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복음이란(4) : 신앙의 오류

로마서강해(2024)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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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3) : 신앙의 오류 (롬 1:26-2:11)
개요 : 참 신앙을 가로막는 오류, “비판하는 것”
사람은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판한다. 왜 그러한가?
1) 비교적인 개념에서 판단하여 쉽게 우월감을 가지기 때문에 쉽게 판단한다.
2)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역시나 죄의 본질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비교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3) 더 나아가 자아에 도취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깊은 방종에 빠지게 된다.
2) 해결책 : 1) 하나님을 묵상(1:28), 2) 참고 선을 행하는 훈련이 요구됨.
지난 주 말씀을 전하고 나서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성을 폭로하는 말씀이 과연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바, 이 세상에 의인이 단 한사람도 없다, 또 모든 사람의 계획이 항상 어렸을 적부터 악하다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여러분은 그렇게 자신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실 수 있었는지요?
말씀을 전하는 저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 이 설교자의 본분이기 때문에, 서로 부담스러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차..’하는 마음에 시급하게 보충해서 강론해야 겠다는 이슈가 한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메시지 가운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보라'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조금은 보충적으로 전할 시급한 메시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관점, 신앙적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이 마치 나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잣대를 쥐고 이 세상을 판단하는 것으로 생각될 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망상적인 오류에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에 섬칫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판단, 비판에 관한 메세지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먼저, 우리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보면 판단과 비판이 사실 너무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이 부정적인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판단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인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보고, 그것에 대해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견해를 내리고 비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마음먹음이든 간에 우리는 어떠한 ‘결정’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순 없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판단이 없으면 우리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들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우리는 스스로 잘 판단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선택과 결정들의 수 많은 실패와 오류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 잠깐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한 주 살아오면서 먼저 ‘자신’에 대해서 판단해 봅시다. 혹시 꽤 괜찮게 한 주를 살아온 것 같습니까? 한 주 동안 좋은 선택과 결정들을 하시고 살았던 것 같습니까?
우리는 쉽게 ‘판단을 하곤합니다.’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세상이 이래야지..책 한권읽으면, 그 분야의 모든 것을 아는 것 마냥 떠들고 싶은게 (우리..아니 저입니다..하..)
특히나 우리 내면의 생각과 감정 마음을 어느 한 편에 두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하고’ 또 타인에 대한 것도 쉽게 퍽 그럴 듯 하게 판단하고 비평합니다.
오늘 본문 2장 1절 하반부를 보니까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말씀의 진단입니다. ‘도찐개찐’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본래 이 말은 “도긴개긴”이라는 말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를 좀 비속어처럼 꼬아놓은 단어입니다.
'도긴개긴'(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해 견줘 볼 필요 없음) '도토리 키 재기', '그 나물에 그 밥', '오십보백보', '거기서 거기', '피차일반'이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 기도 별로 안하네..?’, ‘아 나는 감사하다. 왜 저 사람은 감사하지 못할까..?’ 등의 식으로 말입니다. (특히 목사나 교역자들이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하는데..)
왜 이러는 것일까 생각해보니까, 솔직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특별히 어떤 큰 죄를 짓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아서입니다. (여기 중에 혹시 도둑질을 하다 오신 분이 있으십니까?, 간음하다 오신분,,? 사람 때리고 오신분..?)
우리도 모르게 쉽게 빠져드는 신앙적 오류는 바로 1) 죄에 대해서 “비교적이란 개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비교적 빠져드는 오류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교적 나는..”이라는 중얼거림으로 말입니다. 내가 누구는 좀 미워했어도, 금방 회개했고..나는 그래도 저정도는 아니다..진짜..“바로 이런 착각..과 오류..”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특별히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려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죄에서 멀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장 26절부터 마지막까지 나열된 그 추악한 죄악들을 적어도 나는 몇 가지는 잘 피했다고 말합니다. 이해가 쉽게 특별히 26,27절에 '동성애'에 관한 부분을 말씀하시는데, 쉽게 말해서 "그래 적어도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다."
저정도의 죄는 짓지 않았다고 스스로 자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특별한 죄의 목록에는 나는 관여한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란 느낌이, 하나님 앞에 애통한 느낌이 잘 생기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케 됩니다.
여러분,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적 삶을 위해 분투하는 우리에게 있이서..죄란 무엇일까요? 정말 ‘죄..’란 무엇일까요? (아, 오늘은 운전하면서 분노를 표출했네, 죄지었네 회개해야겠네.., 아 오늘은 괜찮았네..) 과연 이러한 사이클에 속한 것이 죄..일까요?
우리가 이 “비교적이란 오류..”에 흔히 빠지는 이유는 아직도 이 죄의 본질에 대해 잘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끊임없이 ‘죄의 본질’, 우리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부지런히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실상이 도찐개찐이라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심정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달 설교가 “죄의 근원과 본질에 관한 원리”에 관한 말씀이라면 이번 설교는 그 죄의 본질이 실제로 열매로 나타나는 모습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26절에 그 열매가 어떻게 까지 더럽게 나타날 수 이는지 말씀하십니다.
