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주어진 이유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에베소서 4:13(신약 314쪽)
설교제목: 고난이 주어진 이유
Ephesians 4:13 NKRV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여러 차례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2021년에 신황등교회를 온 이후로 어제까지 총 20번의 장례를 치렀는데요. 올해 7월의 장례는 제게 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신황등교회에서 장례를 경험한 것에 따르면 7월에 장례가 난 적은 없었습니다. 최근 2년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한 주에 한번씩 장례가 있습니다. 보통은 이러한 경우는 4월무렵에 주로 있었던 현상인데, 올해는 유독 7월에 많은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물론 신황등교회에서 장례에 관한 저의 경험이라는 것이 기껏 2년이 조금 넘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전에 보다 더 많은 장례가 7월에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7월은 또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있는 때이니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려 있는데요. 거기에 장례를 매주 치르고 있으니 더욱더 정신이 없는 형편입니다. 물론 실상은 저보다 담임목사님이 더 힘드실 것이고 또 작년말부터 함께 사역해서 이제 막 장례의 경험치를 쌓아가는 전도사님이 더 힘들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죽음에 관하여서이고요. 또한 이 죽음과 관련해서 장례가 발생함으로 현재 제가 당면한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일전에 위로예배를 준비하면서 좀더 깊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묵상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우리로써는 알수도 없고 뜻대로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주님의 뜻과 계획 속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좀 더 생각을 해보니, 죽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사실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고, 삶을 사는 것도 우리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기대와 어긋나거나 다른 방향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리하여 삶도 죽음도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내버려두면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과 종교행위는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면요. 종교행위는 종교적 활동에 열심을 내어 사실은 우리의 믿음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종교행위는 나를 믿는 것입니다.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종교행위에는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신뢰가 없을 보게 됩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사사건건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기 전에는 부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울어되지만, 참으로 부모를 신뢰하게 될 때에는 부모가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울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도록 우리를 만드시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로봇처럼 입력된 내용만을 출력하는 기계가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받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잘 사용하여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곧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할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매사에 하나 하나 지시받고 그것에만 따라 살아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자라면 독립을 시킵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도 자녀가 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린 자녀는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가 곁에서 돌보고 작은 부분까지도 보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언뜻 어린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더 신뢰가 돈독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성장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더 깊은 신뢰로 이뤄진 것입니다. 눈밖에 있어서도 서로를 신뢰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생의 정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셨고 그 선택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 선택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정하고 정해진 길만을 걸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선택지를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일 겁니다. 스스로가 선택하고 경험해보지 않으면 신뢰를 배울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수영을 배운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완벽한 수영법에 관한 지식을 접했더라도 그 지식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수영을 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지식이 완벽할지라도 사실은 수영을 배우고 그 지식을 신뢰하기까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때로는 물에 들어가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일이 내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수영에 관한 지식의 참으로 완벽했다는 것 또는 그 지식을 기반으로 수영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해보지 않으면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을 판단하는 것은 결코 삶의 모양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택지들을 잘 통과해보는 것 그러함을 통해서 내 삶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참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과함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삶과 죽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살아가는 과정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분명한 정답이 없고 여러 방식과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조금씩 자라고 변화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삶과 죽음을 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우리의 삶의 진정한 성공여부는 하나님과 얼마나 올바른 또는 좋은 관계를 이루었느냐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대단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은 허무해질 따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 앞에서 볼 것은 세상에서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렸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게되었느냐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비극적인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은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좋고 편안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그 품을 떠날 수 있을만큼의 고난과 시련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엄마의 젗을 먹던 것에서 보다 딱딱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하고, 가만히 누워있던 시절을 지나서 자신의 두 발로 걷고 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단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의 과정 또는 성장의 과정은 고난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는 과정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몸을 단련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운동을 시작한 첫 날에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픔고 힘듭니다. 그러던 것이 반복을 통해 더 정확히는 운동의 강도가 점점 세어짐에 따라 시간이 지나고 처음과 달리 오랜 시간을 하여도 몸이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짐을 봅니다. 이렇게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구절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앞선 저의 이야기를 통해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라는 것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고, 오늘 성경구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서 고난을 통과해 본 사람으로써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삶에서 찾아오는 고난을 성장을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 특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대단한 업적이나 명성을 떨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일임을 말했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이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자라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오늘 우리는 고난을 저주하기 보다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