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멸과 죄의 문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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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여호수아 6:21(구약 327쪽)
설교제목: 진멸과 죄의 문제에 관하여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성경을 읽다가보면 가끔 당황스러운 구절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도 그러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의 정복을 명령하셨고 그 첫 전투로 여리고성의 정복을 명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언약궤를 앞세우고 매일 같이 여리고 성을 돌고 7일째에는 7번 성을 돌고나서 큰 소리로 외치면 성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에 들어가서 남여노소 심지어 가축까지 모두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명령은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인데, 오늘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 명령만 놓고 보면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분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함에 있어서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노인이나 어린 아이까지 심지어 사람도 아닌 소와 양도 죽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은 대체 왜 이러한 잔인한 살육을 명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꽤 풀기어려운 난제인데요. 보통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전쟁은 이른바 거룩한 전쟁이었고 이른 일반적인 전쟁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쟁의 목적이 달랐다는 것인데요. 보통 전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상대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전쟁은 그 목적이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릅니다. 어떤 것을 빼앗고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구절처럼 남여노소 그리고 가축까지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전쟁을 왜 해야하는 것인지에 관해 의구심을 줄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거룩한 전쟁 곧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보통의 전쟁과는 다릅니다. 적어도 무엇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성경구절에서는 ‘바치다’라고 표현했고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진멸’이라고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렇게 헤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데요. 이것이 거룩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성전의 목적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전쟁의 목적은 상대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것은 보통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민스러운 문제는 왜 하나님은 싸그리 죽여서 바치라고 했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이 시간을 통해 소개해드린 몇몇 실험과 그에 바탕한 인간에 관한 이해를 통해서입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죄를 짓게 되는가에 관한 실험입니다. 이것에 관해서 한 미국의 한 심리학과 교수가 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깨진 유리창 이론’이란 것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 실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차를 한대 방치해 두고 트렁크를 열어 두었습니다. 이 차를 일주일 동안 방치해 두었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같은 곳에 똑같은 차를 두었는데 이번엔 트렁크를 여는 대신에 차 유리창 하나를 깨두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을 방치해 두었는데 이전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차에서 배터리와 카오디오 네비게이션을 훔쳐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차에서 훔쳐갈 것이 없자 차를 박살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밝혀진 것은 이렇습니다. 범죄라는 것이 전염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트렁크가 열린 차를 보고서 주인이 차 트렁크를 열고 갔다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유리창이 깨진 차를 보고서는 누군가 뭘 훔쳐갔네라고 생각하면서 그 차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이때 다른 사람도 뭘 훔쳐 갔는데 나도 좀 훔치면 어떻겠어?라는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실험을 설계한 교수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범죄라는 것이 나쁜 놈들만이 행하는 일이 아니라, 환경만 갖춰지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그가 꼭 악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죄를 저질 수 있는 유혹을 받게 될 때 그것은 누구든지 범죄하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무서운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셨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남들 몰래 여리고성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집에다 숨겨둔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밝혀져 아간의 식구들 역시 진멸되기에 이릅니다. 저는 이 장면 또한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눈 앞에 보이는 좋은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서 좀 실수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렇게 온 가족을 몰살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진멸해야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해드린 ‘깨진 유리창 이론’을 다시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쁜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할 수 있는 환경이 우리를 범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범죄할 수 있는 환경과 그 여지를 남겨두면 우리는 언제나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길이 됩니다.
언젠가 들었던 이찬수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분은 현재 분당우리교회라는 꽤 규모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한 번은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여자 성도분과는 악수를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저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약간 우습게 여겨졌습니다. 이른바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아주 만약에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어리석은 마음을 품을까봐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더욱더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람이 언제 죄를 짓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렇게 가볍게 여길 사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라는 것이 언제 어느 때듯 우리를 유혹할 수 있고 우리는 그 유혹에 언제 어느 때듯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는 괜찮다고 나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죄의 위험은 더 커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저도 이찬수 목사님처럼 여자 성도분과 악수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보다 철저할 필요가 있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잘 살피고 잘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언제나 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와 같은 연약함을 아시고 다소 잔인해 보일 수 있는 진멸 곧 헤렘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수행된 사건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명령 또한 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교훈하는 것이기에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에 자만하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서 내 삶에서 죄를 가져다주는 것을 진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트리고 훼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잘 살피면서 우리의 죄의 문제 앞에 겸손히 설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쁜 사람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죄의 문제 넘어질 수 있는 나를 인정하고, 늘 주의 말씀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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