, 그래 계속하는거야!‘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욕구에게 무릎 꿇고, 욕구에게 자신을 내어준 삶의 비참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21절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무려 15가지 이상의 파괴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이런 끔찍한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대상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이처럼 악한 죄악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문젯거리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방금 읽은 리스트들을 조금 더 쉽게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적 부도덕, 2 정결치 못함, 3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탐닉함, 4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 5 주술적인 행위에 매료되는 것, 6 미움, 7 다툼, 8 질투, 9 화내기, 10 이기심, 11 편 가르기, 12 분열, 13 시기, 14 술 취함, 15 방탕하여 흥청망청 살아가는 것 등 리스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마지막에 내용 하나를 더 덧붙입니다.
(/현대어성경)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과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했지만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생활을 일삼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대표선수 선발전에 15개만 뽑힌 겁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공동체 안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도 이와 같은 문제, 즉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육체의 소욕‘(17절)을 따라 행한 ’육체의 일‘(19절)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육체의 일을 그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욕구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꾸준히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달음질을 멈추면, 대적하는 싸움을 멈추면! 금방 육체의 욕구가 우리를 잡아먹고 우리를 종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을 거야!“한다고 이길 수 있나요? 여러분들 육체의 욕구를 다들 경험이 하셨잖아요. 다들 해봐서 잘 알고 있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해답을 16절에 내놓고 있습니다.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싸움을 하는데 ’하지 않는‘ 싸움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령을 따라 싸움을 ’할‘ 때! 육체의 욕심을 무시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본문 22절과 23절에 소개되고 있는 각종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을 수가 있는 겁니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실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점점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되며,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아홉 가지 열매라고 말씀을 드렸죠. 여기서 ”열매“(καρπὸς)는 단수입니다. 열매가 각각 독자적으로 아홉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인데 ’아홉 가지 맛이 나는 하나의 열매”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할까요? 타락한 인간의 욕망, 즉 육체의 소욕에 휘둘리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분이 실제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3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알라”입니다. 행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옳은지, 다른지, 틀린지 알아야합니다. 육체의 욕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더 이상은 육체의 욕심에 질 수밖에 없다고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거든요. “육체의 욕심에 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육체의 욕심에 질 수 없습니다.”
둘째, “여겨라”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해방을 실제로 우리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야 합니다.
셋째, “행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우리 행동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인으로 죄를 대항하고 성령의 열매를 찾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을 때, 모든 흑인 노예들에게 법적으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흑인은 자유인이다.” 땅!땅!땅!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거나’ ‘그렇게 여기지 않는’ 노예들은 여전히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노예들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해방의 사실을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서’ 실제로 그렇게 ‘행해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선언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에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서” 실제 의인으로 “행해야”합니다. 육체의 욕심이 여전히 주인노릇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대적하고 싸워야 합니다.
결 론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따끔한 책망과 권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야함을 배웠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살기 위해 첫째, 하나님이 이루신 자유를 ‘알고’ 둘째, 우리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여기고’ 셋째, 실제로 육체의 욕심을 대적하고 성령을 따르며 ‘행해야’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삶을 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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