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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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21:15-17(신약 185쪽)
설교제목: 주님을 사랑합시다.
John 21:15–17 NKRV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했던 고민이고 묵상입니다. 한번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저는 이 물음에 우리가 진지하게 답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시에 찔리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익숙한 성경의 이야기에서요. 무섭도록 예리한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신학자가 17세기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해설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 그림은 누가복음 15장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른바 탕자인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온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아버지와 그 뒤에 서 있는 형제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환영하는 것에 비해 형제들로 보이는 이들은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이른바 탕자인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의 권유에도 첫째 아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준 일이 없으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그 아들을 위해 이렇게 잔치를 베푸느냐고 말이지요.
물론 첫째 아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닙니다. 첫째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처사는 공정해 보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니,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니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이러한 아버지의 심정을 그 신학자는 이렇게 덧붙여 설명합니다. 아마 첫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랬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구나, 어쩌면, 너가 원한 것은 나의 재산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저는 이 이야기가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듯 얼얼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첫째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님과 비지니스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또 정직하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그분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그분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관한 것에 더 관심하고 집중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스스로 돌아보면서 어쩌면, 사실은 나도 첫째 아들과 같았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정말로 내가 원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 수 있겠구나. 오히려 나의 꿈과 바람과 만족을 하나님이 이뤄주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감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건데, 하나님께는 참으로 슬픈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자녀들이 나에게 충성과 헌신을 하는 것은 나로 인함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재산에 따른 것이라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치킨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초등학교 무렵에 보았던 것이니 약 3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퇴근 길에 치킨을 사들고 집으로 오자 어린 자녀들이 반갑게 아버지를 맞이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니다.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을까요? 아버지 손에 들린 치킨 때문이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빈손으로 퇴근을해도 자녀들이 아버지를 치킨을 사오던 때와 같이 기쁘게 맞이했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것은 무엇이 때문 일까요? 하나님으로 인함일까요? 하나님에 손에 들린 그 무엇 때문일까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제 개인적으로 좀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다시금 오늘 성경 구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신약 185쪽) 말씀입니다.
John 21:15–17 NKRV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잘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찍이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에 세 번을 부인하였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러운 사건이겠습니까.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제자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좌절과 실패의 자리를 딛고 일어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한편으로 예수님의 애처로움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시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이 사랑의 실패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또한 그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물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고 마치려 합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13세기의 성인으로 불리는 수도자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20세기 그리스 작가는 그의 작품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어느 날 아침 프란체스코가 바친 기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 만일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저를 천국에 보내달라고 하기 위한 것이라면 칼을 든 천사를 보내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게 하소서. 주님, 만일 제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저를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넣으십시오.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위해서,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팔을 활짝 벌려 저를 받아주소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프란체스코의 고백처럼,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모르지 않으실거라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가 가진 배경이나 능력에 좌우는 되는 것이라면 참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오롯이 그 존재로 기뻐하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양과 능력과 형편에 관계없이 우리라는 존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요?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만으로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을까요? 돌아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이로부터 나의 믿음과 신앙의 의미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 그분 존재 자체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자체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분의 능력과 배경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를 사랑합시다. 그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사랑을 이루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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