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설교 자료들

부활 명언 예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부활 명언 예화

Notes
Transcript

부활 명언 예화

부활주일 특별 예배 순서
⓵*예배 시작과 함게 호산나 성가대 입례송 — 찬2장
⓶묵상 -묵상,교독문133부활절 - (사회 : 임대현 안수집사)
133. 부활절(1)
사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회중: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사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회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7-58상)
사회: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회중: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사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회중: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사회: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눅 24:36-39)
회중: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사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회중: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아멘-
⓷찬송1장 대신 ... 다 같 이 // 씩씩하고 기쁘게 ...
161장(통159) 할렐루야 우리 예수
https://youtu.be/YB195ond-t0
1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 하셨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
2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심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3 할렐루야 우리 예수 흠과 티가 없도다
무덤 속에 있는 죄인 주가 일으키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영광 주로 오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영광 주로 오시네
⓸사도신경 –신앙고백
⓹메인찬양---찬160(통150)--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구주
https://youtu.be/ZFgmixXJiPo
⓺대표기도 — 오정호 안수집사
⓻성경봉독 ( 박정화 지휘자 )
1부-여의도순복음교회
2.3부 -성경봉독 = (요20:1-10) (일어서서)
시~~작!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⑧호산나 성가대 –찬양 –(지휘자 : 박정화 집사)
*** 여기서부터 담임목사 등단 ...
⓽⑧호산나 성가대 –찬양 –(지휘:박정화 집사)--
⓽ 3월 말씀 암송(죄 형벌 구원)- 롬3:23, 사53:6, 롬6:23 ,히9:27 롬 5: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
1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의 형벌
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4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음
5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⓾통성기도(참회기도) –나라민족,교회
⑪(설교전 찬양)... 약한 나로 강하게 (후렴부터..)
⑫(서로 서로 인사 합니다 –)
나는 하나님이 보실때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자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좋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믿습니다.
==========================================
⑭부활의 증인들( (요20:1-10) 24/3/31 부활주일
부활영상 볼 것 ?
어느 노인이 신약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 성경에서 가장 감명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노인은 두말하지 않고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 S 웨일’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로 그 증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 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고전15:12-13)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여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안 식후 첫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후 베드로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그리고 도마와 갈릴리의 제자들 순으로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계시다가 감란산에서 500여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고전15:3-8에서 증거 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럼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실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을 주는지를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서 이 시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증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물흘리는 자에게 나타난 예수)
막15:47에 보면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곳까지 와서 그 마지막 장사지내는 장면까지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20:1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   되는가를 확인하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녀가 예수님의 무덤을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찾아 왔을까요 ? 여기에 대해서 막16:1에 보면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 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와 그 밖에 여인들이 안 식후 첫날에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향유를 바루기 위해서 향품을 사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동산 지기가 어디로 옮겨 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그때 다시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왔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묻혀 있다고 생각했던 무덤은 텅  비어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  동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찾으셨고 그녀를 향해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불신의 미몽에서 해맬 때, 무지의  늪에서 좌절할 때, 주님은 고요히  다가 오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신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거센 세파에 밀려 낙담하거나 절망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그리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에게 부활의  신앙을 확실하게 심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은 초대 교회에 곧 이어  불어닥친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리라"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인내하게 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뭐라고 증거 했습니까 ? 요20장 18절을 보세요."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다시 사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라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했고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은 제자들과 도마입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나타난 예수)
주님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처음에는  놀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자기들도  스승처럼 끌려가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더라면 그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세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숨어  있어도 이들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안히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흑시 제자들이 유령이 나타나  착각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목 박혀 상처받은 손을 내미시고 시퍼런 창날에 찔리셨던 역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수모와 조롱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 속에 빠져 있어 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제자들은 얼마나 놀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왜 그 순간 그 자리에  없었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도마가 돌아오자 제자들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말을 들은 도마는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도마의 이 말의 뜻은 "믿을 수  없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불  신앙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도마가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강력하게 불신한 것은 도마는 다른 제자들보다 그 성격이 대단히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서 자기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기 손으로 만져 보지 않으면 수락할 수 없다고 하는 경험적이고 이성적인 자신의 깊은 철학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20:26-27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던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역구리에 손을 넣어 보거나 만져 보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도마는 주님이 나타나신  그 사실만으로도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도마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도 도마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도마의  신앙을 살펴보면 그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구체적으로 알려고 했었고, 그  자신도 보다 정확하게 알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검증에 검증을 통하여 자기  믿는 바를 확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믿음은 맹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맹신하고 맹종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알고, 바르게  믿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확실한 부활의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절망과 낙심가운데 있는 자에게 나타난 예수)
눅24장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신뢰하고 사랑하던 그 주님이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광경을 목격하자 이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납심에 잠겨 엠마오 고향 집을 향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눈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어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눅24:17)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그중 한 사람인 글로바라 라고 하는 제자가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일이요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합니다.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감히 그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망을  잃어버린 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 신앙의 상태에 있는 두 제자에게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이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함께 동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큰 기쁨으로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하고 다시 그들은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갔습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감격을 나누기  위하여, 이 위대한 소식을 그들과 더불어 나누기 위하여,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영적인 의미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모든 꿈과 소망이 상실된 길입니다. 그 길에는 깊은 슬품과 허무와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성도된 우리들도 종종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업을 위해서 모든 정열을  받쳐 희생을 각오하며 노력은 했지만 불의한 세력을 만나 허사가 될  때, 또한 진실함과 희생으로 수고하고 봉사를 했는데 뜻하지 않는 오해와 배신으로 갚음을 받을 때 우리는 이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로 인하여 불의한 세력들에게 밀려 낙심하는 길에, 절망하는 길에, 슬 품으로 눈물 흘리는 길에서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나를 축복하시며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동행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보기한 자에게 나타난 예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부활하신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만남의 현장은 디베랴 바다가 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이 만남이 있기 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때마다 예수님께 말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깊은 죄  의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곁을 떠나 옛날에 하던 대로 고기를 잡기 위해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  그는 어느 제자들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얼굴을 빕울 면목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의 자리에서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호언 장담하기를 눅22:33에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막14:31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마26:33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눅22:54이하에 보면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 집으로 끌고 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뜰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있는 곳에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런데 한  계집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라고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 라고 하자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 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말하기를 '이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노라'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하자 닭이 곧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했습니다.
제자 중의 수제자인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의 남다른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고, 주님의  시선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주님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하던 대로 고기 잡으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디베랴의 이른 새벽에  그를 찾아오신 주님은 한 마디도 이 제자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배신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옛날처럼 장담하지 못하고 "주여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의 사실을  모든 제자들에게 증명하셨고, 직접 찾아가서  사명을 주셨으며, 말씀을 깨닫게 하셨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을 위로하셨고,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오백여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란산에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일까요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또한 그 분 자신이 피조물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
여러분 !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절대로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참 하나님이 되심을 피조물들에게 증거  하는 것이므로 영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영생의 신념을 확고하게 하는 증거적 가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또한 골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했으며, 그리고 마지막 때 우리가  다함께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살전4:14-17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고,  또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영생의 부활의 소망과 속죄함에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 부정과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처럼 내년을 모르고 있는 인생들입니다.
인간에게는 부활체가 있고 그리고 그 부활체가 영생할 내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영생의 축복과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소망의 기쁜 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과 우리 교회가  부활의 신앙으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진정한 하늘의 백성과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물가운데 보내는 자, 두려움 가운데 보내는 자, 절망과 낙심, 죄와 포기 가운데 있는 성도여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 이기고 승리하며 증거하는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121 [코이네자료실:티스토리]
행2:30-36 새암교회장년주일낮예배 2021년 4월 4일(부활주일)
부활에 참여할 사람들
달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모양도 맛도 영양도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
하지만 닭이 품어보면
그때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유정란에서는 경이로운 생명이 태어나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품어도 고약한 냄새만 나다가 썩어버립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과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살 때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죽음이후나 예수님이 오실 때
그때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자기 욕심을 따라 산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탈린이 부활할까 봐
스탈린의 유해를 국내에 안치하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긴 후루시쵸프가 드골에게 청해서 나폴레옹의 묘가 있는 앙바리드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드골은 앙바리드는 영웅을 모시는 묘지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워싱톤에 알아보았지만 앨링톤 묘지도 스탈린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영국의 영웅 이외에는 사절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에 부탁을 해보았는데, 뜻밖에도 학살자의 유해를 인수하겠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다만 회신 끝에 이러한 추신이 있었다.
믿을 만한 국제 통계에 의하면, 성스러운 이스라엘에서 사자(死者)의 부활은 그 확률이 세계 최고임을 알아주기 바람.
고민 끝에 후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유해를 그냥 소련 땅에 묻어 두기로 하였다 한다.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부활을 경험한 베드로와 제자들
부활 후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순서 - 예수께서 부활후, 나타나 보이신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베드로에게(눅 23:34,고전 15:5-).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에서 주님의 부활을 만나고 바다로 뛰어들고, 고기를 잡고, 마리아의 부활의 증언을 듣고, 도마가 없을 때도 만났고, 도마가 있을 때도 만났고, 승천 직전에도 만났고, 어떻게 보면 주님의 부활을 제일 많이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제자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눅 24:13-31).
눅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눅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눅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 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0
엠마오로 실망하여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와 주심으로 두 제자는 그 즉시 마음이 감동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활을 증거하러 올라갑니다.
3) 도마 이외의 사도들에게(눅 24:36-43,요 20:9-24).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 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 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 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도마를 빼고 도마의 부활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시기 위해 남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4) 5의 8일 쯤 후, 도마가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요 20:24-29).
요 20: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7 도마에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부활의 주님은 나타내 주셔서 그가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부활의 신앙의 열매입니다.
5)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에게(요 21:1-23).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디베랴 바다의 일곱 제자들에게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보고, 함께 식사를 하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6) 어떤 산 위에서, 사도 및 5백명에게(고전 15:6-).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오백여 제자들에게도 보여 주셔서 그들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29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것은 바로 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7) 야고보에게(고전 15:7-).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야고보에게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8) 열한 사도에게(눅 24:50-53,막 16:19-20,행 1:9-12).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1사도가 부활하여 마지막 승천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부활과 승천의 목격이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신앙을 생각해보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합니다.
2.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는 베드로
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2:14절부터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16-21절까지 요엘이 예언한 성령충만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22절부터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어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여러번 주님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하게 부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행 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도 주님이 부활의 열매를 주실 것을 믿고, 육체도 희망을 가지며, 기쁨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죽었고, 주님은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은 그리스도를 미리 보았으므로 주님의 부활을 말했습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 자신과 나머지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너희가 죽인 예수는 부활하여 주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에 증인이 제자들입니다. 이 부활을 본 제자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만나고, 믿어지는 순간 모든 일을 제쳐놓고, 부활을 증거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셨고, 내가 죽어도 다시 살아 날 것은 생각하니 여기에 모든 것을 걸게 된 것입니다. 이 생이 마치고, 죽은 후에 다시 사는데, 그곳은 천국이고, 이 땅의 삶을 심판하신다는데 거기, 부활, 그 나라, 하나님 나라에 목숨을 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자제들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과 인생이 완전히 딴 판이 된 것은 능력 면에서는 첫째는 성령충만 때문입니다. 인지적이며, 믿음면에서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시고,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을 판가름 냅니다.
