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전쟁 (골 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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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크리스챤이 된 이후에 항상 ‘영적 성장'에 대해서 갈급했고, 지금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가운데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이 때문인지 저의 관심은 언제나 제가 섬기는 공동체의 영혼에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주리지 않고 부요하고, 주님과 동행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큰 것이죠. 그런데, 최근에서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숙과 성장이 평생의 걸쳐서 진행되는 아주 긴 과정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아둥바둥하는 마음보다 우리를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고집스러움을 신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두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중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한 사람의 존재를 새롭게 뒤바꾸는 사건입니다. 이 중생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며,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참되게 깨닫는 것입니다 (1:6).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주'라고 고백하게 되며, 자신의 삶의 ‘주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게 됩니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센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관점'의 사람이 됩니다. 또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면서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님과 교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죄악된 삶의 습관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하고,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아직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중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닙니다 (벧전 1:2).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곳곳에서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중생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예정하신 때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거듭날 때 이미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갓난 아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평생에 걸쳐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많은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키가 자라면서 지혜가 자랐던 것처럼,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도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수없이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터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법처럼 완벽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동시에 성숙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이제서야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라는 책에서 던진 질문이 참 유익합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을 뒤짚으면, 이 세상에는 왜 그리스도인 보다 더 매력적인 세상 사람들이 많은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루이스는 여러가지 유익한 답변을 제시하는데, 그 중 한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절한 평가는 세상에서 이미 타고난 자연적 성품이 괜찮은 사람과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을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가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전과 그리스도인이 된 후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여러분 자신을 평가할 때, 다른 많은 세상 사람들과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의 ‘성화'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 자라고 겪고 깨우치며, 한 인격체로 구체화되는 성숙과 완성의 과정 이라고 말씀합니다. 박 목사님은 신앙 생활을 한 마디로, ‘철이 드는 과정'으로 설명하십니다. 한국인으로서 “성화" “Sanctification” 이라는 단어보다 “철이 드는 과정" 이게 훨씬 이해가 쉽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여러분은 철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제가 이렇게 길게 설명한 내용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중생을 경험 했다면, 여러분이 다시 태어났다면, 여러분 안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면, 여러분이 더 이상 땅에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면, 여러분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졌다면, 여러분이 하늘의 시민권자라면, 여러분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 이제는 여러분도 영적인 성숙과 성장을 위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4의 요지가 무엇이었나요? “위엣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찾다, 구하다, 추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고, 구하고,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여기 ‘구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가장 우선시 하라는 것이죠. 하나님 우선주의! 예수 그리스도 우선주의! 하나님 나라 우선주의! 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마음을 이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일까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이 땅에 현실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태도도 이 땅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보물을 자꾸 쌓아두면 하늘의 사명을 감당 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중심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권세자이니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이 땅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은 예수님의 강력한 왕권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골로새서 3:5-11에서 바울은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땅에 있는 육체의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란과 더러운 짓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지나친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지금 바울이 나열하고 있는 죄악의 목록들을 우리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니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골로새 성도들에게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 성도들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정말 큰 소망이 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이죠.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죽었기에 우리는 신분 변화를 위해서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골로새 성도들이 그들의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면, “여러분도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충격적이게도 골로새 성도들 가운데에 온갖 음행과 더러움을 행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 전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흔적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시절에 세상 속에서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며 행했던 땅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믿음의 조상 아브람 역시 이방 세계에서 온갖 잡신들을 섬기던 집안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너무나 큰 신학적 족적을 남긴 어거스틴 이라는 사람은 젊은 시절 화려한 과거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세속 문화를 철저하게 대표하는 사람이었죠. 약혼자와 이별하자마자 창기를 찾아가서 성적인 방종을 일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대단히 정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된 이상 과거의 삶을 반복할 수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삶에 벼락처럼 임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바울이 지금 하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에 새로운 사람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알렉시스 카렐 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걱정과 싸우는 법을 모르는 기업인은 일찍 죽기 마련이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탐심과 싸우는 법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이 땅에 속한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욕심'을 이루는 삶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내면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성취로 자신들의 이름을 크게 내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탐심을 관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과 탐욕의 사람과 동역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관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내면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솟구치는 탐심을 다스리고 계신가요?
여호수아서 7장에 보면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나옵니다. 큰 성읍 여리고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감을 가지고 아이성 정복에 나섰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아이성을 치기 위해 모든 군대가 다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은 2-3천명 정도의 병력이면 충분히 칠 수 있는 조그마한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보기 좋게 패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옷을 찢고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이 아모리 족속에게 패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여호수아 7장 11-12절 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말았다. 그들이 내 명령에 불순종하여 만지지 말라고 지시한 물건을 훔치고서도 그 사실을 속이고 그것을 자기 소유물 가운데 숨겨 두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군이 적군에게 패하여 등을 돌리고 달아나게 된 이유이다. 그 결과 너희도 역시 그 저주받은 물건과 같이 되었다. 너희가 가져서는 안될 물건을 너희에게서 제거하지 않는 한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 지파별로 세워서 제비뽑기를 진행했는데, 유다 지파에 속한 세라 집안 가운데 삽디 라는 사람의 가족의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혔습니다. 죄를 고백하라는 여호수아의 명령에 아간이 무엇이라고 답을 합니까?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이 장면이 주는 교훈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께서 아간이 깊숙히 숨겨둔 그 부정한 재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간의 탐심을 가만히 눈감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아간이 마음 속으로 탐했던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는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 거주했던 그 땅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 안에 솟구치는 욕심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삶의 방식이 때문입니다. 과거의 음란한 삶의 습관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유혹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결단과 함께 죄를 죽이는 과감한 공격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이것은 굉장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 사회에 음란한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를 익명으로 비방하고, 분노와 미움을 품고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바울의 표현 그대로 ‘더러운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제 이러한 삶의 모습은 버려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골로새 성도들이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아담을 가리키는 것이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담 아래서 골로새 성도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삶을 살았지만,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창조된 새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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