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어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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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 2. 평안을 전하시는 분 3. 함께 지어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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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

말씀을 나누기 전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시작하자 마자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한번 답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여진 공동체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네 맞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 한자 뜻을 풀이하자면 ‘거룩하게 된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거룩하게 된 무리'입니다.
그리고 성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죽고 살아나고 함께 길을 걷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하게 된 무리"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길을 걷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쉬고)
바울은 고전 1장 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아멘.
사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성도라고 부르기에 참 부끄러운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누군가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너 고린도 출신이지? 딱 보니 고린도에서 온 사람이 분명해!”라고 말할 정도로 고린도 출신의 사람들을 사고 뭉치였어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적, 도덕적으로도 타락의 끝판왕과도 같은 곳이 바로 고린도였어요.
그런 상황 속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타락한 문화 속에 살아갔어요. 그래서 바울파니 게바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당파를 짓고 싸웠어요. 싸우다가 서로를 법정에 고발하기까지 했어요.
정말 부끄러운 모습으로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었던 것이죠.
(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거룩하게 된 무리’ 성도라 불러요.
바울이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고 문제 많은 우리를 “왜 성도"라고 불러주실까요?
언행이 한심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종보다 불순종의 삶을 더 많이 살아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 위협하고 공격해도. 그것을 맞고 넘어져서 통곡하며 우는 모습이 나라고 해도. 결국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어날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향해 ‘성도' ‘거룩하게 된 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쉬고)
그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베소 교인들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함께 읽은 본문 1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죠.
‘그러므로'라는 말이 언제 사용되나요?
앞의 내용을 뒤에서 받을 때, 앞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것에 대한 추가적 설명 혹은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장 1-10절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이 담겨져 있어요.
1절. “죄와 허물에 빠져 사망 안에 허우적 거리던 인생들을 살려내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에 앉히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에 빠져 사망 안에 허우적 거리던 인생들”이 누구이죠? 바로 저와 이 곳에 있는 우리 모두의 과거의 삶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죄와 허물에 빠져 사망 안에 있는 것 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이었던 거에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1-3절을 통해 “생각하라" “기억하라"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원래 영적으로 죽은 자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손에 놀아나던 사람들이다.
열방의 빛이 되어야 했으나,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몰랐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죄인이었다.
이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사실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육체로는 이방인” “죄인"에 불과했어요.
에베소 사람들도 우리들도, 하나님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쉬고)
13절. 이제는.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지옥을 향해 가던 사람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위치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곁으로 가까이 끌어당기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이제 우리는 “성도" “거룩한 무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길을 걷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한 성령님 안에서 말씀으로 교제"하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생각하라! 라는 것이죠.
(충분히 쉬고)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성도의 삶을 잘 살아내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쉬고)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계속해서 ‘성도됨을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14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쉬고)
벽. 담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맞습니다. 구분을 짓습니다. 너와 나. 내 땅과 당신의 땅. 내 영역과 너의 영역. 이렇게 사람들을 갈라놓고 구분을 짓습니다.
이렇게 구분되어진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려워요. 구분을 짓는 벽. 경계를 만들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워요.
(쉬고)
이것은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경계를 통해 집단의 정체성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다른 누군가가 그 집단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뻘쭘해요. 도망가고 싶어져요.
공동체가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그 안에서 사람들의 유대관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외부 사람을 잘 받아드리지 못하게 돼요.
(쉬고)
이처럼 우리는 원래 죄와 더 익숙하고 유대관계가 강했던 사람들이죠.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쉽게 받아드리지 못해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습관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거에요.
하나님을 몰랐을 때 내가 세워놓았던 담. 죄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남아있어서 쉽게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벽을 딱 허무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모든 것들을 다 치워버리셨어요.
(쉬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죠.
우리는 또 죄를 지으며 담을 조금씩 쌓아가요.
어느 새 그 담이 훌쩍 자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또 가로막고, 하나님보다 더 우선되는 것들이 생겨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보다 담 안에 있는 내가 먼저가 되다 보니 오늘 또 나는 내 고집을 부렸고, 결정을 뒤로 미루었고,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래서는 안되다는 것을 알지만, 담 안에 갇혀 일어난 상황들에 대해 나에게서 이유를 찾지 않고 남에게서 이유를 찾고 탓했어요.