부활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인도의 전총리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3. 부활을 믿는 자의 역동적인 삶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 부활을 경험하고 믿은 제자들은 회개하고, 성령을 맏고, 부활을 전하는 제자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부활을 전하는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릴레이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부활을 전하는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되었습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전하고, 자신의 부활을 믿기 시작한 제자들은 완전히 삶이 바뀌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행복모임을 열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대로 교제하고, 식탁교제를 하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주님의 역사로 기사와 표적이 엄청나게 많이 나타났습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또한 삶도 변했습니다. 물건을 팔아서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믿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행 3: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행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행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핍박을 이겨냅니다. 핍박이 있는데도 믿는 자들은 점점 더 늘어납니다. 할렐루야!
부활절의 첫 복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행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행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젠 또 다른 사역자들을 세웁니다. 일곱명의 사역자들을 세워 파송을 합니다. 배가번식하는 역사입니다.
행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6: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행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행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행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행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새로 세운 스데반이 또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사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사림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신앙의 최고봉은 부활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살고, 내가 부활 할것은 믿고, 부활하여 주님이 나의 이 땅의 삶을 평가하실 것을 생각하면 부활의 증인된 삶에 올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이런 삶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의 주인공입니다. 이제 부활의 능력으로 삽시다. 부활의 소망으로 삽시다. 부활 신앙으로 내 인생에 승부를 겁시다.
결론
1.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2. 나의 부활을 확신하며, 부활의 주님의 눙력으로 살고, 부활의 주님을 보여줍시다.
3. 부활의 믿음으로 가족, 베스트의 기도제목의 응답을 선포하여 그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도록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찬양: 180장, 설교찬양?
질문
1.
2. 다윗은 예수님의 무엇을 미리 보고 무엇을 말했습니까?(행2:30-31) 제자들과 우리는 무엇의 증인입니까?(행2:3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엇을 밭아서 누구에게 부어주셨습니까?(행2:33)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셨지만 예수님은 올라가게 하셔서 하나님 어디에 앉게 하셨습니까?(행2:34-35) 그런즉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이 무엇입니까?(행2:36)
3.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지, 내가 부활 할 것을 믿는지 고백해 봅시다. 믿는다면 이제 내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고, 부활의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부활 목격자 12종류 사람들
기독교의 핵심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제대로 아는 건 딱 한가지 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날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그분이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진리, 그거 하나만 확실히 알아요. 다른 건 잘 몰라요.”
저와 여러분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만을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고 확실히 사랑하고 확실히 붙잡으면 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드리지 않고 거부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시면서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마 16:23).
사실 베드로는 그 후에도 십자가의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며 배신했습니다. 나중에는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3천여 명에게 생명을 쏟아 바치면서 전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행 2:36).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전파했을 때 3천여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알기로 그리고 믿고 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 1:2). “하나님께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느니라”(행 17:3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여기 청주 운암교회에 함께 모인 것은 우리들도 사도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성자 주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우리들에게 절대로 필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돌리고 또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붙잡을 때 우리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다 같이 저를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들이 날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여야 할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하늘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 세상에 남아계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10여 차례나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아직도 바로 알지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못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배신을 충성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자기 중심적 삶을 주님 중심적 삶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주님께서 40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사건들을 간단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
첫 번째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자 예수님을 만난 후 주님 앞에 눈물을 쏟으면서 믿음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마지막까지 따라 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어두울 때 막달라 막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요 20:11).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사랑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사랑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오셔서 “마리아야” 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랑은 사랑과 통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혀서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라고 말하면서 성자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사도적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달려가서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8). 막달라 마리야의 인생은 이미 새롭게 바뀌어져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로부터는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몸과 가슴과 영혼과 세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찬양과 섬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만을 전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생생한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2. 여인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성자 에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따라오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다른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왔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성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조금 후에는 다른 여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9-10).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내 보이신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사랑은 사랑과 통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성자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남성들이 아닌 여성들이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7).
무덤에 찾아왔던 몇몇 여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저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저들의 몸과 가슴과 영혼과 세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찬양으로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두 번째로 만난 여인들도 주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3. 베드로
세 번째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 베드로였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33,34).
베드로는 배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 26:70,72,74).
물론 베드로의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의 성자 예수님께서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번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성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주님이신지 모릅니니다.
베드로는 후에도 여러 번 배신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삶이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배신하기 쉬운 우리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할 것입니다. 배신자 베드로는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네 번째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의심과 슬픔에 쌓여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이름 없는 두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주님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저들의 눈이 가리워졌고 저들의 마음에 의심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고 마음이 냉랭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들이 아닌 일반 평신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가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5).
성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저들과 대화를 계속하셨습니다. 한참 대화를 하시다가 저들의 믿지 못함과 의심함을 책망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풀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그리고 저들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서 음식을 잡수시면서 떡을 떼어서 저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의심과 슬픔이 살아졌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0-32).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다시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달려가던 발 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습니다(눅 24:32-35).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의 삶도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은 그 후 어디를 가든지 불신앙과 의심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자기들을 찾아오셔서 자기들의 눈을 밝혀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주신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5. 나머지 열 제자
다섯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부활 주일 날 저녁 두려움과 불안에 쌓여 문을 닫아 걸고 함께 모였던 열 제자들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 20:19).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라는 신분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제자들이 지녀야 할 믿음도 사랑도 헌신도 충성도 다 내어버린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두 제자들의 간증을 들으면서도 반신 반의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즉 주일 저녁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눅 24:34-36).
황송하고 감사한 일은 이런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을 지닌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괘씸한 놈들이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을 드시는 대신 두려워서 떠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1).
그리고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시고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 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1,22).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못난 제자들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길로 “부활”의 길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 디디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십자가”의 길과 “부활”의 길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할 것입니다. 불신앙과 두려움에 쌓여있던 열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부터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와 “부횔”의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았고 “십자가”와 “부횔”의 주님을 증거하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6. 의심 많은 제자 도마
여섯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안 믿겠다고 고집하던 의심쟁이 도마였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도마는 극심한 회의와 절망에 빠져서 이리 저리 다니면서 방황을 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인 주일 저녁에 그 곳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자기는 그것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도마는 철두철미하게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고 반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한 주가 지난 그 다음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도마는 한 주간 동안 회의와 의심에 쌓여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방황을 하다가 그래도 함께 지내던 동료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6-27).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 가운데 있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 20:28).
그때 도마의 운명은 바꾸어 졌습니다. 도마는 그 후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전하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고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의심이 많아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주님을 증거하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며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벌겋게 달군 접시 위에 던져지기도 했고 펄펄 끓는 가마에 던져지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잔인하게 창으로 허리가 찔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의심쟁이 도마는 한 평생 주님을 향해서는 울면서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주목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항상 주일날에 나타나셨고 주일 저녁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후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0,11).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 만큼 주님 만날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7. 세상으로 돌아갔던 일곱 제자들
일곱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여러 번 만난 후에도 다시 디베랴 바다로 즉 세상으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데의 아들들과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요 21:1,2,4).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세 번씩이나 나타나셨고 열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여섯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일곱 제자들은 또 다시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세상으로 옛 직업으로 되 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요 21:3).
참으로 서글프고 불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송하고 감사한 일은 이런 못나고 괘씸한 제자들을 부활의 주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괘씸한 놈들이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을 드시는 대신 불신과 배신과 실패와 좌절과 공허함에 빠진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다시 찾아와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책망이나 야단을 치시는 대신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말씀은 “너희에게 지금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물고기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는 말씀은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는 고기도 없고, 예수도 없고,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패도 우리들의 좌절도 다 아십니다. 우리들의 자만도 고집도 다 아십니다. 우리들의 지친 것도 우리들의 탈진한 것도 우리들의 공허함도 우리들의 궁핍함도 다 아십니다.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것도 다 아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유창한 웅변과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아무개 목사야, 아무개 전도사야, 아무개 장로야, 아무개 권사야,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길선주 목사가 지녔던 진실한 회개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손양원 목사가 지녔던 순수한 사랑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주기철 목사가 지녔던 지사충성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한경직 목사가 지녔던 온유함과 긍휼함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박윤선 목사가 지녔던 순수함과 단순함이 있느냐?”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솔직하고 간단했습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자기들의 실패와 공허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꾸미며 위선을 떱니다. “뭐 별로 좌절하지도 않고, 뭐 별로 허탈하지도 않고, 뭐 괜찮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얼버무리고 거짓과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자들은 솔직했습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제자들로 하여금 회개의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진솔한 자기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러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다 해 주십니다. 진솔하게 자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배신과 공허함을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다 해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역의 방법을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선과 떡을 즉 주님 자신을 먹여주셨습니다. 깨어진 믿음과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깨어진 사명을 새로 부여해 주셨습니다. 순교의 길까지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순수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보다는 유창한 웅변과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 등 세상 유행이 깊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명예 등 세속적 유행에 깊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다시 만나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길선주 목사와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눈물과 피와 사랑을 먹고 자란 한국교회야,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 앞에 우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세속화의 죄를 진솔하고 처절하게 고백하면서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지금 우리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여,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고쳐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도 사도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우리 몸에 지니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증거하면서 순교의 길까지 걸어가게 하시옵소서!”
8-11. 500여 형제들
여덟 번째로, 아홉 번째로, 열 번째로, 열한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500여 형제들과 야고보와 열한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었는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행 1:3-8).
오백 여 형제들은 그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모든 믿는 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였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시므로 야고보의 신앙을 확증시켜 주셨고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구비시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열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다시 나타나셨는데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선교 대 위임령을 부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열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다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만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3,6-8).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나라의 정치적인 독립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므로 모든 족속으로 주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즉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이 되라는 상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우리들은 선교 대 위임령이라고 합니다.
12. 바울
열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살인자였고 교회를 잔멸하던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1,3).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갈 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사울은 너무나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5).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5,6). 사울은 그 후 삼일 동안 보지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주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택한 그릇이 되고 주님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그 때부터 사울의 운명과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이 있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19-22).
