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정체성

로마서강해(2024)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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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7 NKRV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새해 들어서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읽은 7절말씀 그대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정체성’이라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정체성”이란 단어의 의미를 아십니까..? 물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대략 이런 의미겠구나 하고 연상이 되실 것입니다. 말이 조금은 어렵지만, “정체성”이란 사전적 의미는 이러합니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모두에게는 이 변하지 않는 존재적인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라 합니다. 영어로 Identity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 정체성이라는 것은 다양한 것에 적용됩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성정체성..”이라 함은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스스로 인지하게 되는 것을 말할 수 있겠지요,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는데, 나는 여자다라고 느끼는 것, 바로 이 성정체성의 혼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직 사람만이 이러한 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나는 강아지다, 나는 고양이다..라고 느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인가..? 나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가..? 에 관한 모든 것이 바로 이 정체성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신앙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바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아시다시피 제 나이 30대가 다되어서야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온 우주 만물, 즉 이 세상의 창조주가 있다는 것과 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를 믿게 된 후로부터 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이러한 신앙을 가지기 이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이라는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즉 나란 사람의 존재에 대해 전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진정 좋아하는지?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즉 왜 사는지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정처 없이 표류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허무한 제 인생 가운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믿음이라는 것을 갖게 된 후로부터 저는 성경읽기와 책 읽기를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 이 책 읽어야 한다 딱! 꽃히면 우선 사고보자..식으로 읽지도 않는 책을 우선 빚을 내서라도 사는 물론 좀 무리수가 있었지만...) 아무튼 이 지성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알아가는 것이 제게는 막연하고 딱딱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소위 독서를 좀 하는 사람들이 서점이든 어디에서 책을 고를 때는 공감하는 공통적인 원리들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제목을 딱 발견하게 되면, 우선 그 책을 집어들고 목차를 훑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끌리는 소제목과 내용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그 장을 잠깐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이 책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번에 판단이 서곤 합니다.
왜 갑자기 설교 서두에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지요, 사실은 성경 66권 속에서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인 로마서라는 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위치에 있는지를 좀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언젠가 어떤 선교사님의 설교 속에서 참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이 성경 66권의 순서를 우습게 보면 안된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읽고 그 어떤 책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공부를 안했던 무지한 상태라..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습니다만..말씀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한 뒤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뒤, 사도행전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위치하는 책입니다. 즉 성경에는 예수님의 행적 즉 복음서의 이야기 뒤에 사도들의 살아있는 행적의 이야기 다음으로 ‘서신서’가 순서대로 등장하는데 그 모든 서신서의 가장 첫 번째 책이 바로 이 로마서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어째서 이 로마서가 서신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가..?
사실 시기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먼저 씌여진 서신서는 ‘데살로니가전서’로 통상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떤 이는 로마서가 가장 길기 때문에 앞에 왔다라고 주장하는 바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 성경 66권의 정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달되는 과정에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이 서신서의 순서를 오늘 날까지 그대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싶습니다.
앞서 말했든, 가장 긴 편지글이기에 먼저 위치해 있다 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의견은 사도행전 속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적, 즉 교회가 세워진 후, 이 교회에 정말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즉 주님이 피값 주고 사신 이 교회가 온전히 이 땅에 자리를 잡고 굳건하게 바로 설 초석이 되는 근본적인 진리가 필요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 로마서가 사도행전 다음으로 와서 정말 필요한 진리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신앙을 가지고 성경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쭈욱 자란 긴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에, 갈급한 제게는 정말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성경 66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제 지성과 의지의 한계 때문에..(물론 열심히 심취하긴 했지만..)
어쨌든 저 개인적으로 신앙의 유아기때..이 로마서를 읽고 참 많이 감동했고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와, 이것이 정말 ‘복음’이구나, 이 로마서에 복음의 진수가 압축되어 담겨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3번을 읽은 적도 있고, 그것도 모자라 공책에 필사도 여러번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로마서를 통해 회심하고, 변화된 많은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존 번연, 초대교회 위대한 설교자 크리소스톰은 매 주에 두 번씩 로마서를 읽었다 합니다. 감리교의 존 웨슬리도, 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이 로마서를 통해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 말씀을 통해 정말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 삶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새해 첫 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제 개인적으로 특별히 로마서를 다시 공부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적 질문이 이러합니다. ‘아 내가 어디서 떨어뜨렸을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아 정말 하나님 다시 만나 그분께 순복하는 삶으로 정말 한번 돌아가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믿고 살아온 그 ‘복음..’에 대해 다시 간절하고도 격렬하게 묵상하고, 그분께 돌아가는 참 신앙인이 되어보자..라는 기도제목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제 기억을 되살려, 이 로마서 만큼 이 복음의 진수를 알아가는데 있어서 유익한 서신이 또 없다라는 것을 알기에, 다시 한번 깊이 연구하고 그 은혜를 나누고자 오늘 본문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마치 바람불면 후 날아가는 씨앗들처럼 흩날리며, 공허하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듯 휩쓸리는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복음’에 대해 온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복음에 뿌리박지 못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없는 종교인, 혹은 정체성이 흔들리는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이 뿌리채 흔들려 뽑혀진, 아주 위험하고도 비참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우리 모두가 항상 예배 가운데, 경각심을 가지고 진지하고도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과 또 앞으로 이어질 이 로마서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의 존재, 즉 정체성의 분명한 정립이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확립의 첫 번 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서 독서에 관한 부분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이 책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들면, 정말 책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책의 어디를 가장 주의 깊게 살피는 줄 혹시 아십니까..?