그러면서 결국,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거에요.
(쉬고)
성도라고 불리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 것이죠.
(쉬고)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세요.
(쉬고)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허무신 그 담을, 우리가 다시 세워 올린다 해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그 담은 다시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더 의지하고 붙잡는 것들이 생겨난다해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이 다시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충분히 쉬고)
15절. “모든 것들을 다 폐하셨어요" “쓸모 없게 만드셨어요"
그리스도 앞에 모든 것들이 다 무기력해지도록, 쓸모 없어지도록 만드셨어요. 그리고 회복시키셨어요.
십자가로 인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화목하도록 회복시키셨어요.

평안을 전하시는 분

16-18절.
‘먼 데 있는 너희’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가까운데 있는 자들’ 유대인들에게 샬롬(화평)을 선포 하셨어요.
(쉬고)
그 샬롬. 화평은 에베소 시대에만 선포되고 끝난 것이 절대 아니에요.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선포되고 있어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의 삶과 심령에는 “샬롬"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화평이 계속해서 선포"될거에요.
(쉬고)
그 화평. 샬롬. 은혜를 아는 이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고 계신거에요.
(충분히 쉬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죠.
저는 재작년 11월 28일 주일에 인천제2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가온누리 청년부에서 처음 나누었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6절이었는데, 그 때 ‘같이 걸어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자'고 부탁과 권면을 했었습니다.
모두의 언어와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이 다를지라도, 나와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내가 걸어가는 것과 속도가 달라도
그것을 인정하라. 용납하라. 인내하라. 허용하라. 다른 방식과 속도를 인정하라. 보채지도 말고 먼저 가지도 말고 그냥 걸어가라.
누군가는 한 걸음씩 신중하게 걸어갈 것이고, 누군가는 작은 보폭으로 여러 번 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큰 보폭으로 큼직 큼직 걸어 갈 것이다.
다 자신에게 익숙한데로 걸어갈 것이다. 나와 다름으로 인해 힘들어하지도 말고, 또 나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말자고.
평안의 매는 줄로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그냥 걸어라. 같이 걸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같이 걷다보면 뒤처지는 사람도 있고 먼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뒤처지는 사람에게는 먼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손을 먼저 내밀어 사랑을 베풀어주고, 먼저 가는 이가 있다면 겸손하게 그를 세워주라.
온유한 마음으로 용납하자.
(쉬고)
‘성도'는 바로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해요. 함께 울고 웃어야 해요.
나의 믿음이 수준이 낮아보여서 나누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상대가 나누는 것을 듣고 공감하며 응원하고 함께 감정을 나누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성도. 거룩하게 된 무리에요.
(쉬고)
지난 2년간 가온누리 청년부에서 사역하면서, 저는 이런 공동체를 위해 기도했고 달려왔어요.
따뜻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정말로 바랬습니다.
지난 3월 말 8호차를 배정받고 8개월동안, 청년들이 있는 곳이면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 곳이 대전이던, 천안이던 어디던 만나러 다녔습니다. 한달 평균 1,000km를 이동했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것보다 밖에서 만나는 것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에, 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있기에 정말 힘을 다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청년부에 관심과 사랑 그리고 기도로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청년부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새가족들이 적응하기에 쉽지 않은 분위기들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1층 드림성전을 보시면 알겠지만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활기차게 변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려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다른 청년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팀이 생겨났습니다.
(쉬고)
변화된 청년부와 함께 세워나갈 24년의 공동체가 굉장히 기대가 되었었습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변화된 성도들이 되어 갈 것인가? 하는 궁금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쉬고)
지난 주 청년들과 함께 나누었던 말씀이었는데, 올 여름 사역이 지나고 말씀을 묵상하던 도중 문뜩 “하나님께서 NO라고 하시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이 저에게 별안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청년들과 나누었던 말씀은 ‘성전을 짓기 원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너가 성전을 짓는 것은 나의 계획에 없다.”“거절하시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청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여러 사역들을 하며, 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세워놓은 가온누리를 위한 24년의 계획에 너는 없다.”라고 하시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저를 떠나지 않았기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쉬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이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쉬고)
저는 10일 뒤 20일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출국을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했다"라는 것이겠죠.
