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손길이 나를 어루만지다(마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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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8월 2일 수요일
제목 : 주님의 손길이 나를 어루만지다
본문 : 마태복음 5장 10-12절 *신5
결단찬양 : 날 채워주소서 + 더 원합니다(후렴)
1. 세상이 욕하다
1) 대중, 평론가를 욕하다
최근 우연히 기회가 되어 범죄도시3를 보았습니다. 나름 전 작품에 대한 짜릿함과 나쁜 놈들 때려 잡는 쾌감에 이번 작품 또한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대치 만큼의 작품성이 있진 않았지만, 가볍게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한 영화평론가가 범죄도시3에 대한 ‘호평’을 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호평 받을 만한가?’ 에 대한 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지만,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재미로 보면 호평이 나올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라 말할 수 있는 이 영화평론가의 호평에 대중들은 반감을 가졌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반대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왜 이 영화가 호평 받을 수 없는가?’ 에 대한 논리 정연한 글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실망이다’, ‘다시는 당신의 평론을 보지 않겠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등의 조금은 격한 표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글들을 보며 ‘삭막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내 생각과 다르면 틀리다’ 라고 규정짓는 이 분위기가 참 무섭게만 느껴졌습니다.
2) 세상, 교회를 욕하다
내 생각은 아니지만, ‘내 생각과 다르면 틀리다’의 개념을 잘 지키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교회’ 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 그럼 넌 틀렸어. 구원받을 수 없어.’
전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생각합니다. 예수 외에 구원이 없죠. 이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음 가운데 긍휼보다는 방어적 태도나 보복성으로 그리 말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향해 소위 ‘개독’이라 욕하니 화를 참지 못해 반박하듯 또 저주하듯, “넌 안돼!” 라 말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부 교회의 잘못된 모습들이 비춰졌기에 ‘모든 교회는 건강하다’ 말하기에는 조금은 부끄럽지만, 일부 교회의 잘못으로 한국 교회 전체가 함께 욕 먹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은 “우리가 핍박을 견딜 면역체계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핍박을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느낄 것입니다. 같이 욕하고, 저주하고, 보복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모습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모습이 저와 또 여러분 안에 있다면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내는 분노섞인 소리는 ‘나는 그러지 않는데’ 에서 나온 ‘나를 위한 분노’ 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조롱거리가 됨에 안타까워하는’ 오직 ‘주를 위한 분노’ 였습니까?
2.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누리다
1) 주님은 늘 우리를 향해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계셨다.
어찌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거하며 기쁠 일보다 분개와 원망으로 가득 찬 시간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기준은 늘 ‘나’였을 겁니다. 그러니 나에게 맞지 않다면 그것은 곧 분노로, 원망으로, 실망으로 이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오늘 본문은 “박해 받는 것”에는 복이 있다 말하고, 우리가 “욕 먹고 거짓을 당함”에도 복이 있으며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말합니다.
박해에 기뻐하고, 욕 먹어도 행복해 하면 결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린다 보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성경은 우리게 그것을 또 해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아무런 이유 없이 욕 먹음에, 박해 받음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거나 ‘주’를 위하거나가 바로 그 전제 조건입니다.
‘전도’에 대한 경험들이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그럼 전도하다 거절과 욕을 먹은 경험도 있으실까요? 저는 군대 전역 후 전도 여행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 패기였고 또 그것이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늘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전도지를 건내면 대부분 받아 지나가지만, 일부는 받고 바로 땅에 꾸겨 버리기도 하고, 어느 누구는 예수를 욕하고, 저를 욕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였고, 또 나름 여린 마음에 이런 반응이 낯설 뿐 아니라 마음을 참 아프게 하여 늘 즐겁다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건 마지막 완주 후 ‘주를 위해 욕 먹음'이 원망이기보다 기쁨과 즐거움이 훨씬 컸습니다.
그리고 이때 알게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향해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고 계셨구나. 그리고 지금껏 그리 해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겠구나” 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리 따뜻하시고 정 많으신 하나님의 손길은 저 뿐만 아니라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자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은 어루만져주고 계십니다.
