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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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1:24-27(신약 299쪽)
설교제목: 신앙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2 Corinthians 11:24–27 NKRV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을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간단히 말해 보자면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가정에서 숫한 위험과 고난을 만났고 심지어 죽을뻔한 지경에 처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한 것인가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아마도 신앙의 위대함 또는 신앙의 가치에 따른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중요한 것으로 강조될지 몰라도 교회 밖에서는 신앙이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단적인 예를 보자면, 신학교의 입학자는 매년 줄고 있고, 목사는 이 사회에서 비인기 직업군에 속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여러 일이 세상 가운데 환영받거나 선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신앙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앙이 가치 있다고 해서, 신앙만이 가치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넓게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가운데 이룩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이롭게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가치있고 이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을 경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에 비판적이고 또는 비난을 일삼고 혹은 무관심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천시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에 관해서 짧게나마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 1. 신앙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은 우리 삶에서 찾아오는 역경과 고난 심지어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성경의 여러 인물을 통해서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한 인물을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폴리캅입니다. 그는 기원후 약 2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목회자입니다. 당시 그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는데, 우리로 치면 서머나 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폴리캅이 목회를 하던 당시는 기독교에 관한 대대적인 핍박이 있던 시절입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그것을 국교화 하기까지 기독교인들에 관해 여러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역사적 기록에는 끔직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불에 태워 도시를 밝히는 횃불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고요. 맹수들과 싸움을 붙여서 죽게 만들기도 했고요. 무기를 주고 서로를 죽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던 시절에 폴리캅도 로마제국에 붙잡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가 노령인 것을 감안하여 로마제국은 하나님을 부인하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만약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폴리캅은 이렇게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껏 나를 한번도 부인한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폴리캅은 그렇게 말하며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폴캅의 모습 속에서 저는 신앙의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 지를 봅니다. 심지어 죽음을 이기기까지 만드는 신앙의 위대함과 신앙의 가치를 봅니다.
< 2. 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
앞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여러 위험과 고난과 심지어 죽음의 위기를 겪기까지 했다고 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데로 그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사람이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180도 바뀌어져 오히려 기독교를 전파하고 기독교인을 세우는 것에 삶을 헌신하게 됩니다. 저는 신앙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변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해서 또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받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름받던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이야 이사를 한다는 것 또는 삶의 터전을 이동한다는 것이 좀 불편함을 주는 일이긴 하겠지만 목숨을 내거는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에 고대 사회에서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사실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 됩니다. 더욱이 축적한 재산이 그 터전에 있는데, 그것을 버린다는 것을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마치 이런 것이죠.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프리카로 인도로 이른바 오지라 불릴만한 곳으로 선교를 떠나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 명령에 쉽게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많은 경우에 하나님 정녕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를 물으면서 계속해서 그 말씀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과 협상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와서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버리고 다시 고생스러운 시절로 돌아가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토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앞서 소개한 성경의 인물을 통해 보는 것은 신앙이 우리의 삶이나 가치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존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를 기반둔 어떤 힘 곧 물질에 따른 것이었다면, 성경은 더 이상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존하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적 인물가운데 유명한 인물한 사람을 소개하자면, 프란치스코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포목상집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제일모직과 같은 의류 원단회사의 아들 곧 재벌 2세라 할만한 재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앙 안에서 풍족하고 넉넉한 삶을 떠나서 여기저기 빌어먹는 이른바 탁발 수도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평생에 그렇게 탁발 수도자로 살면서 신앙의 가치를 전하고 이른바 성자로 불리게 된 사람입니다. 많은 물질과 재화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신앙은 그와 같은 가치관을 뒤엎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켜갑니다.
< 3. 신앙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
앞서 말한 폴리캅과 같은 순교자를 비롯하여 신앙 가운데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그것이 신앙이 우리 가운데 소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오늘 이곳에서 모두 끝이 난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하면 잘 먹고 잘 살지를 고민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줍니다.
저는 그것이 부활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관한 소망이라는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삶을 넘어서 우리는 또 다른 혹은 유한한 삶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에 관한 소망을 신앙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실현될 미래의 사건임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고 정의롭게 더 가치있게 살아가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미래에 있을 어떤 소망을 기대함을 통해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고 또 현실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혁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삶만이 전부이고 이 삶만이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방법에 골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인생은 우리에게 펼쳐진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삶을 꿈꾸면서 그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자매가 화목하는 일이고 좋은 관계를 이뤄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를 착취하고 경쟁상대로 보고 끝임없이 땅 따먹기 게임을 하듯이 서로 반목하도록 우리를 인도할지 모르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좋은 관계를 이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될 소망의 삶이 바로 그러한 관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신앙이 우리 가운데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고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에 따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 4. 신앙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려고 합니다. 미운오리새끼 동화를 잘 아실 겁니다. 어쩌다 오리 둥지에서 길러진 백조 한 마리가 자신이 주변의 오리들과 다름으로 인해서 미움을 받고 스스로도 무엇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자아상을 일그러트립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인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미운 오리가 아니라 온전한 백조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이지요.
저는 신앙도 이렇게 우리를 왜곡된 자아로부터 치료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평가 절하합니다. 세상의 기준 아래서 우리는 서열이 매겨집니다. 나는 누군가보다 좀 더 낮은 서열에 있거나 또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높은 서열에 있습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인식은 마치 백조가 자신을 미운오리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를 미운오리와 같은 존재로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사실 미운오리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임을 말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세상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이 사실은 왜곡된 것이고 우리의 자아상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사실은 미운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리보다 백조가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백조이기도 하고 오리이기도 하고 또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운 존재 못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고 존귀한 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 대한 모습을 신앙은 돌아보게 함으로 신앙이 우리의 왜곡된 자아를 치료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온전하게 합니다. 이상을 통해서 저는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삶을 강해지고 변화되며 소망을 얻게 되고 치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러한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온전히 누리며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이 한층 더 힘있고 견곤해 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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