사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1:1)이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입을 열어서 전파한 말은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말로 설교로 전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온 몸으로 삶과 죽음으로 전했습니다. 그의 몸에 십자가와 부활의 흔적을 지니며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 6:14,17).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토록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눈물로 고백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께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십자가도 희미해졌고 부활도 희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음악적 유행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끄러운 음악과 화려한 프로그램과 행사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적 축복과 성공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초대교회의 순수한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타콤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바라보고 경배하며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던 초대교회의 순수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인 갈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등이 지녔던 순수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지니고 주변으로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움과 슬픔과 절망이 있는 곳들을 찾아서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깃든 곳을 찾아가서 생명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음이 깃든 곳으로 흩어져서 부활과 생명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킵니다.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어두움의 문화를 빛의 문화로 변화시킵니다. 미움과 저주의 문화를 사랑과 축복의 문화로 분열과 갈등의 문화를 화해와 평화의 문화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십자가”와 “부활”의 성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을 충만이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가슴에 성자 예수님의 평강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생기와 성령을 우리들의 몸에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실패와 좌절과 공허함을 회개와 믿음과 순종과 사랑과 헌신으로 바꾸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사탄의 세력이 물러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남한 사회는 물론 북한 사회 안에도 미움과 저주의 문화가 사랑과 축복의 문화로 변화되고, 어두움의 문화가 빛의 문화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미움과 저주의 문화가 사랑과 축복의 문화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분열과 갈등의 문화가 화해와 평화의 문화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성자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이시여! 지금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주시옵소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자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시옵소서! 성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도마처럼, 베드로처럼, 스데반처럼, 바울처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찬양하며 증거하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니며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8888
4가지 부호라 확증
제6회 기독교 변증 컨퍼런스가 '예수 부활, 허구인가? 역사적 사실인가?'라는 주제로 10월 28일 서울 방화동 큰나무교회(담임 박명룡 목사)에서 개최됐다.
이날 컨퍼런스에서는 김성원 교수(서울신대)가 '기적은 가능한가? 칸트와 화이트헤드의 대화', 안환균 목사(변증전도연구소 소장)가 '예수 부활에 대한 의문들', 박명룡 목사가 '예수 부활, 역사적 사실인가?', 김성로 목사(춘천한마음교회)가 '부활과 변화된 삶'을 각각 발표했다.
세 번째 강의를 맡은 박명룡 목사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존 도미닉 크로산 류(類)의 주장이 있지만,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은 예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예수는 역사상 실제로 죽었고 실제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밝혔다.
◈예수에 대한 기록의 역사적 신뢰성
박 목사는 먼저 예수의 기록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에 대해 "예수에 대한 기록과 세계 종교 창시자들의 역사 기록, 그리고 동·서양 고대 인물들의 역사 기록을 함께 비교할 때 그 역사성을 자세히 알 수 있다"며 "성경에 대한 기록을 의심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반 역사 속 예수의 기록을 살핌으로써 그 역사적 신뢰성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고대의 종교 경전들은 모두 구전 전승기간을 갖고 있다. 즉 각 종교 창시자들의 가르침은 일정 기간 구전으로 전승됐다가, 후대의 어느 시점에 문서로 기록된 것"이라며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의 구전 기간이 짧으면 짦을수록 그 가르침의 내용은 변질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단군 신화는 B.C. 2333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3,600여년 후인 A.D. 1281년 일연 승려에 의해 기록됐다.
조로아스터교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 스피타마(조로아스터)도 B.C. 1400-1000년경 살았던 인물이나, 그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된 시기는 A.D. 3세기 경이다.
B.C. 6세기에 살았던 부처의 가르침도 대부분 A.D. 1세기에 기록됐고,
A.D. 570-632년 살았던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가르침도 최소 20년에서 200년 후 기록으로 완성됐다.
반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사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30-60년 사이 기록됐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이보다 더 빠른 18-35년 사이 쓰였다. 박 목사는 "이처럼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세상 어느 종교들보다 매우 짦은 구전 전승 기간을 갖고 있으므로, 예수에 관한 기록은 세계 어느 종교의 경전들보다도 탁월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며 "이러한 기록이 엉터리라면,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모두 엉터리일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이 '사복음서'는 동·서양 고대 인물들의 역사 기록들과 비교해 봐도 훨씬 정확하다.
중국 공자의 생애에 관한 전기는 사마천의 <공자세가>인데, 공자의 죽은 B.C. 479년보다 최소 375년 이후 쓰였다.
노자의 <도덕경>도 저작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없고, 200-300년간 수정과 삭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도 400년 후에야 기록됐고,
예수 당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 관한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역사서조차 80년 후에 나왔다.
박 목사는 "전설이나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발전되려면 최소 두 세대(6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데, 신약성경은 예수의 죽음 이후 18-60년 이내에 거의 다 완성돼, 전설이나 신화가 발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며 "뿐만 아니라 예수에 관한 기록은 동·서양 고대 인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사성을 갖고 있으므로, 신약성경은 실제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실제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고 설명했다.
'일반 역사'에 나타난 예수의 기록에 대해서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 로마의 지방 총독 플리니와 루기안, 바빌론 탈무드 등에 예수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신약성경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며 "'역사적 예수' 권위자인 게리 하버마스 박사에 따르면, 예수의 생애에 관한 고대 자료는 45개에 달하며, 이 중 비그리스도인들의 자료만 17개"라고 소개했다.
반면 부처에 관한 기록은 불경에만, 공자의 생애는 <공자세가>에만, 무함마드의 생애는 이슬람 문서에만 등장한다. 박 목사는 "고대 종교 지도자들 중 예수만큼 다양하고 신뢰성 있는 일반 역사 기록을 가진 인물은 없다. 그분의 기록이 가장 탁월하다"고 덧붙였다.
◈예수 부활의 역사적 증거 4가지
이후에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증거 4가지'를 소개했다. 이에 대해 박명룡 목사는 "예수의 부활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의하는 역사적 사실이 4가지 있다"며 "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또는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첫째 사실은 '예수은 십자가에서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 이후 죽어서 아리마대 요셉의 개인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예수님의 무덤 위치가 알려졌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며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 의원 중 한 사람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은 당시 제자들에게는 불리한 증언이었다. 그럼에도 사복음서가 일관되게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그 증언이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했다.
둘째 사실은 '예수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빈 무덤'은 부활의 강력한 증거인데, 이를 지지하는 증거는
①각각 다른 전승을 가진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증언하고
②바울 이전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경(Creed, 고전 15:3-8)이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지하고 있으며 ③복음서는 빈 무덤의 최초 증인으로 여인들을 내세우고
④1세기 당시 유대인들과 권력자들은 예수 무덤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등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③에 대해 "유대 법정은 여인들의 법적 효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수 부활의 목격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제자들이나 다른 남자들을 내세우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며 "이는 실제로 여인들이 부활을 목격한 첫 증인들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복음서의 기자들이 역사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④에 대해서도 "1세기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마 28:11-15)을 잘 살펴보면, 양측 모두가 함께 인정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라며 "제임스 던이나 역사가 마이클 그랜트 등 대부분의 비평적 학자들도 예수의 무덤이 '빈 무덤'으로 발견됐다는 사실은 인정한다"고 했다.
셋째 사실은 '개인과 그룹이 여러 번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경험을 했고, 그 사실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을 증언하는 기록은
①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요 20:10-18, 마 28:8-10)
②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눅 24:13-32)
③열한 제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눅 24:33-49)
④도마를 제외한 열 사도와 다른 사람들(요 20:19-23)
⑤도마와 다른 사도들(요 20:26-30)
⑥제자들(마 28:16-20)
⑦승천하기 전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함께(눅 24:50-52, 행 1:4-9) 등이 있다.
박 목사는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나 본 사람이 무려 500명이 넘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매우 특이한 주장을 했고 그것을 확신했는데,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당시 침묵으로 일관하다 갑자기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봤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실을 목숨 걸고 전파했다"며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었고, 현대 회의주의 학자들조차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제자들의 이 확신에 대해서는, 실제로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다는 설명 외에 다른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수 없다"고 전했다.
넷째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경험 때문에 삶이 급격하게 변화됐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누구도 예수 제자들의 급진적 변화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이 없다"며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전 그를 떠났고 심지어 그를 부인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유대인의 보편적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메시야는 죽지 않아야 했기에 그들은 혼란 속에 있었다.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유대교 사상은 마지막 날 부활 전 그 누구도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그 사실을 믿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박 목사는 "그런데 그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며칠이 못 되어 예수가 부활했고, 자신들이 부활한 예수를 직접 봤다고 선포했다. 더욱이 부활 사건 이후 그들의 남은 생애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들의 믿음 때문에 기꺼이 죽고자 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다"며 "신약성경은 제자들의 혼돈 상태와 자신의 목숨을 내걸만한 확신을 가지게 된 사건 사이에 부활한 예수를 본 사건이 있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명룡 목사는 끝으로 '부활에 대한 정황 증거들'도 제시했다. 이는 ①제자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②예수의 형제 야고보나 사도 바울 같은 회의론자들이 회심했다 ③동물 제사 폐지와 율법 대신 믿음 강조, 안식일 대신 주일 준수, 유일신론에서 삼위일체로 등 유대 사회의 전통과 사회제도를 갑자기 변화시켰다 ④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모임인 교회들이 생겨났다 등이다.
박 목사는 "이러한 정황 증거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4가지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뒷받침해주는 강력한 증거"라며 "만일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었고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그 거짓말에 목숨을 걸면서 거짓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초기의 제자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 부활 신앙에 목숨을 걸었다. 이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더불어 "위에서 제시된 8가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만났다는 것 외에 다른 설득력 있는 대답이 없다"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고 했다
88****
6가지 팩트들
Fingerofthomas
2017. 6. 2. 13:59
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치룰 능력이 없었고, 또 죄 값을 치루지 못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망을 이기신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 합니다. 또 많은 무신론자들과 비평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것이 비이성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 기록들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정확하며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을 버리고 중립적으로 증거를 따라서 확인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성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몇가지 오해들
설명에 앞서 몇가지 오해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입증 혹은 증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입니다. 입증이란 증거를 제시해서 증명하다란 뜻 입니다. 증명이란 어떤 명제나 주장이 참임을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증, 증명이라고 했을때, 그 단어의 정의는 일반 상식선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가장 이성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입니다. 부활에 대한 역사성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입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와 기록들을 합리성과 이성에 비추어 가장 사실일 것 같은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며 역사적인 입증이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최선의 추론입니다.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이 쓴 성경은 역사적 가치가 없다거나 증언으로써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 어떤 역사학자도 성경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에 의해 쓰여졌기에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난중 일기 같은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알아내는데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 글에서도 소개해 드리겠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신약 학자들이 있으며, 그들 중 성경을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모아져 있는 한권의 책이 아니었으며, 독립적으로 쓰여진 여러개의 기록과 편지들이 이후에 하나로 모여서 비로소 한권으로 되어진 책입니다. 역사적 사료 가치는 누가 썼는가에 상관없이 그것이 실제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압도적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성경이 주장하는 6가지 팩트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팩트: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사실상 모든 학자들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성경외에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기독교인들을 싫어했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보고를 없애기 위해 네로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는 자들이 받는 가장 극렬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악한 미신은 악의 근원지인 유대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흉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중심지로 삼는 로마에까지 와서 인기를 얻었다. 1
라고 기록하며 성경의 기록을 확증합니다.
