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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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 1:14-18(신약 142쪽)
설교제목: 성육신 사건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부터는 대림절이라는 절기가 시작이 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앞둔 4주 전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이 대림절이라는 절기는 쉽게 말하면, 기다림 관한 절기입니다. 무엇에 관한 기다림인가 하면, 예수님에 오심에 관한 기다림입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라는 것은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뜻하는 것이고요.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게 됩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교회는 초를 이용한 장식을 하는데요. 총 4~5개의 초를 놓고 한 주가 지날 때마다 한 개씩 불을 밝히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기간은 4주니깐 보통 4개의 초를 놓고 한 주마다 하나씩 불을 밝히는데요. 5개의 초를 놓는 경우는 흰색 초를 더하여 놓습니다. 흰색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초로 불을 밝히게 됩니다. 그리고 초의 색깔도 보라색에서 점점 흰색으로 나아가게끔 놓기도 합니다.
대림절의 초 장식에 그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처음 초의 색깔을 보라색으로하는 것은 대림절이라는 절기를 상징하는 색깔이 보라색이기 때문입니다. 보라색은 크게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슬픔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에도 보라색을 사용하는데 이는 주로 슬픔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라색은 고대로부터 왕들만이 사용했던 색입니다. 왜냐하면 염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서 보라색은 굉장히 얻기 힘든 색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에 보라색이라는 색을 얻기 위해서는 뿔고동을 잡아서 그것을 으깨서 색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30ml의 보라색 염료를 얻으려면 약 25만마리의 뿔고동이 필요했습니다. 30ml면 두 숟가락 정도의 양입니다. 그렇게 보라색은 만들기 참으로 어려웠던 까닭에 그것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왕의 의복에 사용이 되었고 이로 인해 보라색은 고대에 왕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대림절을 맞이하면서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분명 여기 계신 분 중에 예수님을 모르실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성육신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 가운데 14절의 말씀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방금 읽은 구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것이 성육신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여기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또 이를 가리켜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는 것에 꽤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단순히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몸이나 육체 대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소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륵스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단어는 모두 몸에 관해 나타내는 단어이지만 서로 상반된 느낌을 주는 단어입니다. 소마라는 헬라어 단어는 몸을 긍정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사륵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비유하자면, 사륵스는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 같은 형태의 몸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몸뚱이, 몸뚱아리 같은 느낌의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방금 읽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사용된 육신이라는 단어가 사륵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거룩한 분이니 소마라는 단어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나타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하는데요. 사실 성육신을 나타내는 단어는 사륵스라는 것이 눈여겨 볼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것은 이런 느낌인 것입니다. 가장 신성한 존재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격하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육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존재가 가장 비천한 존재로 추락한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것도 자발적인 결단으로 말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신분이 강등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유명한 인물 중 한 분이 ‘성 프란시스’입니다. 그는 이른바 ‘청빈’이라는 삶을 몸소 실천했던 신앙인입니다. 청빈은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삶인 것입니다. 본래 그는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 곧 우리로치면 대기업의 섬유회사의 아들 이른바 재벌2세였는데요. 그가 회심하여 그 모든 부귀를 버리고 청빈의 삶으로 대표되는 탁발 곧 밥을 빌어 먹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프란시스의 모습에 감화 감동받은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는데요. 이들은 재산을 축적하지 않기를 맹세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봉사하고 탁발을 하며 삶을 연명하는 이른바 청빈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프란시스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노동을 하면서도, 식사 이외의 어떤 것도 받거나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청빈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난을 택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우리가 주님의 종임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프란시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기에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주의 말씀에 힘입어 살기 위해 청빈의 삶 곧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삶을 이뤄갑니다. 훗날 그의 삶이 신앙의 역사에 귀중한 유산이 되어서 그를 이른바 성인이라고 하여 성 프란시스로 부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실은 이보다 더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은 예수님이 낮아지신 사건입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을 받거나 저주를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낮아진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실 예수님은 성 프란시스보다 더 고귀하고 존귀한 분이시기에 그의 낮아지심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사건은 그저 신이 인간이 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기꺼이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내려놓고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로 임하신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성육신 사건이 발생한 것일까요? 그 답은 무척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신분을 뛰어넘는 국경을 뛰어넘는 뜨거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낮아지심을 통해 사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부터 우리에 관한 자신의 사랑을 일찍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이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자신을 낮춰서 가장 비천한 존재가 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이고 그것이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이 절기를 기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랍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가 이룩하는 신앙생활이고 이는 종종 마치 사랑하는 신랑하는 맞이하는 신부의 모습으로 성경에서 그려집니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기쁨과 감사로 대림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고대하며, 신앙생활해 나가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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