순리를 바꾸어 역리고 쓴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본연의 모습, 쉽게 말해 남자와 여자와 같은 성별 까지도 바꾸어서, 그 욕망에 따라 남자와 남자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음욕이 일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한다 합니다. 그 뿐 입니까? 너무 많아서 주의가 흐트러질 것 같으니 우리 함께 29절부터 32절까지 다시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 숱한 죄들의 리스트를 쭉 나열 하신뒤 마치 우리가 느끼기에 반전과도 같이 하나님께 쐐기를 박으시는 듯한 말씀을 2장 1절에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그러한 것들을 판단하는 니가 똑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은근히..아주 은연히..이러한 ‘비교적인 우월감’ 속에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참 모습에 대해 여전히 무.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적 치명적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1) 먼저 죄의 본질에 대한 무지인 것이고 동시에 이것은 자신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잘못된 판단을 하곤 합니다. ‘무지’잘 모른다.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알지 못함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먼저 오늘 본문을 통해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21절 2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세때부터 고질적인 인간의 문제가 22절에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곧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입니다. 거꾸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앞절 21절에,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라고 합니다’ 그 미련한 마음이 어두움에 빠진 이유가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아무 쓸데없이 허망해졌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죄를 파생시킵니다.
{ 제가 과거 몇몇 알코올 중독자들과 교제했던 적이 있습니다. ‘같이 술을 먹는다고..’ 그게 아니고, 대화하고 그들의 회복모임에 참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전도사가..그들과 회복모임을..? 너무 상상하지 마시고..어쨌든..
알코올이든 마약인든, 도박이든, 성중독이든, 모든 중독자들이 하는 회복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의 매일 같이 해나가는 행동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일기쓰기’라는 것입니다. 아주 숙제처럼, 그것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회복이 깊어진 사람일수록 이 감사하는 습관과 생각이 우리 말로 너무 은혜스럽다 이겁니다..솔직히 말해서 예수님믿는 우리보다도, 더 은혜스럽다 이겁니다. 그렇게 겸손할 수 없습니다. }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주 살아가시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로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정말 우리 몸 밖이든, 우리 내적인 것이든 한주를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갈구하며 더듬어 찾고 있는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묵상하고 그분을 영화롭게하는, 즉 그분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여러분과 제가 만약 하루, 아니 순간을 살며 그 모든 것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처럼 생각하였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 감사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며, 변덕스럽고 실증을 느끼는, 표현이 좀 거칠어서 죄송합니다만..마치 동성애를 범하며 살아가는 자들과 다를바가 없는 자들이라 선언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교만한 존재들, 즉 스스로를 지혜롭게 생각하는 교만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감사하지 못하는 이러한 교만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신자임에도 늘 그 죄 가운데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 모든 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교만이 가지고 있는 핵심속성, 그것이 바로 “감사하지 않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 다시 강조합니다. ‘감사..없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나 스스로 판단하며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감추며, 스스로 착각속에 자기 만족 유희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호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나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아멘이 되십니까.? 우리가 예배 시작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동일선상, 도찐개찐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매일 그분의 자비하심을 구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처지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신자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리가 쉽게 비판으로 빠지는 오류 속에 있는 것은, 죄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게을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우리 자신과 도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우리 속에 나타나는 죄의 뿌리는 곧, ‘감사없음..’, 교만과 비교적 우월감 속에 나타나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러한 절망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인지 그 해결책에 대해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2장 1절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사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을 함께 보면서 이 말씀의 의미가 풀어지는 듯 했습니다. 우리 함께 새번역, 공동번역이라는 번역으로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가장 평이한 번역인 공동번역이 참 와닿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참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탁월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을 하셔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잠언 27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찾아서 읽겠습니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에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똑같이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그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큰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그 말은 즉 너는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마치 돋보기로 보듯이, 집요하게 들춰보느냐..입니다.
{ 제가 현재 다니는 회사에 저희팀에 아주 큰 큰형님이 계십니다. 연세가 51년생이신까..저희 아버지보다도 많은신데, 팀에서 함께 일하다보니..형님..형님 합니다. 그런데 저희 팀에 저보다 10년쯤 요한목사님 쯤 되시는 분들중에 그 큰형님을 은근히 싫어합니다. 왜 일까요..? 나이가 있으시다보니, 아무래도 좀 느립니다. 젊은 사람들보다..팀에 방해가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저도 좀 처음에 불편하긴 하더랍니다. 그 큰 형님이 좀 라떼 라떼 하시는 분이라서..좀..그 꼰 머시기 기질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닳았던 것이 있습니다. “아..나도 언젠가 저 나이에 이를텐데..은근히 나도 저럴 것 같은데..” “원래 저 나이의 사람은 안바뀐다 하던데..달리는 차의 타이어를 바꾸는 것보다 더 힘든..”