십자가 형을 받고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십자가 형에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선 당시 처형 당해야 하는 죄수가 도망가거나 살아난다면 이를 담당하는 군인들은 모두 대신 죽어야 했기에 그들은 죄수들이 확실히 죽도록 했고, 또 물에 불린 채찍 가죽에 동물의 뼈조각을 넣어서 때리는 형벌 후 처형장까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서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세우는 방식은 어떤 사람도 살아날 수 없게 만드는 극도로 잔혹한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형을 받고 살아난 사례는 단 한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세푸스가 예전에 알 던 세 사람이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을 보고 티투스에게 눈물로 부탁하자 그 세명의 처형을 중지하고 그들을 극진히 간호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세명 중 두명은 죽고 한명이 살아난 것이 유일한 생존 기록 입니다. 2
이런 증거에 따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성서 비평단체인 Jesus Seminar의 공동 설립자 John Dominic Crossan도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확실하다. 만약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십자가 후 100년간 아무 기록을 안남겼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두 역사가를 안다. 그들의 이름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고넬리우스 타키투스 이다.” 3 라고 말합니다.
또 무신론자이자 저명한 신약학자인 Gerd Ludemann 역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4 라고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부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팩트: 예수님은 죽은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네개의 복음서 그리고 외경인 베드로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대다수의 신약학자에 의해 팩트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를 쓴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다는 것은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자로써 십자가에 처형 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 장사 지낸다는 것은 “나도 반란군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의 이 행위를 담대하다고 표현 합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이 와서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간절히 구하니라.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역시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자더라. <마가복음 15:43>
이는 사실 제자들이 했어야 하는 일들 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갔었습니다. 만약 이 내용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이런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고 기록했을까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분석하는 기준 중에 당혹성의 기준(Criterion of Embarrassment)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자가 기록하기 싫었거나 이 사실을 통해서 당혹스러울 만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많은 신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장사되었음을 역사적 팩트로 받아들입니다.
무신론/비평가들의 웹사이트인 Infidels.org의 공동 창립자이자 무신론자인 Jeffrey Lowder 역시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묻혔을 확률은 아주 높다! … 크리스챤들이 아리마대 요셉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 5 라고 인정합니다.
또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고, 3일 후에 그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던 저명한 성서 비평가 Bart Ehrman 역시 이후 자신이 관점을 바꾸어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정말로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3일 후에 무덤이 비어 있는채로 발견 되었음을 알 수 있다.”6 고 말합니다.
세번째 팩트: 예수님의 시체가 놓여 있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사흘 째 예수님이 있던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는 복음서의 기록 역시 다수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팩트로 인정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연구로 저명한 종교 철학자이자 변증가 Gary Habermas는 1975년 부터 빈 무덤에 대해 쓰여진 3,400여개의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75%의 학자들이 빈 무덤이 발견된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합니다. 7 왜 신약 학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었음을 인정할까요? 우선 당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처형 당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주장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는데, 만약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런 주장은 쉽게 반박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로마나 유대인 지도자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어 길거리에 공개했다면 이런 소문은 금방 사그러들었을 것 입니다.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역시 무덤이 비어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초대 교부이자 역사가인 저스틴 마터와 터툴리안은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했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8장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만약 시체가 무덤에 있었다면 시체를 훔쳐갔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아주 재밋는 사실은 1930년 나사렛에서 발견된 나사렛 비문에는 이스라엘에서 돌무덤에 있는 시체를 훔쳐가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적힌 로마 황제의 칙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 도굴꾼들은 시체가 아니라 무덤에 묻힌 보물들을 훔쳐가기 때문에 시체를 훔쳐가면 안된다는 비문은 아주 이례적인데, 칙령이 내려진 시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와 겹칩니다.
이런 근거들을 통해 저명한 고대 역사가 Paul Maier는 “유대인 비평가들도 기독교인들처럼 돌무덤이 비어 있었음에 동의한다. 다만 그들은 자연적인 설명을 하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비평가들에게서 나온 이런 강력한 증거는 이 사실이 진짜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9 라고 주장합니다.
빈무덤을 발견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도 못할 만큼 낮았으며 여자의 증언은 신뢰 받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빈 무덤의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왜 여자들이 발견했고 증언했다고 기록했을까요?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무덤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증언이 인정받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의 성은 경박하고 뻔뻔하기 때문이다. 종들의 증언이 인정받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익을 얻을수 없거나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면 아마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10
여인이 주는 어떤 증거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증언할 수도 없다. 이는 랍비가 인정하는 강도가 여자와 같이 증거를 줄 수 있다. 11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의 사회적 위치는 굉장히 낮았습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여자들이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도 허가 받지 못했을 정도로 여자들의 말은 신뢰받지 못했음을 기록합니다. 또 탈무드는 여자의 증언은 강도와 같은 범죄자의 증언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만약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 지어낸 얘기였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믿게 하고 싶었다면, 왜 성경의 저자들은 그것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했을까요? 당시의 문화에 비추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자들의 증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 역사학자 Gerza Vermes는 “모든 주장을 고려하고 평가했을때, 전통파이던, 자유주의자이던 비평적인 불가지론자이던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결론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팩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던 여자들을 낙담하게 했던 것은 시체가 아니라 빈 무덤이다.” 12 라고 이야기 합니다.
네번째 팩트: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
사실상 모든 역사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신실하게 믿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핍박받고 거의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했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합니다. 이는 복음서를 포함, 사도행전, 서신서, 초대 교부들의 교회사에 대한 기록 등에 자세히 남아 있습니다.
예를들어 폴리캅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무한한 인내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은 주님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에 있다. 그와 함께 있기에 그들은 고난도 함께 당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 라고 기록합니다.
플리캅과 동시대의 교부였던 안디옥 이그나티우스 역시 서기 110년경 로마로 순교하러 가면서 7개의 편지를 썼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으려 함을 기록합니다. 그 중 서머나 교회에 쓴 편지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왔을 때, 자신을 만져보고 몸이 없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져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그나티우스는 이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외에도 독립적인 수많은 기록들 특히 동일하게 고난받고 순교당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록들을 통해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들이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20세기 가장 저명한 회의론자 Rudolf Bultmann은 “모든 역사적 비평은 첫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13 “고 인정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Ed Sanders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후에 사도 바울까지) 경험한 부활은, 내 판단에, 팩트이다. 무엇이 이 경험을 하도록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들이 고의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설명이 타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부활을 봤다는 많은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부활한 주님을 외치며 보냈고, 십수명의 사람들은 이로 인해 죽었다.” 14 라고 주장합니다.
또 무신론 성경 비평가 Gerd Ludemann 역시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경험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하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15 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을만한 어떤 사건을 경험했으며 그들이 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음을 인정합니다.
다섯번째 팩트: 예수님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저히 풀지 못하는 문제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가장 강력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용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사례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합니다.
신의 한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극도로 미워했던 사울의 회심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신의 한수 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의 한수 –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 특히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의 기록, 또 여러 초대 교부들과 교회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통해 사도 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같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믿었다는 사실은 역사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초대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기록을 믿고 싶지 않다면 “씨저의 생명들”이라는 공개된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네로에 의해 베드로가 십자가 형을 당했고 사도 바울은 목베임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역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순교 당했음을 기록합니다.
페스투스가 죽었고, 알비누스가 부임했다. 그래서 그가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을 소집했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다른 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이 법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씌우고 돌로 죽이게 하였다. 하지만 가장 공정한 시민들과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싫어했다. 16
이에 대해 신약 비평가 바트 얼만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의 처형 이후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역사적 팩트이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살아난 예수님을 봤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17 라며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봤다고 주장함을 인정합니다.
여섯번째 팩트: 1세기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여섯번째 팩트 역시 사실상 모든 역사 학자들이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당시 기독교의 부흥에 대한 역사 기록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로마의 정치가이자 변호사였던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기독교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합니다.
그들 (기독교인)은 특정한 날을 정해서 날이 밝기 전에 모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를 때는 하나님께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찬양을 부르고 사기, 도둑질, 간음을 행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부정하거나 질문을 받을때 믿음을 부인하지 않기로 엄숙한 맹세를 합니다. 그들은 헤어진 후 음식을 나눠 먹기 위해 다시 모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입니다. 18
또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이 보고를 없애기 위해 네로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는 자들이 받는 가장 극렬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악한 미신은 악의 근원지인 유대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흉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중심지로 삼는 로마에까지 와서 인기를 얻었다. 19
라고 기독교인들의 부흥에 대해 기록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대지방은 물론 이방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퍼진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무에 달린 자 즉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자 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모세가 율법을 받을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3,000명이 죽었지만 성령이 오신 뒤에는 3,000명이 회심하여 살아나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의 개념상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메시아가 아니며, 나무에 달렸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을까요?
당시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했으며, 전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말 그대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자기들과 상관없는 아주 작은 유대라는 나라에서 반역자로 처형당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까요?
저명한 신약학자 N.T Wright 역시 “역사학자로써,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설명할 수 없다!” 20 라고 얘기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부흥은 불가능 했다는 것이죠. 이는 위에 있는 팩트 들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였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또 예수님을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숨걸고 전하고 다녔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신뢰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대신한 다른 사도를 뽑을때 베드로가 얘기한 사도들의 목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다니던 이 사람들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임명하여 우리와 함께 그분의 부활을 증언할 증인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매 <사도행전 1:22>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려 했던 것 입니다.
이 6가지 팩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절대 다수의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는 6가지 팩트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6가지 팩트를 통해 왜?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6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추론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 봐야 할 가능성은 이를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주장했던 예수님의 부활! 입니다. 하지만 세속 역사 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역사 내내 많은 역사학자들이 복음서와 다른 역사서에 있는 내용들을 규합해서 자연적으로 이를 설명해 보려 했습니다. 제자들이 환상을 봤다는 환상 가설, 예수님이 죽은게 아니라 기절했었던 거라는 기절설, 모든 것은 제자들이 꾸며낸 얘기라는 음모설 등 수 많은 자연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가설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설들은 역사학적인 검증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부활 가설만이 검증 기준을 통과 합니다.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서 부활 가설을 제외한 다른 가설들이 왜 역사학적 검증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왜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인지에 대해 촛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특히 세속 역사학자들이 부활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와 그 이유에 대한 답변을 같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활 가설에 대한 검증과 세속 역사학자들의 반론
역사학적인 검증에는 크게 4가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설명 범위 (Explanatory scope): 가설이 제시된 모든 팩트들을 다 효과적으로 설명하는가?
설명 능력 (Explanatory Power): 가설이 제시된 모든 팩트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
타당성 (Plausibility): 제시된 가설이 합리적으로 타당한가?
최소한의 임의성 (Ad-hoc): 제시된 가설에 증거가 없는 임의적인 가정이 최소화 되어 있는가?
기본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부활 가설이 3가지 즉 설명 범위, 설명 능력, 최소한의 임의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동의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부활 가설은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 후에 그 무덤이 비어 있는채로 발견되었음을 잘 설명합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게 되었는지, 특히 예수님과 크리스천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신약 비평가들이나 세속 역사학자들이 부활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혹은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자연적이지 않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설명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가의 여부에 대한 가장 큰 그리고 거의 유일한 쟁점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에 타당성이 있는가를 설명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은 타당성이 있는가?
저명한 신약 비평가 Bart Ehrman은 역사학자들은 과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기적은 가장 극도로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가장 극도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은 모순이다. 17 21 라고 주장합니다.
