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의 반응(마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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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제목 : 회개,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의 반응
본문 : 마태복음 4장 17절
1. ‘미안해’라 말하는 아엘이, 진짜 회개인가 눈가림인가?
1) 배운대로 행하는 아엘이
‘아엘이가 없었으면 설교 어떻게 쓸 뻔했어?’ 라는 생각을 요즘들어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의 문을 열 때마다 ‘아엘이와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먼저 떠올려 보기 때문입니다. 아니, 떠올려 보고자 안해도 그냥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설교의 문을 아엘이와 함께 열고자 합니다.
아주 작았던 이 친구가 어느새 자라 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며, ‘크느라 고생했다’는 생각이 절로 나옵니다. 특히 가르친 말들, 가르친 행동들을 잘 따라하고 또 혼자 용캐 해내는 것을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그런 아엘이가 요즘 꽂혀 있는 것은 감사하게도 찬양입니다. 들어는 보셨나요? 어린이 찬양 중에 ‘앗 뜨거워’ 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 그 크신 사랑 태양보다 더 뜨거워’ 이걸 아엘이는 ‘앗 뜨거워 주님!’ 이라 말하며 나름의 율동과 함께 찬양하곤 합니다. 제 딸이지만 참 대견합니다.
2) 배운대로 행하는 척하는 아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아빠와 딸의 스토리로 끝날텐데, 메인 스토리는 지금부터 입니다. 아엘이가 손을 좀 자유롭게 쓸 때부터 저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친 적도 없는데 사람을 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좋다고 ‘꺄르르' 웃는 모습을 보며 ‘진짜 악하다’ 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때린 부위를 쓰다듬으며 ‘미안해’라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곧 잘 따라했고 또 잘 배워 행동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기대한 점은 ‘이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니 하지 말아야지!’를 깨달았으면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기대와는 다르게 여전히 때리고-미안해 를 아직도 반복하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아이는 미안해 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를 모른다. 이 친구는 그저 부모가 가르친 대로, 딱 배운대로만 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
3) 머리로만 아는 회개, 말로만 행하는 회개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나눔에서 우리는 ‘회개해야지. 회개하자’ 라는 메세지를 듣고 또 듣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회개기도 하라 하니 막상 기도는 하지만 그 다음 우리의 스텝이 없는, ‘기도하면 끝이다’ 라는 식의 회개입니까? 아니면 나의 죄가 너무나 많아서 기도 시간 내에 다 회개하지 못해 하루 하루 살아감에 있어 걱정과 두려움에 쩔쩔매는 회개입니까?
도대체 회개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회개를 점검하며 또 바로 세워가길 소망합니다.
2. 회개 : 내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행위
1) 진짜 회개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회개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회개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야 합니다. 회개란, ‘내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행위 입니다.
회개란 뜻을 가지고 아까의 상황을 다시 꺼내봅시다. 아엘이가 저를 때리고 ‘미안해’ 라고 말하면 회개한 겁니까?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라면 아엘이 입장에서 ‘쓰다듬으며 미안해’라 말했으니 이 친구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를 보인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짜 회개는 내가 그 행동에 있어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 동시에 다시는 그 행동을 범하지 않는 것이고 또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겁니다.
2) 진짜 회개 : 음식이 다시 나와야 한다!
제가 최근에 마북동에 위치한 한 파스타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로제 리조또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온 메뉴가 허여멀건한 크림 리조또가 나온겁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혹시 제가 주문서를 잘못 체크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문서를 보니까 저는 제대로 주문을 넣었습니다. 결국 알바생이 주문서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주방에 넘기는 과정에서 아예 다른 음식을 주문한 겁니다.
이때 알바생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주문서를 잘못 입력했습니다. 제가 음식을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제가 주문한 음식을 다시 가져다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매우 당황했는지 ‘아..네..어떡하죠..?’ 오히려 제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먹겠다고 대답하고 마무리 지었지만, 방금의 태도는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대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알바생은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로제 리조또가 나오지 않았으니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사과하며 벌어진 상황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게 진짜 회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잘못을 인정해 기도는 하지만 정작 내가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회개가 이어져오니 계속 불편한 겁니다. 찝찝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3. 속죄 : 죄를 배상하는 것
1) 나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예수 그리스도, 비로소 나는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삶을 이 찝찝함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오늘 회개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속죄’ 입니다.
속죄가 무엇입니까? 속죄는 죄를 배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 있는 김민승 전도사가 작고 연약한 김기락 목사님을 무차별 폭행했습니다. 그렇게 상해를 입었고 이에 피해액이 책정 되었는데, 그 금액이 2,400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럼 김민승 전도사는 김기락 목사에게 책정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이 배상입니다. 책정된 금액만큼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 바로 배상입니다.
