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으신 예수님 (막 14:43-52) (강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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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1) 도입
-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거절당했던 경험 있으십니까?
- EX: “즐겁게 춤을 추다가” 게임 설명 / 버림받음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게임
- 게임이야 재미로 한다고 하지만, 살다보면 실제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버림을 받거나, 혼자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 때, 마음이 어떤가? 비참..!
- 그런 좋지 않은 경험이 쌓이다 보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생김 / 자존감이 낮아짐 / 인생이 혼자라는 생각이 듦
- 가끔씩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겠죠.
2) 본문 소개
-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마가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입니다.
- 마가는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X. 사도가 X. 그럼에도,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비서와 통역의 역할을 했었고, 베드로의 증언과 감독을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다.
- 마가 본인의 권위보다는 베드로의 권위를 통해 이 책이 사도성을 가진 성경으로 인정됨. 누가복음 같은 원리
- 이 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자신의 집을 제공.
-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유명한 최후의 만찬 (사진)도 마가의 집에서 치뤄졌구요. 예수님의 승천 이후, 120명이 기도 / 오순절에 성령님이 처음으로 임했는데, 그 장소도 마가의 집!
- 최초의 교회가 마가의 집에서 탄생한 것이죠.
- 당시에 다락방에만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집 >> 마가는 부유했던 가정의 아들. 사도행전 12:12에 따르면,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마가의 집이 사도들의 근거지로 활용됨.
-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가입니다.
3) 오늘 본문의 상황
- 오늘 본문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예수님과 12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가짐 >> 그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밤새 눈물로 기도.
-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시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 달라는 간구로 기도를 마치심
- 그리고 그 새벽에 기도를 마치신 직후, 그 동산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2. 버림당한 예수님 [본문 설명]

1) 유다의 배신
<< 43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가룟 유다가 왔습니다.
- 마가는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표현하면서, 핵심 제자였던 유다의 배신을 부각시킴.
- 그런데 유다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칼과 몽치, 즉 나무로 된 몽둥이로 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그 무리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보낸 무리들입니다.
- 그 어두운 새벽에, 유다가 무장한 종교지도자들의 무리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그가 치밀하게 배신을 기획해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했는지가 44절에 나오는데요.
<< 44절 읽기
- 당시에는 입을 맞추거나 볼에 키스하는 행위가 그들의 인사방식이었습니다. 존경의 표시!
- 당시 그 무리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히 모를 수도 있고, 더군다나 어두운 새벽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 유다가 미리 신호를 짠 겁니다. “내가 키스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이다. 그를 잡아서 단단히 묶어라” 확실하게 잡으라는 거죠!
-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랍비여”라고 부른 후에, 입을 맞춥니다.
- 거짓된 입맞춤이죠. 입을 맞춘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헬라어로 “필레오”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는 “카타필레오”라는 단어를 썼어요. 그냥 키스하다가 아니라 “진하게 키스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유다가 그 무리들에게 신호를 확실하게 주기 위해서 일부러 더 오래, 더 진하게 입을 맞췄다는 의미입니다. 아니면 마가가 이 장면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 그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역겹습니까!
- 예수님은 이미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 유다도 예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태연히 다가와서 거짓된 입맞춤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죠. 사탄에 사로잡힌 유다의 사악함, 교활함, 치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이미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유다의 행동이 얼마나 가증스러웠을까요?
~ 무리들은 그 신호를 보고 달려들어 예수님을 잡았고,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습니다.
2) 제자들의 방관
- 그렇게 예수님이 잡히실 때, 함께 있던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냥 옆에 서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 47절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사실 마가는 베드로를 표현하는 중에 있다.
- 처음에 유다를 표현할 때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표현했었다. 여기서도 베드로를 소개할 때, “열둘 중의 하나”라고 표현할 수 있고, 그게 더 자연스럽다.
- 그런데 마가는 “옆에 서있던 사람들”, 다시 말해서 “방관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EX: 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인데요. 제 또래의 사촌이 2명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3명이서 잘 어울렸어요. 삼총사!
- 하루는 동네에 같이 놀다가, 머신에서 나오는 야구공을 치는 곳에 야구공을 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잘 놀고 나오는데..