부활이 낮은 확률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수학적인 반론
저명한 신약 비평학자 바트 얼만은 6가지 팩트에 대한 다른 자연적인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부활은 기적적인 사건이기에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Bart Ehrman을 위시한 기적을 역사로 받아 들일수 없다는 주장은 다분히 수학적인 특히 확률론적인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수학적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실제 수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률이 낮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사건이어야 하는 확률은 아주 높습니다. 이에 대해 수학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2
우리는 지금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6가지 증거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Pr (R/E) 를 찾고 있습니다.
R 은 예수님의 부활
E는 관련 증거들
Pr (R)은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내부 확률(Intrinsic Probability)을 의미하고, Pr (R/E)는 관련 증거들을 통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확률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이스 정리 23 를 통해 다음의 확률 공식을 세울 수 있습니다.
Pr (R/E) = Pr (E/R) x Pr (R) / [Pr (E/R) x Pr (R) + Pr (E/Not R) x Pr (Not R)]
우리는 자연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확률이 낮다는 Bart Ehrman의 주장은 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증거들을 부활 가설이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즉 위에 설명한 6가지 팩트들을 부활로 설명하는 것의 설명 능력이 뛰어난가? 라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동의한다는 것 입니다.
즉 위의 공식에서 Pr (E/R)은 굉장히 높습니다.
반대로 위에 설명한 6가지 팩트를 부활 가설이 아닌 다른 가설들로 잘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세속 역사학자들은 그렇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William Lane Craig와의 토론 22 에서 Bart Ehrman은 자신이 실제로 일어났을것으로 생각하는 가설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다만 어떤 설명을 해도 부활이란 기적보다는 더 확률이 높을것이라는 관념적인 답을 할 뿐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위의 공식의 Pr(Not R) 즉 자연적인 가설의 내부 확률 Pr (E/Not R)은 둘 다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므로 [Pr (Not R) x Pr (E/Not R)]은 [Pr (R) x Pr (E/R)] 보다 낮고 그렇게 되면 베이스 정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조건적 확률은 50%가 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수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확률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수학적으로 거짓이 됩니다.
부활 가설은 자연적 가설이 아니라 초자연적 가설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이 기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사건의 확률이 낮다는 것은 자연적인 상황에서만 참이 됩니다. 하지만 부활 가설은 예수님이 자연적으로 살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로마서 10:9>
즉 생명의 창시자이자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예수님을 초자연적으로 살려내셨다는 것이 부활 가설이 주장하는 바 입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은 온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이 죽은자를 살려내신것이 불가능한지의 여부를 검토해야 합니다.
즉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입증해야 합니다.
첫번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 하나님이 존재하더라도 죽은자를 다시 살리실수 없다.
하지만 불가지론자인 Bart Ehrman은 역사학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24 그러므로 Bart Ehrman이나 위 두가지 논거를 모두 입증할 수 없는 역사학자들이 가질수 있는 가장 비평적인 위치는 예수님의 부활이 타당한지 모르겠다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상식적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약 이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다면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더 낮은 확률의 기적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했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역사학자들은 자동적으로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음을 믿습니다.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확률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10-78,991 25 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낮은 확률로 인해 역사속에 생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내세우는 가설 중에는 환각 가설이란것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글에 설명드리겠지만 수백명의 제자들이 단체로 똑같은 환각을 경험했다는 가설 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화학 작용으로 일어나는 환각이 다수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 시키셨다는 것을 믿지 않기 위해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가설로 세우고 있습니다. 모순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 안된다’는 논거는 여러 관점에서 부정됩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이 6가지 팩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우리는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6가지 역사적 팩트에 대한 부활 가설을 검증해 봤습니다. 부활 가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여러 사람들이 실제로 주장한 바이자, 역사학적 검증 기준을 통과한 유일한 가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과 관념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받아 들일수 밖에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위 6가지 팩트를 예수님의 부활로 결론내지 않는다면, 왜 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결론 내시겠습니까? 그 어떤 가설도 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전 인류의 죄값을 치룰수 없어서 사망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려고 시도하셨지만 실패하셨다는 뜻 입니다. 즉 나의 죄사함도 없고 난 죽어서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하지만 우리는 비참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던 원수 사망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고, 우리를 구원하
부활에 대한 명언
1.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 (k.바르트)
2.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w.카스퍼)
3.부활은 보이지 않은 멸하지 않은.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세계로의 탈출이다.(한스)
4.부활은 역사의 사실이오.그것 없이 역사는 신빙성이 없다.(피녹스)
5.부활은 진실한 광명의 표출이요. 의로운 자의 죽음 위에 있는 맑은 하늘이다.(부시넬)
6.부활의 메세지는 아직도 삼위의 하나님이 온 우주를 장악하고 계심을 일깨워 준다.(산더스)
7.부활이란 보이지 않은 이해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다.(한스)
8.교회가 예수를 확실히 영접할 때마다 거기에는 언제나 부활이 있다.(글러버)
9.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킨 능력이 또한 성도들 속에서도 활동한다.언젠가 반드시 성도들을 통해
부활의 능력이 증거될 것이다.(모리스)
10.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는 그 능력이 또한 그리스도인 속에서 지금도 활동한다.부활은 계속되는
작업이다.(모리스)
11.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날 소망의 중심이다 우리의 여행은 무작정의 상경이 아니요 죽음에서 생명과
영원에 이르는 여정이다.(맥캔지)
12.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소망의 본보기이기도 하다.(토마스 아담스)
13.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가결한 것이었다면 그의 부활도 불가결한 것이었다.(쉐퍼드)
14.기독교는 종교가 끝나는데서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죤 s 웨일)
출처: https://fingerofthomas.tistory.com/entry/예수님의-부활을-입증하는-6가지-팩트들[하나님이 살아계신 객관적인 증거들:티스토리]
고린도전서 15장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1.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1. 베드로전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 요한복음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부활 예화 58편 모음
1.부활(復活)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조그마한 장소에 모여서 자기네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땅을 망쳐버리려고 제아무리 기를 써보더라도, 또 그 땅 위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버리더라도, 석탄이나 석유, 연기로 그을려 놓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수목(樹木)을 베어버린다 하더라도 -도시에서도 봄은 역시 봄이었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 쬐자 풀은 되살아나서 송두리째 뽑아버리지 못한 곳이라면 가로수 길 옆 잔디는 물론이요 포석틈바귀에서도 파릇파릇 싹터 올랐다. 자작나무 백양나무 벚나무는 끈기 있고 향기로운 잎사귀를 벌리고 보리수는 빵긋이 벌어진 싹을 부풀려 올리고 있었다. 까마귀와 참새 그리고 비둘기들은 봄을 즐기는 듯이 벌써 보금자리를 마련하기에 바빴고, 파리들도 양지바른 담장 가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초목과 새들과 벌레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즐거웠다. 그러나 인간은 -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고 괴롭히며 또 서로 속이고 또 서로 괴롭히고 있었다. 인간은 이처럼 아름다운 봄날 아침을 신성하게도 귀중하게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자. 여기서 문제 들어갑니다. 위의 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작가의 유명한 책 처음 시작 부분입니다. 누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번쯤 읽었을 책입니다. 맞춰보세요. 2. 선녀와 나무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전 세계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나라마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재림, 그리고 성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뚜렷한 전달수단이 없던 옛날에 입에서 입으로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약간씩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기도 합니다. 하늘의 선녀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폭포에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덫에 걸려 죽어 가는 노루를 구해준 댓가로 노루가 알려준 대로 천사들을 발견하고 천사의 날개옷 하나를 감춥니다. 선녀는 하늘로 귀환하지 못한 채 결국 나무꾼과 결혼해 자녀까지 낳고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날개옷을 돌려받은 선녀는 홀로 하늘로 귀향해 버리고 나무꾼은 노루가 절대로 날개옷을 꺼내주면 안 된다고 했던 다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스토리는 서양버전입니다. 선녀가 자녀들을 양 옆구리에 끼고 하늘로 올라가고 이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된 선녀들이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긷자 나무꾼이 두레박을 살짝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스토리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양버전입니다. 한국 버전은 또 다른데, 하늘로 올라간 남편은 지상의 노부모가 걱정되어 선녀가 준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오지만 노모가 끓여준 뜨거운 팥죽을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용마가 놀라 도망가 하늘행을 포기하고 노부모와 함께 여생을 산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기독교 버전으로 바꾼다면 아마도 나무꾼이 노부모까지 용마에 태워 하늘로 데려간 뒤 온 가족이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의 여정이 바로 성도들의 천국행이 해피앤딩으로 끝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3. 3일의 비밀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의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하지요" 4. 나 보이니? 연예인들의 특성상 그들이 신앙을 갖기란 매우 힘들었는데, 각고 끝에 연예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제자들과 말씀하시는 장면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지요?" 미리 성경을 읽어오라고 누누이 말을 했건만 바쁜 일정에 누구도 성경을 읽어오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요.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이리 저리 휘저으며 유령 같은 몸짓으로 하는 말 "예들아~ 너희들은 내 몸이 보이냐?" 엉뚱한 말 한마디로 어색한 분위기는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엉뚱한 연예인이 바로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웃음은 사람에게 여유를 갖게 합니다. 5. 부활절의 첫 복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 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6.부활절 달걀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다. 로잘린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안착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다. 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 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났다. 소년은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그곳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가훈이 아닌가?"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7. 속이 빈 프리스틱 계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교회학교에 나오는 여덟 살짜리 소년 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이 많아 몸이 늘 아프고 힘이 들어서 늘 휠체어에 실려 교회에 나오는 소년이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톰의 교회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속이 비어 있는 플라스틱 계란을 주며 그 속에 무엇이든 생명이 있는 것을 넣어 오라고 했습니다. 부활절 아침, 아이들이 차례로 계란을 열어 보았다. 꽃이나 나뭇잎, 곤충 등 아이들은 생명이 있는 여러 가지를 준비해 왔습니다. 톰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톰의 계란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걸 본 몇몇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앓고 있는 톰을 동정해서 교사는 부드럽게 "준비하지 못했어도 괜찮아. 톰이 많이 아팠나 보구나."라고 위로하였습니다. 하지만 톰은 선생님께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생명을 준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잖아요." 이 소년은 10개월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그의 관에는 꽃 대신 빈 플라스틱 계란이 놓여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누우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득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 위기를 기회로 세상을 변화시킨 기독교 역동성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없는 박해와 도전을 만났지만 언제나 위기를 갱신의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정화하며 세상을 압도하는 생명력으로 변화의 주체가 됐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신앙의 초석이며 변화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 어떤 슬픔과 공포, 회의와 실망, 고통과 상처도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며 부활 복음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감격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자연 목사 9. 부활 증인과 증거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이다. 사도행전의 수백 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이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 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것은 없었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랐을까. 금생과 내세, 영육 간에 백에 하나도 유익이 없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설명이 안 된다. 안식일이 주일로, 할례가 세례로, 회당이 교회로 바꿔진 사회학적 이유도 부활의 역사성 이외에는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 /예수칼럼 : 김준곤 10.토마스 아놀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기독교가 2천년 후인 오늘까지 존재할 수 없고 점차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없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에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입증한 제자들의 진실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런 사람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 성경: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6) * 묵상: 나는 주님의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가? 11. 교회 힘의 근원 인도 수상 네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 참조: 마28:1-8, 요20:1-10 12. 스탈린이 부활할까 봐 스탈린의 유해를 국내에 안치하는 것을 꺼림직 하게 여긴 후루시쵸프가 드골에게 청해서 나폴레옹의 묘가 있는 앙바리드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드골은 앙바리드는 영웅을 모시는 묘지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워싱톤에 알아보았지만 앨링톤 묘지도 스탈린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영국의 영웅 이외에는 사절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에 부탁을 해보았는데, 뜻밖에도 학살자의 유해를 인수하겠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다만 회신 끝에 이러한 추신이 있었다. "믿을 만한 국제 통계에 의하면, 성스러운 이스라엘에서 사자(死者)의 부활은 그 확률이 세계 최고임을 알아주기 바람." 고민 끝에 후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유해를 그냥 소련 땅에 묻어 두기로 하였다 한다. 13. 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14. 부활 신앙의 부활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에 소련 부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다. 장례식의 말미에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때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 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인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이 순간, 여기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 이동원 15. 이디 아민 목사 1973년에 당시 우간다라고 하는 나라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이 독재자로 인해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그 가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그러시죠 뭐. 