예, 바로 “서문”입니다. 즉 책을 쓴 저자가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 저자가 현재 처해진 삶의 상황적 배경, 등이 바로 이 서문을 통해 발견됩니다. 그래서 한 책의 서문을 주의 깊게 있는 사람은 책 좀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바로 로마서 전체의 구조와 메시지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되는 중요한 서문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1절을 다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멘, 바울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 즉 특별히 “사도”로 구별되어 선택받았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그 성격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원문의 의미와 가장 가까운 단어는 separated, 즉 분리된, 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이 곧 apostle, 사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강화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단순한 제자 이상의 위치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우리의 대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워진 특별한 제자들, 즉 사도들이 있고 우리는 그분들이 노력과 수고에 세우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함께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첫 번째 교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요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성경에 계시된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성도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존중하기에, 더 나아가 말씀 사역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존중하며 주의 깊게 듣고 묵상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하는 자들과 듣는 자들 그 둘 모두에게 필요한 엄중한 태도와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이 이 본문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들이 어떠한 태도여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 말씀으로 확증하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간절히 말씀을 듣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즉 깊이 생각함으로..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31절까지 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둔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말씀 사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그 뒤 구절에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 구약의 말씀을 해석해주고 그제서야 그가 온전한 세례를 받고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말씀의 사역 없이 성령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저 역시 신대원가서 설교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정말 전도사님들, 설교 제대로 안합디다..정말 설교 준비 게으르게 하더랍니다. 정말 교수님한테 욕 많이 먹습니다. 아니 기본적인 본문 해석을 안하고 옵니다. 본문 읽어놓고 자꾸 딴 소리를 하고 설교를 마칩니다.
이 본문에 대한 전체적인 문맥적 의미 파악도 제대로 안해옵니다. 주석과 책을 읽고 다시 본문 읽고 원어 대조해서 개인 사역도 만들어 보고, 하는 이 기본적인 작업들을 안합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떠들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맞으니까, 기승전,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다 주의 은혜입니다~ 복음 전합시다~ 이따위로 설교하고 내려오니까 맨날 욕을 먹습니다. 정말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식당가서 뭐 그리 자기 간증들을 하면서..서로들 은혜를 받는지..
절대 제 자랑은 아니고, 교수님이 제 설교 듣더니 고맙더랍니다. 자넨 정말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내가 읽어보라는 책도 읽고 다양한 책과 주석을 살피고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자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구조가 보이고 논리적이다 라고 하더랍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자네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애써줘서.. 고맙다..얼마나 신대원생들이 그렇게 게으르면..단순히 늦게 자고 일어나는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그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사역자의 역할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엄중합니다. 자기 멋대로, 일체의 부지런함 없이 말씀을 준비한다? 죄송합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지독한 부지런함으로 말씀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 사역자의 엄중한 태도 하나는 부지런함입니다.
다음으로 본문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 말합니다. 종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란 사람의 정체성은 빌립보서 3장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유대인중의 최고 석학, 율법으로 흠이 없었던 사람, 더 나아가 열심히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교회를 짓밟았던 사람이, “내가 그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똥으로 여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완전히 예수께 미친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미친자가 권세 권세 하면서 은근히 힘 자랑 하고(내가 목산데..) 내가 어디 부교역잔데..설교는 희안하게 하면서..설교를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는데..아는 하면서..내가 어디 어디서 이런 이런 사역한다고..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유대 랍비처럼 가르쳐드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랍비는 아는것이라도 많지..아는 것도 쥐뿔도 없으면서 아는 척이나 하고...
바울 역시 그 당시 석학중의 석학이었습니다. 소위 말해 신학박사라 그말입니다. 신학박사중에서도 최고!!..