바라옵기로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박해와 핍박이 억누르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 모든 것을 어루만져 위로케 하시는 은혜의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손길을 누리려면 : 1. 핍박은 당연한 것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우리가 누리기 위해서 먼저 “예수 믿는 자에게 핍박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예수 믿어 핍박 받음을 ‘당연하게’ 여깁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 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만약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였더라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일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였기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함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기보다 핍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우리게 주어진 핍박을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A. 사례 : 1. 풍랑 위 두려움에 놓인 제자들
마태복음 8장에 풍랑 위 배에서 잠을 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찌하여 무서워 하냐 두려워 하지 말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미 이들은 수도 없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풍랑 위에 예수님과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상황이 긴급하니 두려움에 완벽하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런데 이를 인간이 단순히 악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악하기에 그럴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상황이 벼랑 끝에 놓였음이 더 클 것입니다.
B. 사례 : 2. 두려움에 휩싸인 아돌프 히틀러
마르틴 니묄러라는 독일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늘 맞서 싸워야 했던 자가 악명 높은 아돌프 히틀러 입니다. 그러던 중 1933년 이들이 첫 대면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르틴은 뒤에서 이들의 대화를 뒤편에 서서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 하고 집에 돌아가 아내가 ‘인상 깊었던 대화가 있느냐?’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총독 친구,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보니 눈에 보일 정도로 단단히 겁을 먹었더군.”
C. 예수를 믿는다 하여 핍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
이처럼 극한의 상황에 놓일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두려워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핍박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여 질병으로 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남들 걸리는 질병 우리도 걸리고, 남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 우리도 겪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 해서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과 확연히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고통스럽고 여전히 괴롭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광풍을 겪으면서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길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능히 이겨내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겨내십시오.
3) 하나님의 손길을 누리려면 : 2. 무엇을 하던 주를 위하여 하라
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따스로운 손길을 누리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던 그것이 “주를 위해” 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핍박 받고 욕 먹는게, 우리가 똑똑해서 욕 먹는 것이고, 우리가 너무 뛰어나서 핍박 받는 것이라 말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똑똑하고 잘생긴걸로 욕 먹고 핍박 받아야 한다면, 저는 무기징역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능력, 권력, 재물, 외모가 뛰어나 핍박 받음이 아닌 “주를 위해” 일할 때 핍박 받는다는 것입니다.
A. 사례 : 1. 나다나엘의 순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모두가 순교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는 흔히 어떤 순교를 했는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인 ‘나다나엘’의 순교를 언급해보려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을 보면, 나다나엘에 대하여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설명하며 간사한 것 하나 없는 순전한 마음의 사도라 표현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이스라엘의 학자이자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자, 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드립니다.
그렇게 주를 위해 섬긴 자의 결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몇 개의 문헌들을 보니 주로 ‘소아시아'에서 전도의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러다 붙잡혀 곤봉과 같은 몽둥이에 맞아 피부가 다 벗겨 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문헌은 모래 주머니에 담겨져 바다에 던져 졌다고도 하며, 어느 문헌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후 바다에 버려졌다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주를 위해 살던 그의 삶은 핍박과 고문과 고난으로 채워졌지만,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자라는 겁니다.