하지만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런다 아무 다른 기도가 없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기도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란다. 그 분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 금방 죽는다고 하지만 아무 두려움도 없다. 왜? 부활절 아침이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해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중 16 부활은 인류를 향한 최고 선물 스칸디나비아에 페드로라는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페드로의 어선은 나뭇잎처럼 표류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 페드로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과 기력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불기둥은 곧 육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드로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맞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통곡한 이유가 달랐습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그 생명의 불기둥은 바로 페드로의 집에서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껴안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여보, 고맙소. 당신이 실수로 불이 난 것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기등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집에 불을 내줘서 고맙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불기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까짓 초가삼간이 불타는 아픔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17. 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18. 그리스도인의 D-day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프랑스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합니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합니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로새서 2: 15)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19. 부활의 주님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요 산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예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을 찾을 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하는 천사들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요, 책 한 권 쓰시지 않으셨고, 번듯한 집 한 채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도 세상의 부의 주인이 되시며, 군사 한 명 없으셨으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20. 부활의 종교 해리 리머박사가 한 회교인 관리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도 관리는 대답하였다.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회교 관리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 또 리머 박사가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음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관리 역시 대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다시 한 번 강조해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 역시 또 대꾸하였다.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또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분의 말씀은 실제로 증거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는 말하였다. “우리는 죽은 이후의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21. 부활의 주님 성경: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을 잘 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부활절 성찬 김미자 집사의 남편은 말기 위암이었다. 암세포가 임파선까지 전이돼 의학적 치료는 끝난 채 임종만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두려웠다. 진통이 찾아올 때는 더욱 두려웠다. 그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김 집사가 부활절 성찬예배에 참석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자기 몫의 성찬을 챙겼다. 떡은 손수건에 싸고, 포도주는 작은 병에 담았다. 성찬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편에게 성찬을 내밀었다. “여보, 오늘 부활절 성찬입니다. 당신을 위해 내 몫을 받아왔어요. 이 떡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 영생하라고 주신 주님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주님의 피랍니다.” 남편은 아내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았다. 기적이었다. 평안이 오고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김 집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성찬은 그렇게 받는 것 아닐 텐데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23. 부활의 기쁨 성경: 요한복음 20:19-29 * 찬송155장 첫 부활주일은 큰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모든 눈물을 거두어 주신 날입니다. 수난 금요일은 말 그대로 눈물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많은 여자들뿐만 아니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곡하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부활 주인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가까이 와서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일 때에 그들의 기쁨은 말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실 그들의 눈물만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이 땅 위에 뿌려진 인류의 모든 눈물을 거두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리겠느냐?" 하는 의문은 욥기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은 이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대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도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리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 기도: 이 부활주일의 기쁨을 생각할 때에 우리 가정에 새로운 승리, 새로운 기쁨의 크신 은총을 더하여 주옵소서. 24.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한태완 목사(예화포커스) 25. 부활 찬송과 루이 14세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죄로 세오졸프라는 사람을 체포하여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26. 부활의 새로운 역사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27.부활의 향기 백화점 야채코너보다 재래시장의 채소 난전이 더 자연스럽다. 다듬어져 하얀 살을 내보이는 정돈된 야채에 비해 재래시장에 펼쳐진 봄나물이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엉클어져 자유롭고 편안함이 봄기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봄나물에서 지난겨울 부산하게 맨몸으로 땅을 뚫고 올라온 흔적이 보이는 듯하여 애착이 간다. 거친 흙을 뚫고 올라온 연한 줄기들은 예수의 부활을 닮은 것 같아 행복하다. 나물의 새순들이 땅속에서 딱딱한 흙을 뚫고 나오는 것을 지레 포기했다면 생의 향기는 기대할 수 없고 땅속에서 썩고 말았을 것이다. 봄나물은 생명이 있어 엷은 향이 우러나온다. 된장을 풀어 끓인 달래와 냉이국은 저장된 음식의 입맛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 좋다. 예수의 부활은 절망이 희망의 향기로, 죽음은 부활의 향기로 다가왔다. 성경에서 부활의 메시지는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메시지인가. 부활이 있기에 내일이 있고 부활이 있어서 살맛이 난다. 봄나물이 봄의 향기를 전하듯 부활의 소식은 삶의 향기를 전함이다. /정종기 교수 28. 부활의 역사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퍼전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퍼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스퍼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다.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퍼전은 이렇게 설교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 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29. 한 가지 소식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당신의 삶속에 진정 부활의 기쁨이 있는가? /이영무 목사<영신교회> 30. 부활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 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 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 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31.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쌔(마태복음28: 1- 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5-26)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3:14- 1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15: 12- 21)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 : 20) 32. 부활에 관한 금언 기독교는 종교가 끝나는데서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죤 s. 웨일) 복음 서신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부활이 복음 서신들을 설명한다.(죤 s. 웨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믿는 것은 오직 그의 부활의 완성된 사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파운스 박사)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좋으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더욱 선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 속에 부활시킴은 더욱 선한 일이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마다에도 쓰셨다. 주님의 왕관에서 빛나는 금강석은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마침내 천국의 불멸하는 존재들에게 내린 은총으로 부활한 모든 인간의 영혼에까지 다다른다.(마르틴 루터) 33. 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신혼초기 가난하고 완고한 시집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어느 크리스천 미술인의 고백. 이 분은 쥐꼬리만 한 남편의 교수 월급으로 시동생들의 학비까지 보태며 살림해야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날 목회자는 "순교가 따로 있겠습니까. 시집에서 순교하겠다고 생각하고 생활하세요. 시집에서 관에 누워 나오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분은 큰 힘을 얻고 모든 어려움을 이겼다. 34. 텅 빈 계란과 예수님의 무덤 날 때부터 몸이 꼬여진 상태에다 정신박약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그는 12살이었지만 아직도 2학년에 속해 있어서 담임선생 도리스에게는 언제나 큰 부담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몸을 뒤틀거나 시끄럽게 하여 다른 학생에게 지장을 주며, 학습을 자주 방해하는 것이었다. 도리스 선생은 지미의 부모를 학교로 오라고 하여 이 일을 상의하게 되었다. 도리스 선생은 “왜 아이를 특수학교에 전학을 시키지 않는가?”고 부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지미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사무엘의 아버지가 말을 했다. “선생님, 사무엘를 위한 특수학교가 이 근처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미는 이 학교와 친구들을 몹시도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아이를 먼 곳의 다른 학교로 보내면, 그것은 아이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얼마 살지 못할 아이를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봄 수업시간의 일이다. 부활절이 가까워 오는 날이었는데, 도리스 선생이 플라스틱으로 된 계란들을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서는 19명의 아이들에게 그 플라스틱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 계란의 중간을 열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 플라스틱 계란은 절반으로 잘라지며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무엇이든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그 속에다 넣어 가지고 다음날 학교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튿날, 학생들이 계란을 모두 선생님의 책상에다 갖다 모아 놓았다. 선생님은 한 개씩 열기를 시작했다. 계란 속에는 예쁜 꽃과 물 등 갖가지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는데 한 가지만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무엘 것이었다.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는가라고 했더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빈 것이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다시 지미에게 물어보았다. “사무엘, 왜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었지?” “네 선생님,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를 무덤 속에서 살려냈어요!” 석 달 후에, 사무엘은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관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19개의 텅 빈 플라스틱 계란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35. 안식일에서 주일로 제1차와 2차 유대인 반란 사건 사이에, 회당과 교회는 안식일 예배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 안식일 논쟁은 교회가 유대교 구조 안에서의 그의 본래의 자리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시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역사적 예이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안식일과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모세의 율법에 대해 기독교가 거부함으로써, 기독교는 이스라엘도 거부했다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내보냈다. 비록 초기에는 안식일을 지키긴 했지만 때가 되자 교회는 예수가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드리기 시작했다(참조, 마28:1).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 일요일이 로마인들이 태양신 숭배와 연관하여 거룩히 지키는 날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Ignatius)는 이러한 변화가 A.D.115년 이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그네시아인들 (Magnesians)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그들에게 "더 이상 안식일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게 된 날, 곧 주님의 날을 위해 살 것"을 말하고 있다. A.D. 120년경에 씌어진 교회 훈련 지침서 디다케(The Didache)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날에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다. 36. 부활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인도의 전총리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37.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히브리어의 `유월절'의 의미인 "파스카(Pascha)" 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 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북부 유럽에서는 봄에 "이스트르(Eastre)" 축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시기에 "파스카(Pascha)"를 경축하였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이 파스카 축제를 "이스터(Easter)"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 `파스카'를 `이스터'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봄, 빛의 영광됨이 의미상 일치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파스카는 거룩한 주간으로 지켜졌다. 부활주일 전 주일은 종려주일로 정하고 주님의 승리의 입성을 기념하여 저녁 때 성도들이 감람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호산나'를 불렀다. 목요일에는 `성만찬'과 금요일에는 `성 금요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고난과 관련된 금식을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절 축제는 부활하신 그 날만의 축제가 아니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의 고난 주간과 연결되어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부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여야 부활의 기쁨이 보다 크게 체험하는 것이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 후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38 부활절 계란 그림의 유래 부활절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은 유럽에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을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전쟁에 나간 뒤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산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친절로 생활했다. 부인은 이 친절에 보답하려고 부활절을 즈음해,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계란에다 로자린드 집의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써 넣었다. 이 계란을 받아든 한 소년이 병든 군인을 보고 잘 간호해 준 다음, 계란을 주었는데 이 군인은 그 계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란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그 군인의 가훈이었고, 그 군인이 바로 로자린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인은 수소문 끝에 자신의 부인과 함께 만났다. 그 이후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 부활절 주일에 색 계란이 선물로 나눠지게 되었다. 39. 게으름뱅이 배추벌레 게으름뱅이 배추벌레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누런빛 몸뚱이를 꿈틀꿈틀거리며 아주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긴 여행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더욱 아닙니다. 꿈틀...꿈틀...꿈틀... 마디마디 이어진 몸뚱이를 움츠렸다 폈다하면서 넓은 신작로를 건너야하는 여행길입니다. 가는 곳은 저 길 건너 숲속입니다. 오래지 않아 추운 겨울이 오겠기에 나무 위에다 누에 집을 지으려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여행길은 그리 쉽지 않았어요. 조심성 없는 어린이들의 발꿈치, 쉴 새 없이 오가는 짐차들의 바퀴. 그런 것들에게 밟히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길 건너 예쁘게 피어 있는 노란 들국화를 보니 힘이 솟았어요. 다섯 밤이나 지나서 배추벌레는 겨우 넓은 행길을 다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어요? 5일 전 멀리서 보았던 국화꽃님이 이젠 다 시들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어요. "얘, 들국화님이 어디 갔지?" 배추벌레는 울먹이며 종달새에게 물었습니다. "들국화님은 돌아가셨어요." "만나보고 싶었는데……" 종달새는 다시 노래하듯 말했어요. "또 살아날 걸 뭐……"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배추벌레는 그 말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게 살아나다니 그럴 수가 '하는 수 없이 이번엔 푸른 풀밭을 찾아보았어요. 포근한 풀밭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배추벌레야, 풀잎들도 모두 죽었단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겠지." 이번엔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며 속삭였습니다. 다시 능금나무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능금나무도 시들어 있었습니다. 그만 눈물이 콱 솟구쳤어요. "얘야 울지 마, 난 다시 살아날 거야." 