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6 양청] 3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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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부터 우리가 공부하게 될 종말론은, 우리가 죽을 때, 그리고 죽음 이후에 받게될 유익들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룰 부분은 칭의, 양자됨, 성화에 동반되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누리게 되는 유익들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누리게 되는 유익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36문 금생에서 칭의, 양자됨, 성화에 동반되거나 흘러나오는 여러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금생에서 칭의, 양자 됨, 성화에 동반되거나 흘러나오는 유익은 하나님 사랑의 확신, 양심의 화평, 성령 안에서의 기쁨, 은혜의 증가 그리고 거기에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펴두라. 우리가 배우는 구원론은 성령론이다. 이 모든 유익들이 성령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적용해 주시고,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기 시작하시면서 우리의 거룩함을 이뤄가신다.
예전에는 “왜 내 인생에는 이렇게 나쁜 일들만 일어날까? 왜 나는 이렇게 운이 따라주질 않을까? 왜 내 인생은 되는게 없나?” 라고 생각하던 사람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시작하니까 그 시각을 바꿔주신다. “그래, 지금 내가 겪는 이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겠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아버지께서 이 모든 안좋게 보이는 일들도 나의 어떤 유익 때문에 허락하신 것이겠지”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라.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생각하고 바라보는 건 똑같이 한다. 부모가 보는 걸 아이도 똑같이 본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이해라는 것을 하긴 하지만 부모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절대 이해할 수는 없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성인의 수준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둘러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마치 이 시각은 어린아이의 시각과도 같아서 제 아무리 뛰어난 철학가나 사상가들이 생긴다 할지라도 고작 해봐야 어린아이의 수준일 뿐이다. 그런데 신자들의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은 우리에게 인생의 통찰력와 깊은 이해를 전해주신다. 얼핏 보면 악하고 괴로운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목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전2:11-12 를 보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되는 칭의, 양자 됨, 성화에 동반되는 유익들, 이게 다 은혜라고 말씀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이것이 은혜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 모든 게 주권적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주도하시고 적용하시는 은혜라는 것이다.
36문의 답을 보면, 제일 먼저 “하나님 사랑의 확신” 이라 했다. 롬5: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가? 부은 바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부었다는 말은 막 양동이에다가 물을 넣고서는 붓는 것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신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는 이것은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가장 최고 은혜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철이 들면서 나를 향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살다보니까 문뜩 나를 향한 부모의 큰 마음이 이해가 되길 시작하고, 그 위대한 헌신과 사랑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본래 나는 그분을 알지도 못했다. 오히려 나의 죄악된 본성은 하나님을 거부했고 싫어했으며 그분의 뜻에 복종조차 하질 않았다. 그러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참아주셨고, 얼마나 기다려주셨으며, 오늘까지 나를 어떻게 그 사랑을 부어 주셨는지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확신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랑 하나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극강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교재 4번의 A를 보면, 하나님 사랑은 차가운 명제나 관념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써, 그리고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심으로서 이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다 했다. 여러분, “자기기만” 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정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내가 좋게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부류가 얼마든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칭의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데, 성화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기만이요 착각이다. 그렇다보니 조금만 상황이 바뀌면, 조금만 형편이 달라지면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은 어떠한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이러한 확신을 주실 때, 때로 여러분들이 불 가운데에 있거나 절망의 수렁 가운데 있을지라도 넉넉히 견디게 된다. 물론 인생 가운데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때로는 위협과 고난 앞에서 넘어지는 일들이 왜 없겠나?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강하게 심어주시는 사랑의 확신은 신자로 하여금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아버지의 그 사랑을 내가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존번연의 천로역정 꼭 한번 읽어보라. 아직 우리 도서관에는 구비가 안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 고전도서는 정말 꼭 읽어야 한다. 내용을 보면 주인공 크리스챤이 그 믿음의 여정을 거니는데, 어떤 자리에서는 의심이 생긴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진짜 맞는 길인가? 나는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처럼 확신이라는 건 늘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신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건 참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몰랐을 때도 그분은 날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랑, 그 크신 사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하지 못할 아버지의 위대하신 그 사랑,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구원과 더불어 주시는 은혜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확신이다. 그 사랑을 확신하는 것.
이어서 두 번째 유익은 무엇인가? 교재 5번을 보면, 양심의 화평, 성령 안에서 기쁨, 은혜의 증가라고 설명한다. a를 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양심의 화평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은혜의 증가가 같이 경험이 된다. 이것들이 수반되는 것이라 했다. 같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확신할 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난과 박해와 핍박이 물러가더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고난은 그대로 있을 수 있고, 상황도 그대로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바뀐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임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마음에 화평”이 물밀듯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분과 신앙적인 이야기로 상담을 했다. 그분이 그러더라. 자신은 꽤 오랜기간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교회당 안에 들어오면 마음이 평안해져서 그것 때문에 교회를 찾아온다고 하셨었다.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신앙생활에 열심히 참여하셨지만 정작 지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니 여전히 내 안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더라. 오늘날 마음의 평안을 위해 종교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통계를 봤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종교를 갖고 교회를 찾는다.