(쉬고)
10년 전쯤 자카르타에 있는 세개의 한인교회에서, 자카르타 지역 한인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만나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청소년 교회를 꿈꾸며 마음을 모아서 자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한명의 부목사를 모시기 어려운 한인교회의 현실 속에, 죽어가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교회들이 결단을 하여 청소년들을 분리시켜 청소년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담임으로 섬기셨던 목사님께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시면서, 그 후임을 뽑게 되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고민이 많았습니다.
청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10여년 전에 제가 했던 “한 기도제목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10여년 전에 저는 인도에서 학교를 다니며 한인교회를 출석했고, 그 때 청소년 아이들을 잠깐 섬겼었습니다. 인도에서 만났던 청소년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들의 직업으로 인해 인도에 살게 되었고, 그 곳에서 다양한 문화 충격을 경험을 했습니다.
국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면서, 한국의 입시도 같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인도가 위험하다 보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청소년들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죠.
그 친구들을 놓고, 인도에 있는 동안 “언젠가 허락하신다면, 이 친구들을 섬기며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민하며 기도하는 저에게 그 때의 기도제목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 하필 지금입니까?
공동체가 잘 세워져가고 있는데 왜 이러십니까? 라는 의문이 들어,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습니디.
(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을 바로바로 해주시나요?
저에게는 잘 안해주시더라구요. 답을 들어야겠는데, 침묵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저 나름 목사잖아요? 목사답게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셔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쉬고)
“하나님께서 24년 가온누리를 위한 계획에 제가 없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왜 하필 지금 가라고 하시는 지" 이 본문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함께 지어져 가네

목사인 저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된 제2가족 모든 분들의 삶의 이유와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해요.”
죄인인 우리가 성도로 변화되고, 공동체가 되고,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모든 이유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지 않습니까?
(쉬고)
오늘 본문은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건물의 모퉁잇돌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요.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 안에서 세워져 가는 모든 건물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에요.
함께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으로 자라가는 사람들. 그 성도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거에요.
(쉬고)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존재에 불과했던 우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귀한 거룩한 처소가 되었어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존재가 되었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졌어요.
“그의 안에서 건물. 저와 여러분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어요"
(쉬고)
그 것처럼, 제 삶의 이유 되시고,
교회를 세우신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께서 그 곳에서도 공동체.
교회를 세워나가라는 마음을 계속해서 주시더라구요.
저는 청년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목사인데,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버틸 수 없겠더라구요.
저 같은 이가 필요한 공동체에 가라시는데,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의 이유되시고 모퉁잇돌 되신 분이 원하시는데,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요구하고 버텨서는 안되겠더라구요.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서로를 향해 ‘감히 성도’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신,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께서 가라시는데 외면 할 수 없더라구요.
(쉬고)
청년들과 헤어지는 것이 또 제2가족들과 이별하는 것이 슬프고 마음 아픕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거리와 상관없이, 나라와 상관없이 이미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를 연결되어 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쉬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염치없지만, 제2가족들에게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쉬고)
우리는 혼자 신앙 생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혼자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어요. 함께 같이 하라 하셨어요.
오늘 본문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의 안에서 서로 연결하라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한 분이신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시면서 서로를 연결하고 있어요. 떨어져 있는다 해도,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고 묶어주고 있어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나. 혼자'의 신앙생활이 아닌 ‘우리' ‘함께'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쉬고)
멀어지고 보이지 않게 되면 금방 잊을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만, 언젠가 생각이 나실 때 양휘석이란 목사가 최연미 사모가 있었구나. 하시며 저희 가정을 위해 1분이라도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어디에 있던 우리는 ‘한 성령. 한 예수 그리스도로 묶여 연결되어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불러주신, 처한 자리는 다르지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섬김을 통해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 “성도”가 우리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쉬고)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길을 걷다보면만나 교제할 수 있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 안에서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목사를 품어주시고 이해해주시고 또 기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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