마지막 능금나무 잎이 땅에 떨어지며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배추벌레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배추벌레는 슬퍼하며 나무 가지 사이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만 누에 집입니다. 바람이 차츰 차가와져서 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이윽고 새하얗고 둥근 집이 지어졌습니다. 피곤한 몸이 차츰 추워왔습니다. 외롭기도 하였어요. 배추벌레는 누에 집 속에 들어가 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왠지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몸이 자꾸 얼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것 봐라 애벌레도 죽었어! 집 속에 들어앉아 죽었어?" 바로 앞을 지나가던 어린이들의 목소리였지만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애벌레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 있는데……"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왠지 그 소리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리곤 자꾸 졸리기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하얀 눈을 몰아 왔습니다. 눈이 펑펑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리곤 긴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차츰 햇님의 살결이 따뜻해졌습니다. 바람도 부드러워지고 눈도 녹아내렸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땅이 따스해지니까 땅 속에서 잠자던 씨앗들이 기지개를 폈습니다. 새싹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능금나무 가지에도 순이 돋았습니다. 애벌레가 들어있는 누에 집에서도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애벌레가 살아났다! 애벌레가 다시 살아났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속삭이며 지나갔습니다. 누에집이 깨지면서 배추벌레가 살아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누렇고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눈부신 날개를 지닌 예쁜 것이 아니겠어요? 금색, 까만색 그리고 빨간 점들…. 무엇일까요? 네 그래요. "나비님. 나비님" 종달새가 예쁜 목소리가 불렀습니다. "난 배추벌레였는데, 왜 날 보고 나비라고 부르지?" "얘, 이젠 너 벌레가 아니란다. 넌 다시 살아난 거야! 자 나비님, 인사 받으세요. 어서…." 40. 애벌레와 잠자리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 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41.생명보다 귀한 것 "의식(衣食)이 족하여야 예절을 한다."고 맹자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예절은 의식 전에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식물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음식물을 준비합니다. 남극탐험에 나선 Robert Falcon Scott 일행은, 음식물에 결핍된 때, L.E. Grace Oeates 소령의 희생에 의해 구원되었습니다. 오트 소령은 대원 한 사람이 음식물을 많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전원이 기아사멸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밤중에 몰래 천막을 빠져나가 스스로 동사(凍死)했습니다. 그의 경우, 예절을 알아 대원의 식물을 보급했습니다. 예절은 식물에 선행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전집 13권 39 42. 그리스도 석가는 자기가 죽는 때에 "나는 죽으나, 내 가르침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3)고 하시고, 그대로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계십니다. 다만 그 교훈이 남는다든가, 그 사업이 계속된다든가 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살아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국립 제1은행의 창립자인 실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찌(1840-1931)씨가 구미여향을 마치고 돌아와서 귀국 담을 하고 있는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연쇄점을 창시하여 성공한 워너메이커(1838-1922)를 만났을 때입니다. 워너메이커는 열심 있는 크리스찬으로, 주일에는 상점을 쉬고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체신장관이 되어달라고 한 때도, "교회학교 교장을 하고 있으므로 주일에는 직무를 수행치 못할 것인데 그래도 좋으면 장관직을 수락하도록 하지요"하고 말했을 정도의 열심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어서 시부사와씨가 방문한 때도, 교회로 인도해 가서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 유명한 일본의 실업가의 이야기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때 시부사와씨는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 동양에도 위대한 성인인 공자가 있습니다. 그 공자라는 분은..." 하고 이야기를 끝냈는데, 뒤에 워너메이커는 학생들을 향해 "공자는 훌륭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으나, 공자는 죽었습니다. 그 무덤이 있고 참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의 구주로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십니다"라는 뜻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시부사와시는 미국의 회상으로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 워너메이커씨가 열심으로 예수는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한 광경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실로 예수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2천 년 전의 예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호소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43. 부활 복음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1)동일성(identity):이것이 중심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장사 지낸바 바로 그 예수다. 2) 연속성(continuity): 예수께서는 육체적 감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신체의 형태로 부활하셨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도 부활의 육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3)비연속성(Discontinuity): 비록 육체적 부활을 하셨지만 그 신체는 이전과 똑같은 신체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력을 소유한 변화된 몸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하는데서 더 분명해진다(고전15:20). 첫 열매란 오늘 우리에게 별로 명확한 뜻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이것이 전달하는 의미가 매우 생생했을 것이다. 첫 열매는 추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실제적인 추수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곧 풍성한 수확을 하려는 추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라 함은 1) 신자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이제 희망 이상의 한 사건이 된다. 모든 것이 이 사건에 달려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 함은 우리의 부활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그의 부활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준다.(빌3:21, 고후5:4) 44. 부활을 설명한다면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45. 부활 부활에 반대하는 주장, 즉 부활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논의를 살펴봅시다. 한 가지 논의는, 4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모순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에루살렘 근처라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말을 전해준 사람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말을 전한 사람은 "한 젊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젊은이"가 무덤에서 말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사람은 "천사 하나"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두 천사"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이나, 틀림이 있는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확실히 모순이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어떤 드라마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이고, 사건의 외관 문제일 뿐이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중심 내용에 관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비유로써 생각해 봅시다. 세 사람이 축구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갑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을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아무개 선수는 매우 지저분한 선수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선수가 다만 지나치게 열심히 싸우더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하면, 심판이 훌륭했다고 보는데 반해, 한 사람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생각이나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득점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형식을 변경할 수는 있으나, 얻은 점수만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보는 관점 외관, 그것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라는 사건은 시종 불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젊은이"가, 요한복음에는 "두 젊은이"로 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주후 60년경에, 요한복음은 주후 1백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40년간, 이야기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면, 도중에 그 이적에 대해서 점점 구체적이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는 시종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은행가 제임즈 호프 심프슨경과 수표 및 수표의 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일한 사람에 의해 싸인 되었다."고 생각되는 두 장의 수표를 손에 넣고, 이것을 햇볕에 비추어 보고, 받쳐보고서, 전혀 틀림이 없고 1미리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두개의 싸인이 일치될 경우면, 그 중의 하나는 위조수표라고 믿어도 틀림없습니다.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똑같이 두 번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학교의 교사는 두 소년이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듣거나, 대학에서 두 학생이 꼭 같은 답안을 제출했을 때는 이것을 진실이 아닌 공모나 합작인 것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이야기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될 때, 반드시 틀리게 마련입니다. 그 틀림과 모순이야말로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사람의 창작이었다면, 계산이 조금도 어긋남 없게 조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향대로 계산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그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William Barclay, A New People's Life of Jesus 46.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47.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소망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 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48. 생명과 부활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로 인해 모든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49.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 로마의 바티칸 궁정에는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Picta)라는 조각품이 있다. 그 작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이탈리아의 어떤 정신병자가 그 조각을 파손시켰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경비를 들여서 보수하였고 지금은 유리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그 조각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이틀 전까지 조각했다는 걸작품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그 작품의 모습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할 수 없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다. 부활의 진리를 기독교의 중심 되는 내용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람세이(A.M.Ramsay) 교수는 말하기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복음은 결론이 없는 복음일 뿐아니라 전혀 복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 (Thomas Anold)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변정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두 사람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도 더 이상 이에 대한 반증을 할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죄인임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부활사실을 부인하기 위하여 연구하던 무신론자들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세력은 다 망했으나 부활의 진리를 증거 하는 교회는 언제나 살아 역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50. 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51. 한 가지 소식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당신의 삶속에 진정 부활의 기쁨이 있는가?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마태 28:8) 52. 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부활신앙은 우리들에게 새로워지는 기대감에 찬 생활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을 무력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낡음의 문제입니다. 험난한 세파에 치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낡음의 관념에 시달리는 이들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힘을 줍니다. 다른 교리와는 달리 부활신앙은 지하수처럼 우리 인격의 저변을 흐르면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생기의 근원이 됩니다. 53. 부활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 : 20) 1973년 부활절 아침. 이디 아민대통령의 독재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우간다의 한 교회. 셈판기목사는 7천여명의 신자들에게 부활절 설교를 했다. "부활의 주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정의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자." 설교를 마치고 목양실로 돌아온 셈판기 목사에게 5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그들은 목사에게 총을 겨루었다. 그 때 셈판기 목사가 말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이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다만 당신들을 위해 2분 동안만 기도하게 해주시오." 셈판기 목사는 5명의 괴한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들은 자신이 범하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옵소서."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괴한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괴한의 우두머리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목사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기도가 괴한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극복이고 해방이다. 목사의 삶은 육신에 대해 죽은 자의 삶이다. 54. 빛을 사모하는 태아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데살로니가전서 5 : 5-6) 갓난아기는 보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분만할 때 쓰이는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미루어, 이것은 능히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램프와 투명조명을 갓난아기에게 비추어 댑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못 본다고 믿으니 사정 볼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명은 분만을 담당하는 의사들에게는 분명히 편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에게는 어떠할까요? 아기의 머리가 겨우 엄마의 질강을 빠져 나오려 할 때, 동체는 아직도 모체 안에 있는데, 아기가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간 이내 감습니다. 갑자기, 그리고 꼬옥, 그리고는 그 자그마한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며 귀에 익은 울음을 터드립니다. 만일 본다는 일이 광선을 파악하는 일이라면 아기는 분명히 봅니다. 마치 식물이나 꽃이 빛을 그리워하듯 아기도 본능적으로 빛을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만일 임신 6개월의 여성이 맨몸으로 태양광선을 쏘인다면 뱃속의 아기는 그것을 황금빛 아지랭이로 볼 것입니다. 55.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절대 사건이었다. 『일요일 아침 천하의 교회 종소리를 듣는다. 저것은 로마의 사형수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이 말은 니이체의 말이다. 니이체의 이 말은 공허한 말이다. 예수의 부활은 태양 같은 증거들이 있고 진실한 증인들이 있다. 1.역사(歷史)의 증거(證據) 인류사는 AD와 BC,즉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연호를 쓴다. 예수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분수령이고 원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2.성경의 증거 책 중의 책이고 영원한 생명의 책인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예수가 중심이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전 15:3)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 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절기 때 운집한 수백만 유대인들에게, 유대 천지에 그것을 공언 했다. 예수님의 사역 중 죽은 자를 살리신 증거가 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주셨다. 부활의 능력을 실증하신 것이다. 3.사도들과 제자들의 증거도 있다. 사도행전의 사도 자격 요건은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이어야 했고 (행1:22)사도행전의 기독교인은 부활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통했다. (행4:2)이들은 거짓말을 못해 순교한 사람들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기독교 박멸운동을 하던 사람인데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후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4.원수들의 증거가 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국인 로마의 국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두 국권 당국이 골치 아팠던 것은 산 예수보다 부활한 예수 운동이었다. 그것을 초전 박살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시체를 찾아 공개하는 일인데 그 반증을 제시할 수 없었다. 5.군중들의 증거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처형 사건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가 나귀 타고 입성할 때 예루살렘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연호했다. 그랬던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사형수로 처형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같은 군중이 불과 50일 이후 같은 도시에서 그 예수가 부활했다는 메세지에 3천명,5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바로 심증이 갔기 때문이다.
