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능력을 경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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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다니엘 3:18(구약 1236쪽)
Daniel 3:18 NKRV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요. 사람은 이기적이에요. 아니 사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이죠. 그러나 이기적인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에요.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이어야 하거든요. 가령,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주로 가공된 식재료를 사서 먹지만, 또는 음식점에서 조리된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사실 본래 그 식재료인 식물이나 동물은 본래는 살아 있는 것이었죠. 그러니 우리가 먹는 행위는 어떤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가 돼요. 만약 이것이 거북스러워 먹지 않게 되면, 우리는 사실상 살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살아 있는 한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가진 본성이고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실상 나쁜 것은 이기주의에요. 우리가 이기적인 존재라고 해서 무조건 나만을 위해 살지는 않아요. 사실 그렇게 살아서는 생존하기가 더 힘들어질 수 있죠. 예를 들면, 어떤 동물들 중에는 공생의 관계가 있어요. 어떤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의 입 속에 들어가 그 입에 달라붙은 찌꺼기를 먹으며 산다고 해요. 큰 물고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작은 물고기를 삼킬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죠. 그래야 자신도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모든 생명체가 본성적으로는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이타적인 행위를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다면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인 행위를 보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이타심도 어쩌면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우리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을 위하는 이타주의적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여기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타주의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더 잘 지키고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큰물고기와 작은 물고기의 공생의 관계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삽니다.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의 많은 부분을 우리가 지키고 사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을 들 수 있지요. 이것은 꼭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와 문화 속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법이자 윤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살수 없고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법을 지키고 윤리적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통해 보게 되는 놀라운 지점은요. 우리가 그 이상의 존재로 변화될 수 있고 이른바 초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그것을 특히 잘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다니엘 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 3:18(구약 1236쪽)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잘 아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 유명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로 강력하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얘기인데요. 인간에게 행했던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 화형 곧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그 고통과 끔찍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입니다. 절대로 왕의 요구를 따름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의이자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의 특별함을 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어쩌면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변화시켜가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1. 죽음을 넘어섭니다. >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또 죽음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우리의 삶이 덧없다고 또는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기 때문에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성과 같습니다.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도 그것은 파도 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명체에게 죽음은 종말이자 공포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모습은 그 죽음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의 행위는 죽음을 불러 일으킬 위험한 행위이고 그들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고는 생각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죽음이 임할 수도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신앙은 그러한 죽음을 더 이상 두려운 것으로 만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에 대한 소망과 같은 교리적인 지식이나 믿음 때문만이 아님을 아실 겁니다. 당장에 바늘에 찔려도 아프고 그와 같은 무서운 감각이 한편 우리의 지식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기에 죽음 우리를 언제나 오그라들게 만들고 공포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또는 역사 속에 등장한 어떤 신앙의 선배들은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신앙을 지킵니다. 사실 저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마음이고 어느 정도의 결단인지 잘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을 통해 그와 같이 죽음을 넘어서는 선택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 2. 세상을 넘어섭니다. >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용상으로는 그들이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행동은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신앙의 가치를 쫓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세상을 넘어서게 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겨야하고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과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 왕의 신상에 절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이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적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을 것이고 왕의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곧 성공과 출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상급자에게 충성하고 봉사함으로 우리는 좀 더 출세의 또는 성공의 사다리를 높이 오르는 것입니다. 만약 그 길을 벗어나면, 아래로 추락할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위협을 가져다 주는 길이 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질서는 벗어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신앙을 통해 어떤 이들은 세상을 넘어섭니다. 왕의 명령도 어길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세상과 다른 길을 갑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이것이 앞선 이야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신앙을 통해 죽음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고 그것이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 준다고 믿어서일텐데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신앙인에게 세상을 따르는 일이 결코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은 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깨닫게 하고 그로 말미아아서 기꺼이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합니다.
< 3. 신앙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
사실 저는 오는 수요예배를 통해 신앙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때 더 많은 얘기를 할 것이지만 관련해서 그 이야기의 일부를 오늘 짧게나마 풀어본 것인데요. 제가 신앙생활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성도 분들께도 하고픈 진지한 질문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왜 하느냐’가 그것입니다. 나름 이렇게 저렇게 좋은 생각과 말씀을 하실 것을 기대하고 그러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는 것인지 혹은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생활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왜냐하면 제 스스로도 앞서 말한 죽음을 넘어서고 세상을 넘어선 신앙인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대부분의 신앙인이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까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신앙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서 고민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이 신앙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진정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자세로 신앙생활하고 있고 진정 우리는 세상을 거스를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일러주는데,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능력을 경험지 못한채 이대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까? 깊이 고민해 볼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라건대, 저는 우리 성도 분들께서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신앙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로와 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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