- 좁은 입구 / 시비가 붙었다. 싸움이 시작됨 / 1대2
- 당연히 가서 도와야 되는데… 그냥 보고만! / 왠지 모르게 그 순간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음.
- 결국에 사촌 A의 코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병원해서 수술했어요. 당시 그 사촌은 우리를 보고 얼마나 원망했을까..!
- 나중에 알고 보니깐, 그 때 싸웠던 그 동네 형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 예수님이 잡하시는데, 옆에서 보고만 있던 나머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날 저의 부족했던 모습이 떠올랐고, 이게 연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베드로
- 그런데 그 중의 한명은 좀 달랐습니다. 본문에서 그 제자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제자는 분명히 베드로였습니다.
- 칼을 빼어 무리 중의 한명의 귀를 잘랐다.
- 방관하던 다른 제자들과 조금 달랐던 것은 좋았는데, 그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결국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꾸지람에 칼을 거두었습니다.
4) 예수님의 말씀
- 예수님께서 잡히시면서, 그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왜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느냐? 나는 날마다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그 때는 너희가 나를 잡지 않았지만, 이제는 잡으러 왔느니 잡아라”
-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 무슨 의미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잡힌다! 어떤 계획입니까? 아들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실 큰 계획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잡힐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고, 지금 때가 되었으니 잡아라!”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습니다.
5) 모두에게 버림당한 예수님 [본문의 핵심] [주제 확장]
- 그리고 50절!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50절 함께 읽기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결국에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혼자 남겨지셨습니다.
- 50절에서, 한국어 번역에 따르면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는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다”라는 단어를 마가는 의도적으로 문장의 제일 뒤에 붙였습니다.
- 그 의도를 살려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전부 다..”
- “모두”가 “철저하게”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 그 양상은 다 다르다. 적극적으로 치밀하고 가증스럽게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 잡히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방관하다가 도망가 버린 제자들 & 그 중에 나름대로 저항해보았지만 결국에 도망가 버린 베드로. 베드로는 나름 저항했지만 그 날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까지 합니다.
- 그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어떤 이는 소극적으로, 어떤 이는 나름대로 저항을 했지만, 결국에는 모두 주님을 버렸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려질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성경이 성취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버려지셔야만 했습니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치열하게 기도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림받기 싫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져서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으셨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싫으셨다.
- 그렇지만 성경의 약속,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고, 자기의 마음을 꺾으셨고, 오늘 본문에서, 순순히 붙잡히셨다. 자발적으로 버려지셨다.

3. 마가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 [마가복음의 특징]

1) 한 청년의 이야기: 마가 >> 본문의 이상함 >> 사건 재구성 >> 마가의 고백
- 그런데 본문에는 짧은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51-52절의 내용입니다.
- 에필로그 같은 건데요. 네개의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에서만 기록된 이야기이다.
- 오늘 우리의 본문이 마가복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마가의 의도가 있다.
<< 51-52절 함께 읽기
- 한 청년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 이상하다.
-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마가는 그 옷차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그 청년도 함께 있다가 그 홑이불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기록하며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 여러가지 질문이 든다.
- 그 청년은 누구인가? 왜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가? 왜 마가는 이 이야기를 굳이 넣어서 이 에피소드로 본문을 마무리 하는가?
- 질문 1: 그 청년은 누구인가?
- 일단 그 청년은 마가복음을 쓴 마가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가장 정설!
- 사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다는 점을 보면, 마가가 본인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성경에서 성경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때, 익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꽤 일반적이었다. (요한, 바울)
- 초대교회 교부들도 그 청년의 이야기는 마가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 만약에, 이 이야기가 마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중요한 시점에 굳이 51절과 52절의 이야기를 삽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마태, 누가, 요한은 전부 예수님께서 잡히신 다음, 바로 공회에서 심문당하는 장면으로 속도감있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마가 자신의 이야기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51-52절의 에피소드는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되어버린다.
- 질문 2: 그렇다면 마가는 왜 그러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가?
- 그냥 한글번역을 따라 본문을 읽으면.. 미친 사람이자나요. 홑이불을 걸쳤다..
- 그런데 홑이불이라는 단어는 사실 일반 옷과는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비싼 옷을 가리키는 말이다. “linen.”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입지 않는 비싼 옷!