로그인 회원가입
교회예배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
교회여 일어나라
부활의 증인 (행 1:8, 고전 15:12-15)
광성교회
http://www.ksch.net/NewPreach/2337
2014.04.2013:34:02 (*.126.225.122)
1170
2014. 4. 2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13)
본문 : 행 1:8(고전 15:12-15)
제목 : 부활의 증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우리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에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와서 세례를 받고 정식 회원이 되려면 학습교인이 되어서 6개월 혹은 1년간 교육도 받아야 하지만 정말로 기독교인답게 사는가를 관찰한 다음 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행할 때 세례를 베풀고 정식 교인이 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기준을 살펴보면 매우 엄격했습니다.
축첩을 하고 있던 사람은 정리를 해야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양반들이 첩을 두는 것은 보통으로 있었던 일인데 기독교인이 되려면 정리를 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해야 했습니다.
주일날 일을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락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도 하지 않아야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초문제도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했고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담배도 금해야 한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무속신앙에서도 벗어나야 하고 그 외에도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바르게 해야 교인이 되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처음 복음을 전하면서도 우선 대강적당하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게 하지 않고 이렇게 철저하게 했을까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 초기 미국선교사들은 청교도의 후예들로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을 그대로 적용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당시의 선교사들은 미국의 중류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생활도 윤택했고 대학교육도 받았던 엘리트 집단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와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문화 모든 면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렇게나 전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사람이 없었고 대부분이 다른 목적으로 교회에 왔기 때문에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선교사들은 돈도 많았고 사는 것도 잘 살았고 선교사들하고 잘 친해 놓으면 도움을 받는 것도 많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을 가진 줄 알고 잘 대해주었는데 나중에 도움만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선교사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된 신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게하고 그 것을 기준으로 세례를 베풀고 정식 교인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있는 성도들도 한번 점검을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별로 제약을 받는 것이 없으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데 정말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교회를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교회에 다니는지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조사해보면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육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진리도 잘 모르고 맹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때처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불합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와 계시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알 수도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증인으로서의 삶도 살지 못합니다.
그것도 고난을 당하면서 순교를 각오하면서 까지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면 교회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부활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고난의 증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활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많은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온 인생을 다 바쳐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쳐서 증인이 되고자 했던 것은 이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해준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을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사실이 성경대로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하신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지도자들이 입만 열면 외치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그 부활이 바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다른 말을 하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생애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걸쳤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가져다 놓아도 모든 병이 다 고쳐지는 그런 능력을 받았던 사람이 뭐하려고 그렇게 고생하면서 구차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했겠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부활의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난의 증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산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부활이 아닌 다른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을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목사 자신이 부활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우리 성도들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시한 세상의 것들을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이 세상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목회를 하고 성도들에게도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고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말은 부활도 믿고 세상의 행복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부활한 몸으로 살 것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부활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핵심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나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깝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도 믿지 않고 성도들의 부활도 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원리에 대해서 35절 이하에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15:35)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묻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다시 나오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씨 뿌림의 원리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했습니다.
씨앗이 일단 땅속에 들어가서 썩으면 거기에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런 원리가 부활의 원리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고 난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면 죽지 않은 상태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영광을 누리겠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단 죽음을 맞이하고 그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면 죽지 않고 부활의 몸으로 변화한다거나 하늘로 바로 승천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생활 잘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타락한 인생은 그 법칙에 따라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해 주셨는데 성도의 구원도 죽음 이후에 부활하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씨를 뿌리는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부활의 단면을 보고 알게 하셨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썩으면 다시 살아나서 새 생명으로 자라는 것처럼 우리도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2)모든 씨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40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식물의 씨앗을 보면 대개 그만그만하고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식물로 나올 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따로 있어서 그 영광도 하늘에 속한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도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을 하지만 다 같이 하나님나라에 속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갈 영혼은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을 하겠지만 지옥에 갈 영혼은 지옥에 가서 살 몸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새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만 그런 특별한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3)영광스러운 부활
42절 이하에 죽은 다음에 부활할 우리의 몸이 지금의 몸과는 다른 모습으로 부활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42절)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이라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썩어서 흙이 될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몸은 이런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도 않고 다시 썩지도 않는 완벽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절)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은 욕된 것이고 연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은 몸이고 나약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건강하게 이렇게 여기 앉아 있지만 세균 한마리만 침투를 해와도 병들게 되는 연약한 몸입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약해지고 결국 늙어서 죽게 되는 비참한 몸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게 될 몸은 영광스러운 것이고 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한 상태에서 다시 받은 몸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몸이고 다시 병들거나 늙거나 죽거나 하는 일이 없는 강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일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몸은 너무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광스럽고 강한 몸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권능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면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비밀은 미스테리온의 비밀입니다. 신비한 비밀입니다.
누구나 다 알 것 같은데 특별한 사람만 알게 되는 비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다 부활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따갑도록 설교를 듣고 들어도 부활을 믿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한 우리들에게만 주시는 권능이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는 사람만 믿을 수 있는 비밀이요 권능이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까지 훈련시키시고 때로는 고난도 당하게 해서 믿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특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턱도 없는 말을 믿으라고 한다면서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종교라고 하면서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고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니고 그렇게 연구를 많이 했으면서도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의 핵심인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그들이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4, 15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우리가 믿는 믿음도 헛된 것이고
우리가 거짓증인일 뿐이고 사기꾼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은 성경의 핵심이고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갖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대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능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끝까지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함께 부활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게시물을
20140420_주일오전예배 - 2014. 4. 20. 오후 12.24.m4a (22.92MB)(108)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설교날짜
공지
설교가 나오지 않을시 참고 하세요.
관리자
621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행 1:23-26)
광성교회
2014-06-15
620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 (행1:20-22)
광성교회
2014-06-08
619
베드로와 유다 (행 1:15-20)
광성교회
2014-06-01
618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2-14)
광성교회
2014-05-25
617
예루살렘 다락방의 모임 (행 1:12-14)
광성교회
2014-05-18
616
순종하고 공경하라 (엡 6:1-3)
광성교회
2014-05-11
615
갈릴리 사람들아 (행1:8-11)
광성교회
2014-05-04
614
증인의 행복 (행 1:8)
광성교회
2014-04-27
부활의 증인 (행 1:8, 고전 15:12-15)
광성교회
2014-04-20
612
고난의 증인 (행 1:8, 히 12:1-2)
광성교회
2014-04-13
611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광성교회
2014-04-06
610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 1:8)
광성교회
2014-03-30
609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행 1:8)
광성교회
2014-03-23
608
예수님과 삭개오 (눅 19:1-10)
광성교회
2014-03-16
607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행 1:6-8)
광성교회
2014-03-09
606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5)
광성교회
2014-02-23
605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행 1:3)
광성교회
2014-02-16
604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 1:3)
광성교회
2014-02-02
603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심 (행 1:1-2)
광성교회
2014-01-19
602
행하시며 가르치신 예수님 (행 1:1-2)
광성교회
2014-01-05
목록
쓰기
첫 페이지 21 22 23 24 252627 28 29 30 끝 페이지
검색 취소
세 종류 예배자
1)웃사의 예배
2)미갈의 예배
3)다윗의 예배
적용)
1)내 생각, 내 방식대로 믿음생활 한 나의 예배는 무엇이 있습니까?
2)예배드릴 때 미갈의 모습은 나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3)다윗처럼 주일이 되기 전부터 기대와 사모함은 언제 있었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 설교 ,,,후
⑮ 2,3부 통성신유..,, 완전하신 나의 주 의의 길로 날 인도
⑯새가족 환영회 --(*영접기도*) -
⑰헌금기도--- 2부- 담임목사 기도
(3부) 송지현 권사
⑱헌금찬양-:헌금송 2부: 2부 -찬송161-할렐루야 우리예수
https://youtu.be/THOBJkby5NM
헌금송 3부: 남성 3구역
⑲2.3부 ...광고.... 박정화 지휘자
광고 - 광고- 광고말씀 드립니다.
*오늘 우리 교회 처음 나오신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음 주일은 성찬 주일입니다.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로 준비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몫인 성미도 꼭 부탁 드립니다/.
*드디어 4월 5월 “행복동산(알파코스)” 진행 합니다. 누구나 다 참석을 하셔야 합니다. 총 8번 주일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꼭 반드시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오늘 접수 마갑 합니다. 특별히 오늘 초청장 받으신 분은 VIP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여 꼭 참석 하시길 바랍니다.
*2024년 그림전도를 한 사람이 100명에게 정식으로 1-3과를 전파 합니다. 이 일에 모두모두 열심히 동참 바랍니다.
*또, 한 주간도 부활의 생명으로 건강하시며,31일 부활절 특별히 한 분 이상 초청하여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부활절 봉투 기억 하시고, 헌금 ,,
*알파코스 ( 11시 예ㅐ비후 알파 경험자 반드시 잠시 남아주세요
8** ,,,
광고영상
(알파접수라도 꼭 꼭 하셔야 합니다) --- 1만원 접수비 체크
(일어서서)헌금축복기도 — – 담임목사
주기도송 대신 –*( 너무나도 아름다워라 )
축도 — 마지막 소절에 강단 커텐 열림
좋으신 하나님
부활의 증인들
적용)
1)오늘 설교중에 부활이 안 믿어지는 부분은 어떤부분입니까?
2)예수님의 죽음심과 부활하심을 언제부터 확실히 믿어 지시십니까?
3)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에 죽음,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로 믿어 지십니까? 그렇지 못하면 왜 그렇습니까?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