B. 사례 : 2. 힘듬보다 주를 선택한 자모실의 사람들
우리의 삶과 달라 ‘나는 아니겠거니’ 싶지만, 최근 제가 어느 한 교회에서 딸을 안고 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안고 있으면 내려 달라해, 내려 놓으면 안아 달라해, 주보를 보곤 달라 해서 주었더니 꾸깃꾸깃 접으며 방해해, 성경책 달랬더니 찢어놔. 그래서 저는 그때서야 ‘자모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얼마나 힘든 예배를 드리는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힘든 중에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저 출석했어요’ 같은 눈도장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정말 주님의 손길을 누리고 싶어서’ 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힘듬보다 더 크기에 자리를 지키는 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C. 무엇을 하던 주를 위해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화의 화두는 무엇이냐면, 제사에 사용된 음식을 먹어도 되냐는 것입니다. 누구는 ‘먹어도 된다’ 누구는 ‘어찌 제사상에 올라간 것을 먹느냐’ 라는 것인데, 이때 사도 바울은 ‘먹어라. 제사에 사용됨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모든 음식을 만드시고 허락하신 이가 누구인지를 알고 먹어라. 누가 음식을 만들었느냐? 하나님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에 사로잡힌 자들은 모든 삶의 주권이 주께로 바뀌게 됩니다. 무엇을 하던 그것이 다 주를 위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어루만지실 것 입니다. 어떤 손길보다 가장 따뜻하게 말입니다.
4) 하나님의 손길을 누리려면 : 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누리는 마지막 방법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 입니다. 본문 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팔복의 결과, 큰 상이지만 먼저는 우리를 향해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애통하는 마음에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박해 가운데 기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A. 사도 바울의 외침, 항상 기뻐하라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그렇게 살아야 하나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게 어떤 의미입니까? 매일을 깔깔 거리며, 미소를 잃지 말고 살아내라는 겁니까? 만약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저는 매일 말씀을 지켜 살지 못하는 자괴감에 빠질 지 모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그저 실 없이 히히 웃으며 지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식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속이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찌 늘 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에 늘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어찌 지내요?” “좋아요!” / “잘 지내시죠?” “오 그럼요 잘 지내죠” / “결혼생활은 어때요?” “좋죠” / “가정은 어때요?” “좋아요. 평안해요”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표면적으로 “좋아요!” 라고 대답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함은 ‘내 삶이 힘겨운 중에도 내게 기쁨을 주는 평안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썼던 이 편지는 사실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그가 어떤 모습으로 입성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6장 22절부터 기록을 보면, 그는 “무리로부터 옷을 찢김 당하고 매를 맞고, 또 많이 맞은 후 옥에 가둬지고 발에는 차꼬를 차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매우 불편한 상황” 가운데 놓였습니다.
어쩌면 그의 몸은 시퍼런 멍으로 도배를 했고, 군데 군데 맞은 상처가 흔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데살로니가로 입성할 때 다리로 성치 못해 절뚝 걸이며 입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죠.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 교인들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완벽한 본보기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모습을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그를 보며 내 고단한 삶에도 주님께서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위로 하시고 평안과 또 희망을 꿈꾸게 하심을 볼 수 있는 아주 완벽한 본보기 였을겁니다.
B. 핍박 중에 기뻐하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졌다
그렇게 핍박을 견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큰 상입니다. 그 큰 상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것보다 큰 영광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죄로 말미암아 하찮은 죽음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 진다는데, 이 보다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라옵기로는 우리가 감히 값매길 수 없는 큰 상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3. 그런 세상 만들기
1) 함께 기도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알면 알수록 핍박과 고난이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숙명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를 ‘괴롭힘’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며 과정이라 여기려 합니다.
하지만, 이를 혼자 이겨냄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조금만 눈을 들어 보아도 참 많은 것이 고통에 신음하는 성도들 아닙니까? 질병으로, 이별로 아파하는 성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함께 고난을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2) 어린이부 아이들이 하나님의 손길을 누리는 시간이 되게
더 나아가 내일 모래부터 진행되는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교회 되길 원합니다. 이들이 진정 성경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손길을 누려, 삶이 변화되고, 학업과 친구 관계 속 어려움을 겪어 힘들어함이 끝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인내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기도로 중보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날 채워주소서 + 더 원합니다(후렴)
[기도제목]
1) 핍박 가운데 원망보단 매순간 주를 떠올리며, 주를 위해 일 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날마다 즐거워 하며 기뻐하게 하소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기쁨과 소망을 주는 주를 보게 하소서
3)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주를 만나 삶이 변화되는 은혜를 경험케 하소서
4) 준비하는 모든 손길 가운데 영육간의 강건함과 주가 일하심을 경험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