- 당시 마가는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가진 집에서 살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 청년이 “린넨이라는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마가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만든다.
- 그런데 이것이 홑이불이 아니라 비싼 재질의 겉옷이라고 해도 옷차림 이상하다!
- 당시에 유대인들은 속에 옷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었다. 벗은 몸에 한겹으로 걸치지 않는다.
-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더워서 마가가 이렇게 입었다고 하지만, 본문 바로 밑에 54절을 보면 베드로가 추워서 불을 쬐고 있었다고 한다.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벗은 몸에 얇은 린넨 소재 옷 하나만 걸치고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 굉장히 급하게 정신 없이 벗은 몸에 겉옷만 하나 걸치고 나왔다는 말이죠! 어떤 상황이었을까?
- 제가 이해하고 있는 상황은 이렇습니다.
- 예수님께서 잡히시긴 전날 밤 예수님과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죠? 최후의 만찬! (사진) 마가의 다락방에서..!
-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곳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다가, 예수님께서 이중에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요한을 시켜서,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예수님은 유다에게 “가서 네가 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유다는 갑자기 그곳을 빠져나간다.
- 가룟유다는 그때부터 함께 없었다. 그 밤에 어디로 갔을까? 당시 제사장들에게 갔다. 무장한 무리들을 데리러!
- 그 집에 남아있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몇가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열두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거기서 밤새 기도하신 것이다!
- 자~ 그러면 가룟유다의 입장에서, 그 밤에 나가서 제사장들의 무리를 만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가장 먼저 갔던 곳이 어디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최후의 만찬을 하던 마가의 집이지 않겠습니까?
- 일단 그곳으로 갔는데, 예수님과 주요 제자들은 없었던 겁니다. 허탕을 친거죠! 그런데 그 집에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열두사도가 아니었던 마가가 있었습니다. 호스트였기 때문에 정리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밤이 늦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잠을 자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리가 들이 닦치자 마가는 놀라서 아주 급하게 옷을 걸쳐 입고 나온 겁니다.
-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왔을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야 한다. 배신자 유다와 이 무리들보다 겟세마네에 더 빨리 도착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급하게 겟세마네 동산에 합류한 것이죠!
~ 그래서 마가는 언뜻보면 이상한 옷차림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와 있었고, 그 소동 중에 자신도 잡힐 것 같으니 그 비싼 겉옷을 버려두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친거죠.
- 질문 3: 그렇다면 마가는 왜 에피소드를 넣었을까?
- 마가는 50절에서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기록하면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렸는데, 나도 버렸다고.. 아주 부끄러운 모습으로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 나름 애썼지만, 예수님을 도우려고 애썼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렸했지만, 결국에는 나도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동시에,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당시의 독자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이시간 이 본문으로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떤가?”
~ 모두가 주님을 버렸고, 나도 버렸는데, 당신들은 어떤가?
2) 우리의 고백 "나도 예수님을 버렸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찔림이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저들의 악행에 치가 떨리시나요?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는 나는 어땠을까?
-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도 예수님을 버렸던 사람들!
- 동의하세요?
-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으셨고, 내가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내가 어떻게 저들과 같은가? 나는 예수님을 버린 적이 없다.
- EX: 나도 소위 모태신앙 출신이다. 자연스레 예수님을 믿었다. 그런데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과연 내가 저들과 다른가? 예수님을 버린 적이 없는가?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없이 예수님을 버렸다.
- 주님을 부끄러워 했어요. 부끄러워하는 성경. 크리스천인 것을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었고, 삶 속에서 주님을 거부하고 죄를 따르던 순간들.. 많았다. 20대 초반에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전도도 한번도 안 했다!
!! 마가의 이야기가 사실은 저의 이야기이다.
- 요즘 일년 성경 1독 플랜을 따라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민수기를 읽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낸다. 그런데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들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처해진 상황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 그들의 원망에 대한 모세의 평가가 다음과 같다.
<< 민 14:43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새번역 “당신들이 주님을 등지고 돌아섰으니”)
-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연결이 되었다.
>>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주님을 버리는가?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으로, 불순종으로 수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 때로는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의 입술의 죄악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짓밟는다.