그런데 여러분, 평안을 얻기위해 교회를 찾은 사람들은 십중 팔구 세례 받고 다시 나간다. 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구원이 먼저 내 안에 이루어져야 그 안에서 내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칭의선언도 받지 못했고, 그분의 양자됨의 은혜도 받지 못했으며, 성화의 은혜도 누리지 못했는데 마음의 평안이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교회당에 백날 앉아있는다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한다고, 마음에 평안이 임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기만일 뿐이다.
사랑의 확신과 양심의 화평에 이어서 세번째 은혜는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 했다. 그냥 기쁨이라 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기쁨" 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반적인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떨때에 기뻐하는가? 원하는 회사에 취업했을때, 연봉협상이 잘되었을 때, 시험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등등 이럴 때 기뻐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이러한 일반적인 기쁨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 탁 짚어서 말한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의 기쁨은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가? 일반적인 기쁨들, 예를 들어서 원하던 회사에 취업했을 때 얻는 기쁨은 그 회사에 입사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연봉협상이 잘되었을 때 얻던 기쁨은 협상에 실패하면 사라진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얻을 기쁨은 시험을 망치면 사라진다. 그런데 성령안에서의 기쁨은 우리의 상황과 형편과 조건이 어떠하든지 늘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설령 우리의 삶이 곤두박질치고 있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이 기쁨이 우리 안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후6:10 의 말씀을 찾아보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씀이다. 바울의 생애를 생각해보라. 그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투옥이 되고, 로마시민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고생했으며, 배를 타고 끌려가다가 풍랑을 맞아 파선하기도 했고, 독사에 물려 죽을 뻔도 했으며,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수십대 매질로 죽을 뻔했던 일들이 많았던 자였다. 누가봐도 이 사람의 인생은 실패자요, 근심가득한 삶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누가봐도 근심 가득한 인생인것 같은데도 자신은 늘 기뻐한다고 한다.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자라고 하는데도 오히려 자신은 많은 이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바울이 빌4장 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불가능이 없다” 그런 말을 한다. 그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우리는 내가 믿고 기도하면 내가 바라는 것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오해해서 받아들인다. 바울은 그런 의도로 말하는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전부가 되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것들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가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겨도 예수만 계시면 나는 실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와 같다는 것이다. 주님이 죄인의 전부가 되어주시기에. 이런 의미에서 시편기자도 시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신, 양심의 화평,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같은 것들이 지금 내가 처한상황과 무관한,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것들이다.
D번을 보면, “은혜의 증가”도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무가치함을 점점 더 알게 되는 게 은혜가 증가하는 것이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은혜이다. 받을 자격 없다. 은혜가 은혜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첫째, 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본래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조금의 자격도 없던 자였다. 하나님과 오히려 반대에 있었던, 원수와도 같은 자가 바로 나였다. 나를 알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이 은혜인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다. 나 같은 존재에게 신경을 쓰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다.
그런데 먼지와 티끌과도 같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무엇을 주셨나?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사 여러분에게 가장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 그 아들을 주셨단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신 그분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신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내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너희에게 줄 정도로 너희에게 내가 무얼 아끼겠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은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더욱 커져가는 은혜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성장하는 것.
E번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하나라 했다. 갈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성령의 열매는” 이라고 했는데 우리 말로는 명확하게 표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엄청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 단수로 말한다. 단수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본문 속에 등장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열매들은 총 몇 개인가? 9개이다. 그러면 9개의 열매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성경은 “성령의 열매" 라고 단수로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인데 그 하나의 그 단면들이 하나의 그 성격이 그러니까 말하자면 9가지 맛이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단 하나인데, 그 하나의 열매에서 사랑의 맛도 있고 희락의 맛도 있고 화평의 맛도 있고 이 맛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다 무엇을 의미할까? 다시 36문답을 보면, 사랑, 하나님 사랑의 확신, 화평, 양심의 화평, 희락, 성령 안에서의 기쁨 등, 이것들이 모두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 내가 이것을 얻기 위해 떼 쓰고 구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칭의와 양자됨과 성화를 시작한 성도라면, 성령께서 이 모든 것들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나타나는 차이가 있겠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조금 더 두드러질 수 있겠고, 어떤 이들에게는 충성이 두드러질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전반적으로 볼 때 누구나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져간다는 것이겠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견인이다. 벧전1: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이다. 교재에는 제 실수로 누락이 된 부분이라 화면의 A를 보라. 성도는 완전히 탈락하지 않고 구원의 과정을 끝까지 견뎌 낸다했다. 완전히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예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타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잠시 교회를 방학을 한다. 참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낙심할 만한 일들에 놓이게 될 때 교회를 잠시 떠날 수가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끝내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반드시!