그런 자신을 종이라 합니다, 당시 시대배경 상 종이란, ‘노예’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노예가 바로 바울의 정체성입니다. 사도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는 사역자의 태도는 ‘겸손함’입니다. 그 겸손함은 우리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고 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는 가르치는 자들의 바른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모두가 온전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절에서 바울은 먼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야 이 복음에 대해 말합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의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라고 나옵니다. “선지자들의 통하여” 라는 것은 곧 구약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청교도 윌리엄 퍼킨스가 멋진 표현으로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신약의 빛을 가지고 구약을 바라보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무엇이냐? 신약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구약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 2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어떤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아멘,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나신 이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나타나셔서, 예수의 죽음으로 혼돈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비로소 성경에 관해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성경의 모든 그 모든 것이 나와 관련이 있다라는 것을 친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여..”
(가끔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 주어졌으니 이제 오래된 약속은 별로 중요치 않아..아 이렇게 가끔 생각하시는 분들 종종 있는데 정말 답답해 죽겠습니다.) 구약은 율법적이라 삭막하고 신약은 은혜로와 복음적이다..아, 정말 이상한 사고를 지니신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데도 이상한 사고를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 이상하게 구약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그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상하게 변질되어서 마치 자기개발서나 복,복,복음으로 아주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목사님들 볼때도 참 답답하고..정말..
(아주 오래전에 저 청년때, 어떤 청년이 기독교서적인데 이런 책을 들고 감동을 하더라구요, 복음 그것 말고 더 있다..) 이딴 책 그것도 신앙서적이라고 나왔나본데..속으로 ‘너도 슬슬 맛이 가는구나야..’ 교회에서 하도 복음을 이상하게 가리키니까..참..
제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아멘?! 빛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빛이 있기에 이 세상을 보는 이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본다. 그분을 통해 내 삶의 희노애락이 해석되고 그 진의를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구약의 수많은 인생사들은 사실 나에 대한 즉 죄인된 우리 삶의 투영인 것이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죄와 고통으로 얼룩진 우리 죄인된 삶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간절히 그분만을 찾고 의지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분을 통해 내 삶의 목적과 힘이 생겨난다. 나란 존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가게 되는지가 명확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경을 본다. 빛되신 그분이 구약을 비추이고 해석하신다. 수많은 구약의 약속들 모두가 그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그 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시다.
성경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렇게 해석되고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확립을 위한 두 번째 교리, “그리스도 예수 없이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원리로 나아갑니다. 3절부터 5절을 읽겠습니다.
바로 3.4절이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와 꼭 같은 육체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셨고,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신적인 능력으로, 거룩한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부활하셨다라는 것은 그가 죽었다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십자가상에서 말입니다.
5절에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고, 6절에 우리도 예수님의 것으로, 즉 교회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것으로 교회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왜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지옥갈까봐? 아니면 엄마 아빠가 자꾸 가라니까? 여러분 정말 자발적인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신 것 맞으십니까? (그렇다고 하세요, 안그러면 서로 곤란해집니다..)
왜 신앙생활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스스로가 한번 질문해봅시다. 여러분 정말 예수님의 것입니까?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즉 교회의 지체로서 어떤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 정체성에 있어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죄송하지만 따라합시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반복) 2) 두 번째로, 믿어 순종하게.. (반복)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위한 위대한 마지막 원리가 무엇이냐?!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 그 이름을 위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꽃, 신앙의 최종 열매는 ‘순종’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정체성입니다. 신앙생활의 실체! 우리 삶의 실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말씀앞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신앙인이십니까? (그렇다 하세요, 서로 곤란해지니까..)
(저는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신앙의 길에서 참 힘들게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헤매는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깨닳은 결론이 이것입니다. “아 내가 잘못믿고 있구나..아 내가 아직도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구나..”
아 나의 이 무식한, 잘못된 열심과 방향 때문이구나..부지런하게 알기를 힘쓰고, 바르게 알고자 연구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훈련해야 하는 것이구나..훈련해야 한다..정말 바른 방향으로..
여러분, 정말 진실로 진실로 우리가 바르게 믿기만 한다면...정말 바르게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 중생된 자, 즉 거듭난 자의 삶으로 혼란을 겪지 않고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난 앞에서, 넘어질 수 있으나, 방향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아멘..
예수와 함께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한 성령 안에서 교회의 지체로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각자 각자가 바른 신앙으로 서로 지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정말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신을 확증해 보길 바랍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디 이 로마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바른 관점과 태도를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일체의 부지런함과 겸손함이 요구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말씀 해석과 적용,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비로소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은혜를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태도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을 위해서 그분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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