-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지금 이모양 저모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예배하고 있지만,
- 하나님이 보실 때, 시간 밖에서, 영원 전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장면에서는 우리도 다 그곳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시는 본문의 장면에 우리도 있었어요!
- 50절에서 모두가 예수님을 버렸다고 할 때, 우리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 하나님의 은혜 없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 마가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주님을 버렸는데, 우리 각 사람도 주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4. 대속적인 은혜 & 적용

1) 우리는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 우리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대조되지 않습니까?
- 삶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수없이 주님을 거부합니까? 삶에서는 불순종하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예배의 자리에서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가룟유다가 거짓된 마음으로 주님께 입을 맞추는 것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죄를 선택할 때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 세상에서 가장 힘든 감정이 버림 받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내가 누군가에게 수용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고, 아버지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으셨습니다.
- 그런데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버렸는데, 지금도 삶 속에서 불신앙으로 불순종으로 예수님을 수없이 버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셨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게 복음입니다!
2) 대속적 은혜
- 더 감사한 사실은요!
- 예수님께서 버려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수용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받으신 모든 고난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대속적인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 된 것과 같은 원리!
- 예수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버려지심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겁니다.
- 예수님께서 홀로 남겨지셨기 때문에, 반대로 우리는 이제 더이상 혼자가 아닌 존재가 되었어요.
- 임마누엘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귀한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진 거예요.
-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고, 성령님의 내주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혼자라고 느낄 때가 다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때로는 비참하고, 버림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쌓여서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져있고.
>> 그럴 때 마다, 이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시고 혼자 남겨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고, 성령님을 통해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이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히 13:6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스크린에서만)
- 얼마나 감사합니까?
- 주님이 철저하게 버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에도 버림받지 않는 이 은혜.
- 주님이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연약한 우리의 예배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 이번 한주간의 삶 가운데 믿음으로 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누리시면 좋겠어요.
>> 이 믿음을 가지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거절감을 극복하고,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3) 전도적 메시지
- 오늘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데,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보고 싶은데, 내가 너무 못났고, 부족하고, 지난 날 나의 행실이 너무 악해서 주저하고 있는 분 계십니까?
- 네 맞습니다. 오늘 메시지에 따르면 여러분도 예수님을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 그런데요.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버림 받으셔야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 이것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구원하신 방식입니다.
>>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께 나아오시면 됩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에 나의 과거 때문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 제자들과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실 거예요!
-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시고, 살려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역사하실 겁니다.
- 어떤 이들은 일평생 주님을 모르고 부인하고 버리고 살았던 인생이었는데, 주님의 초청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간 인생이었는데, 끝까지 찾아오셔서 기가 막히게 그 사람을 발견하셔서 받아들여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찾아오실 겁니다.
-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부모님을 통해서, 교회 목사님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그 인생을 받아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역사하실 겁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 다 은혜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 기억하시면 좋겠어요. 주님이 여러분을 찾으신다 느끼실 때, 그 주님을 마음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그게 영접! 그 때, 버림받으신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을 모르고 외롭게 방황하던 영혼이 하나님께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결론

- 오늘 본문에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우리는 이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후에는, 그들이 더이상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 오히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담대하게 순교하였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 본문의 저자 마가도 마찬가지. 예수님을 나름대로 따르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나중에는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놀랍게 쓰임받는다.
-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가는 귀하게 쓰임 받다가, 서기 6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순교당한다. 짐승처럼 목줄에 묶인 채, 끌려다니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 예전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마가는 주님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에 시신이 태워져서 순교하였다.
!! 이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는 연약해서 주님을 버렸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면서, 그들은 그 사랑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 본문에서 주님을 버렸던 제자들의 변화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용서의 은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면, 더이상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입술로 삶으로 주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거예요.
>> 이시간 함께 결단하길 원합니다.
- 주님을 아직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하신 주님을 구원자로 믿기로 결단하며 기도하시기를 권면합니다.
- 이제껏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여전히 삶 속에서 주님을 버리며 주님을 슬프게 하며 살았던 분들이 있다면, 이시간 결단합시다.
- “이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과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며, 이번 한 주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찬양>
-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 우리 때문에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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