그럼 우리의 죄값은 얼마입니까? 아니 우리의 죄값이 얼마가 되었든 그 값을 치룰 수 있습니까?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죄값을 치룰 수 없습니다. 진짜 회개를 위해 우리가 속죄의 과정을 치뤄야 하는데, 우리는 죄에 대해 스스로 속죄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회개 자체를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이 죄값을 누군가 대신 치룬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나의 잘못에 배상이 이루어져야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 말하는 것이 유효해 질텐데, 누군가 내 죄값을 대신 치룬다면 나의 회개 역시 유효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자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내가 죄를 지어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곧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의 반응이 되는 겁니다.
2) 인정하라, 나는 내 죄의 대가를 배상할 수 없다
참 기쁜 소식이지만,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꽤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준비한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안넘어감) 잘 안되네요? 그런데 여러분, 이 프리젠터는 안되야 당연한 겁니다. 이 프리젠터의 건전지가 없어서, 또 수신기와 거리가 멀어서 안되는 게 아니라 이건 프리젠터가 아니라 볼펜이기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애당초 이건 사진 한 장 넘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넘어가길 기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 죄, 내가 해결해!’ 라는 태도는 볼펜으로 사진을 넘기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3. 회개는 강요가 아니라 특권이다
1) 속죄를 생각하니 회개는 결국 좋은 소식이다
그렇게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내 죄값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니, 결국 회개는 좋은 소식입니다.
“너!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지?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러는거야? 잘못했어 안했어? 어? 이거 다 너가 해결하고 돌아가!” 여기서 오는 회개는 좋은 소식보단 위협에서 오는 회개에 가까울 것입니다. 불편하고 막막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값을 내가 치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 이리와바. 내가 너 대신 갚고 해결할테니,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지?” 여기서 오는 회개라면,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희망적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죄를 대속하신, 즉 속죄를 통해 누리는 회개는 결국 좋은 소식입니다. 회개는 좋은 소식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2) 회개하라! 아니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4장 17절을 함께 봅시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하라는 표현이 여전히 위협적으로 다가오십니까? 속죄를 이해한다면 이 말은 더이상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죄인을 형벌을 통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구원하신다고 하니 어찌 위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본문의 ‘회개하라’를 ‘이제 너희는 회개할 수 있다’로 바꾸어 넣어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함께 읽어 볼까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이제 너희는 회개할 수 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회개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회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회개할 수 있도록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사도행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상종하지 않던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서도 회개할 수 있도록 일하시는 모습을 보는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즉 회개의 주체가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서창희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죄에 대한 모든 행동의 대가를 직접 치르지 않도록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 그 공로를 의지하여 나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3) 남은 고난, 형벌이 아닌 징계로
속죄에 따른 이 회개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 회개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소망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지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문제를 집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 이후 남은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됨은 큰 축복이지만, 아무리 회개해도 일상생활의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입은 상대방은 책임지라 말한다는 겁니다. 여전히 나를 향한 형벌이 남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저지른 죄를 통해 나타나는 삶의 결과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형벌인지, 아니면 징계인지를 우리는 구별해야 합니다.
시광교회를 시무하는 이정규 목사님은 형벌과 징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형벌은 하나님의 진노, 즉 화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다. 결국 징계는 회개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복이라 말할 수 있다.
속죄로 말미암은 회개하는 크리스천은 다릅니다. 삶에서 순종이든, 불순종이든 모든 선택 이후에 겪게 되는 삶의 결과들이 끝내 형벌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징개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두렵지 않게 됩니다.
4. 정리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껏 우리의 회개는 어떤 회개였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회개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한 성도님과의 대화를 통해, ‘형벌이 아닌 징계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성도님이 지난 한 주 QT를 1회 밖에 못했다는 겁니다. 근데, 표정이 너무 밝았습니다. 그리곤 다음주는 더 열심히 해보시겠다는 겁니다.
만약 형벌의 하나님을 만나고 계셨더라면 QT 1회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징계의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니 이 시간을 통해 더 성장케 하심을 기대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망과 질책으로 ‘회개해! 회개해!’ 라 말하는 하나님이라 착각하여 회개의 위협 속에 살아가기 보다, ‘이제 우리는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소망을 선포하며 끊임 없이 회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살아가 날마다 주님의 형상대로 변화됨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 그렇게 회개하고 회개했지만,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몰라 목마름 가운데 놓인 우리였습니다. 계속해서 내 힘으로 회개하려 하고, 또 넘어지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고백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회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제는 소망함으로 회개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힘 입어 주님의 형상대로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 회개할 수 있게 하시어 우릴 새롭게 하신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고픕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예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가 여전히 넘칩니다. 이 시간 그들을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속죄의 은혜를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를 누리게 하소서.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동료, 나의 다락방 식구들. 주여, 속죄로 오는 회개가 얼마나 큰 희망이고 소망인가를 이들이 경험케 하소서
2.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놀라운 사랑~/후렴) + 무엇이 변치 않아(후렴)
-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십자가의 은혜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통하여 십자가의 생명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소망을 보게 하소서. 고난주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을 마음껏 누리게 하소서. 나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가운데 온 마음 다하여 참예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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