아 그러면서 그 큰형님이 이해가 되고, 더 잘해드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여전히 그 큰형님을 싫어하시는 몇몇분들이 계십니다. 뒷담화가 아주..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선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부패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 부패는, 단순히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연약함을 마치 자신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볼 수 있는 사람, 그자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입니다. 그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 제가 전의 교회 부교역자로 있을 때, 큰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담임 목사님께서 외부 사역을 다녀오시느라 제게 1부 대예배 설교를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전날에 늦게까지 설교준비를 했는지 뭘했는지..아무튼 아침 알람을 못듣고 자버린 것입니다. 소위말해 ‘대형사고..’를 친것입니다. 부교역자가 저밖에 없으니 급하게 땜빵할 목사님도 없어서..아무튼. 성도가 대략 한 그래도 100명쯤은 되는 교회였는데..아무튼 부리나케 씻지도 못하고, 공개 사과를 드린 후에 한 20분쯤 늦게야 설교를 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습니다..그 때 그 담임목사님과 그 성도님들께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는 부교역자때 더 큰 사고 많이 쳤다면서 우리 승목 전도사님 연약함돠도 과정이니..이쁘게 봐달라고 공개적으로 목사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데..’ 얼마나 감사하던지..}
사실 저란 사람은 이미 참 많은 은혜를 입었으며, 지금도 입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교만하여, 감사하지 못하며, 그래서 나도 남도 상처를 입히며 하나님께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장 4절을 보면서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비판하는 너여, 네가 과연 너를 향한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참으로 멸시하는구나..!
우리는 먼저 우리 눈에 들보를 빼어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군가의 연약함을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의식하고 있다면, 적어도 의기양양하게 남을 판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저 그 연약한 이웃을 묵상하며, 눈에 뭔가가 맺힐 것입니다. 눈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은혜받은 자..’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에는 그렇게 열심과 분노로 가득 차 내까립니다. 그에 비해 자신 속에 있는 오류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열렬한 반감을 가지지 못하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이러한 치명적 착각이 무엇입니까? ‘판단하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자신이 판단하는 그들보다 자신을 높이 두는 것, 우월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두는 것, 하나님 앞에서 어처구니 없는 교만을 부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제가 2층에서 설교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그럽니다. “오빠, 나 물 끓이는 중에, 잠깐만 푸바오 볼게~~, 판단하지마~~”라는 것입니다. 예, 하도 나한테 정죄를 당해 아내가 제 눈치를 보더랍니다..참..
어쩌면 제가 그렇게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늘 누군가에 대한 공감과 사랑이 결여된채, 판단하며 정죄하며 분노에 찬 지옥같은 삶을 살았던 건 아닌지..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닳았습니다. “아 이 세상에서..적어도 선하고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난 보지 못했으며..찬양하지 않았으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상숭배자의 삶을 살았음을 깨닳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교만의 죄에 허우적대며 살고 있었음을 깨닳았습니다.
끊임없이 나와 세상 그리고 그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분노에 찬..여러분 그것이 지옥같은 삶입니다. 굳이 죽어서 안가봐도 되는 지옥..현재 지금 그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다른 것에 눈과 귀를 닫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제발 네 모습을 똑똑히 보아라..그리고 나를 더 알아가야 한단다..
이 특별한 계시와(성경),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계시들을 통해서 오직 한가지만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루 중 말씀을 보며, 아니면 바쁜 삶 속 와중에도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끊임없이 내 삶 속에서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헐떡이면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과 이 세계, 이 세상, 그리고 내 삶 모든 요소, 마디마디 마다 하나님을 찾고 갈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갈구한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매일 내가 감사할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불의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 삶에 감사할 이유가 샘솟습니다. 감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나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인내할 힘이 내 안에 점차 점차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에서 이 가슴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분을 우러러보며 그분께 너무나 감사할 것이 끊임없이 샘솟아서..그분께이 빚진 삶을 끊임없이 마치 갚을 수 없는 빚을 갚는 자의 삶으로 그분을 기뻐하는 삶, 감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 깊은 교만의 죄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개혁신앙인들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서 제 1문 1항이 이것입니다. 인간의 제 일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아멘..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과 죄악들을 오직 하나님께 꺼내놓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삶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감사하는 우리 심정을 회복합시다. 감사하는 삶을 회복합시다. 그저 생각속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기록을 남겨두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잠자리에 들기전에, 하루 삶을 돌아보며 자그마한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매일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른 결정과 선택의 앞에 놓이는 것이 바른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 바른 판단 앞에 오는 것이 ‘바른 앎,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 때, 바른 방향과 길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비판보다는 격려와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또한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단지 그것을 구할 용기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결코 정죄받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자들, 즉 믿는자들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를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또한 나 스스로가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심판은 오직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 맡겨두어야 함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모든 시선과 판단을 하나님께 고정시켜야 될줄 믿습니다. 이 신앙의 오류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몸부림 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오류에서 벗어나 참 신앙인으로 한단계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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