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신앙인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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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디모데전서 4:15(신약 339쪽)
설교제목: 성숙한 신앙인 됩시다!
1 Timothy 4:15 NKRV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이번 주간을 보내면서 ‘성숙’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분들은 또는 신앙인들은 날이 지날수록 신앙이 성숙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혹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이면 좋겠습니다.
실로 저는 신앙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고 우리 보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증명한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본을 우리에게서도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나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저의 바람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비판 또는 비난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세상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에 관한 기대이고 요구입니다. 더욱이 성숙에 관한 요구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도 그렇지만요. 더 분명하게는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 성숙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해서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성숙’에 관한 신앙적인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주어진 시간 안에 단지 몇 가지의 이야기만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히 그것이 성숙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토대로 해서 신앙적 성숙을 이루는 것에 관해 같이 생각해 보고 그러한 삶을 이뤄가자는 제안입니다.
< 1. 성숙은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
먼저 성숙이란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느낌으로는 어느 정도 다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사전적인 정의를 말씀드려보면 이렇습니다.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 성경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앞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성숙이라면, 예수님의 모습이 성숙의 기준이 됩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2장 52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마찬가지로 ‘지혜와 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외면과 내면이 자라는 것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몸과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는 꼭 복도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요사이는 복도 끝에서 담배 피는 부부도 등장했습니다. 언뜻 보이기에 제가 그들보다 나이가 젊습니다. 아마 저보다 나이로는 성숙한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이는 행동은 전혀 성숙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저를 비롯해서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심지어 그것을 자제해달라는 방송이 계속해서 경비실에서 나오지만, 그들의 행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몸이 자랐다고 마음이 자란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자라는 것은 이타적인 삶에서 나타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 때 그것을 성숙하다 말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른바 철이 들고 개념이 생겨야 부모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 곧 성숙해지는 것은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 2. 성숙은 앞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구절,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4장 15절(신약 339쪽)을 다시 같이 읽습니다.
1 Timothy 4:15 NKRV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가 가진 한글성경 곧 개역개정판을 기준으로 ‘성숙’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유일하게 나오는 성경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입니다. 물론 실제로 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총 3번이 나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 나오는 성숙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코페’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는 ‘진전, 발전’이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빌립보서에서 ‘진전’ 또는 ‘진보’로 번역이 되어 2번이 나오고 마지막 한 번이 방금 읽은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성숙’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성숙은 원어적 의미에서 ‘진보’ 곧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은 고대 로마제국의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본대에 앞서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주력부대를 위한 터전을 닦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성숙함이라는 것은 장애를 넘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숙은 이전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한 걸음 앞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장애물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것이 신앙의 원리 안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평탄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문제가 우리를 성숙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에 사실 신앙생활에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한층 더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닥친 시련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 3. 성숙은 성공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서 신앙의 귀감이 되고 성숙의 본이 되는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은 흠이 없고 완전할 것을 기대하지만, 사실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렇게 완벽하고 완전한 인물은 없습니다. 오히려 흠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 투성이고, 심지어 신앙의 본이 되는 인물 역시도 흠결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도 여러 약점을 보입니다. 심지어 아내를 누이로 속여 자신의 목숨을 보전코자 했던 인물이 아닙니까?
저는 다윗이라는 사람에 주목해 보면 좋겠는데요. 그는 이스라엘의 여러 왕 중에서 선한 왕의 기준이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평가받은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본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일생이 늘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그가 밧세바라는 여인을 빼앗고자 그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 가운데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우리야 보여준 모습은 다윗을 더 못나 보이게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을 신앙의 본으로 그리고 있는 점을 우리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본이 되고 이른바 성숙한 신앙인이 늘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더 성숙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적용된다고 보는데요. 우리가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면, 과연 우리는 성숙을 이룰 수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실패해도 그것을 통해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성숙해 질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성숙해진다는 것은 완벽해지거나 완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넉넉해지는 것으로 생각돼요. 여러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용납하고 수용함을 통해서 더 넓어지고 넉넉해지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 성도 분들이 성숙한 신앙생활을 이루는 것이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넓어져서 많은 이들을 기꺼이 품고 안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마치, 그런거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보고 그들을 기꺼이 품고 받아들이잖아요. 어리다는 것을 알고 그 어린 것을 어른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고 사랑해주잖아요. 저는 우리 성도분들께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어요. 나와 다르다고 선을 긋고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요. 그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그를 껴안을 수 있는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 4. 성숙은 모두가 이룰 수 있습니다. >
저는 성숙에 관해 생각하면서 하나 풀리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과연 모두가 성숙할 수 있는지가 그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숙은 진보하는 것이고 장애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요? 가령 몸에 또는 마음에 장애가 있으면, 진보하고 극복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래서 어쩌면 성숙하라는 얘기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성숙은 장애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가졌던 생각 중 하나는 장애가 있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성숙을 이루기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몸과 마음에 제약이 많으면 보통의 경우에도 힘이 부치는데, 더 힘이 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애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약점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장애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도하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가 있었는데요.
가령, 어떤 커피 공장에서 한 발달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른 장점을 보였는데요. 커피콩에서 불량 콩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데, 보통의 사람 같으면 쉽게 견뎌내지 못할 일을 즐겁게 또는 아주 정밀하게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발달장애인 특유의 반복적이고 동일한 행동을 좋아하는 특성에서 유래된 강점이자 그들은 ‘초능력’이라고까지 부르는 특징입니다.
또는 어떤 시각장애인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거에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잘 접근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일 한다고 하는데요. 시각장애라는 장애가 마찬가지로 그 일에 최적화된 장점으로 작용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더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더 많은 예가 있습니다.
이처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장애인들도 그 장애로 말미암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상향되거나 진보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가 성숙을 이룰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성숙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숙해 짐에 따라서 조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조금 더 넉넉한 마음을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것을 기대하고요. 그래서 바라건대, 저는 오늘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자라는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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