반면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아예 떨어져나가는 경우들도 있다. 성경에도 있지 않나? 디모데전서에 보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그랬다고 했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다고 말한다. 데마가 누구인가? 바울 사도와 함께 전도 사역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도 결국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다. 한때 주님을 잘 믿던 것 같던 자들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을 잘 쌓아가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전체 성경이 말하는 바, 교리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참된 믿음이 세워져가는 것인데, 이 참된 믿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뭔가 하면 지속성이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것 중에 한철장사 라는 말이 있지 않나? 신앙생활을 이런식으로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과거 어느날 막 뜨거웠었는데 결국 주님을 떠나는 일들이 있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가? 요일2:19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나간 그들이 참된 신자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도 뜨거웠던 때가 있었고, 신앙의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참된 신자였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시적인 인간적인 차원의 종교적 확신이라는게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마13 을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돌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되었는가? 싹이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가 뜨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이 말라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질 때 즉시 그들은 기쁨으로 받았다. 그 말씀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며 삶을 결단하는 등의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시련이 찾아오고 환란이 임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결국 교회를 떠난다. 완전히 탈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신자들에게 배교의 경고를 주고 있을까?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뤄가시며, 장차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인데 왜 우리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 “올바른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라!”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은혜의 수단 혹은 은혜의 방편 3가지, 무엇이 있는가? 말씀, 성례, 기도 이다. 여기서 말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함과 동시에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설교 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은혜의 수단이 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고 성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는 소요리문답 후반에서 한번 더 다룰 예정이니 지금은 넘어가자.
교재 D번을 함께 읽어보자. “구원이 인간의 선택과 결정과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라면 견인교리는 잘못된 것이지만,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면 견인교리는 합당하고 확실한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견인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고 사람의 노력과 선행과 의지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주셨다. 따라서 견인없는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다” 여러분, 17세기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개최되었던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바로 세웠던 신조가 바로 도르트신조이다. 도르트신조는 칼빈주의의 다섯가지 교리를 아주 견고히 세운 교리인데, 가능하면 여러분들 도르트신조에 관한 해설집들도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도르트신조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견인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나의 연약함과 불충함이 있어도 이에 대해 오래참아주시고 견뎌주시며 한번 정하신 나의 구원을 이끌고 가신다. 왜? 성부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나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며, 이 모든 은혜들을 나에게 적용하시고 이끌어가시며 완성하실 성령님은 그야말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 이 배운 말씀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한 가지만 여러분들에게 도전드리고 마칠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확신, 양심의 화평, 성령 안에서의 기쁨, 은혜의 증가를 지금 여러분들은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구원에 동반해서 주신 것들인데, 과연 나는 이것들을 누리고 있나? 오늘날 현대교회는 복음을 아주 쉽고 명료하게 단순화시키면서 함께 찾아온 부작용 중 하나는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도 너무나 평범해졌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도 너무나 평범해졌다. 구원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러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너무나 평범해졌다. 그냥 그냥 산다. 그러나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신자는 얼마나 영화로운 존재인지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그리고 교회는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말한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 참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우리가 누려야 하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들 없이 살아도 너무나 없이 살아도 그냥 그냥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이런 것들도 주신대? 난 몰랐네? 근데 이왕이면 이런 것들보다 돈을 주시면 안되나?”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감사하긴 한대요. 하나님 사랑의 확신, 양심의 평화, 은혜의 증가, 다 좋은데 저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합니다, 성공이 필요합니다, 진급이 필요합니다, 다른 세상의 것들이 필요합니다" 결국 교회가 세상의 흐름 속에 휩쓸려가고 있는 이러한 형국에서 우리가 던져야만 한 질문은 “이게 진짜 예수 믿는 게 맞나?” 이것 아니겠는가? “이 모습이 진짜 예수 믿는 거 맞나?” 세상이 추구하는 걸 우리도 다 추구하고 산다. 그들과 똑같다. 바뀐 게 없다. 그런데도 진짜 예수 믿는 건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주시겠다고 친히 그분의 말씀으로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으며, 사모하지도 않는 지금 우리의 신앙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약속하신 이 모든 은혜들을 지금부터라도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약속하신 그것을 내가 누리기 위해 무얼 해야 합니까?” 이런 반응이 정상이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누리도록 주신 것들이란 말이다. 이게 신자들이 누릴 영광이다. 이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은혜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나?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이 나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나와야지, 우리를 향해 쏟아부으시는 그 사랑의 위대함을 알고 확신함 가운데 머물도록 간구해야 하지 않겠나.
세상을 돌아보면 온통 비정상적인 것들 투성이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그 나라의 국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국익을 위해 충성하고 있고, 도시들마다 칼부림사건과 미치광이들로 인해 이 나라가 진짜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도무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시대이다. 너무너무 힘든 세상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세상에서 내가 폭풍 속의 고요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고, 결코 빼앗기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고, 언제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어떤 형식으로 어떤 방법으로 나를 오라 하셔도 나는 준비되어 있고 주님 만날 준비돼 있고 나는 은혜 가운데 살다가 그 하나님의 아버지 품에 안기리라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잠시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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