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하게 하게하는 힘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8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시편 70:4(구약 852쪽)
설교제목: 중보기도하게 하게하는 힘
시편 70:4 NKRV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자는 매우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제목에서 ‘기념식’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레위기에 등장하는 기념물과 같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기념물은 레위기에서 ‘소제’ 곧 곡식제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가난한자들이 행하는 제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늘 시편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 말합니다. 그것이 시인의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처한 삶의 형편을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또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고난이 결코 견딜만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시편 1절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 ‘속히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자신이 처한 고난의 급박함을 이야기합니다. 또 오늘 시편 3절에 보면 시인은 그들을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매우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시인은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남들을 탓하거나 도리어 하나님을 탓하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내려 놓는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한편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는 없었는지를 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믿기에 시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의 내용 가운데 제가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입니다. 다시 한번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70:4 NKRV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고난 중에 있는 시인이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자신과 같은 처치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더 정확히는 이러한 시인의 모습이 매우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고난에 처한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돌보기에도 힘겨울텐데, 그 고통을 함께 겪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참 놀랍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내 코가 석자다’라는 말 말입니다. 자신의 문제 앞에서 우선순위가 자기 자신이지 그것을 넘어 타인에게로 관심이 뻗어가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관해서 무신경하지 않고 같이 아파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나와 같이 여기는 태도로 부터 비롯될 텐데요. 그것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분명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더 정확히는 사랑하는 타인이 아픈데 그 아픔이 나에게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지 저로서는 잘 모르지만,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종종 그렇게 말하잖아요. ‘너 먹는 것만 바도 배부르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타자를 위할 수 있고 그를 대신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한편 오늘 시편의 기도가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시인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시인의 고난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인은 자기의 고난이 아니라, 공동체의 고난을 마치 자기의 고난과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고난 중에 타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고난 가운데 있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도 그 고난을 경험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시인의 기도가 참으로 성숙한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지만, 먼저 저의 문제에 집중하고 저의 원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물론 종종 같이 기도할 제목들을 받아서 중보기도를 할 때도 있지만, 분명 저를 위한 기도 보다 중보기도의 시간이 다소 짧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많은 분들을 위해서 여러 기도 제목을 받고 기도하려 애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만족과 유익으로 채워지는 기도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의 시인의 기도는 참으로 성숙한 기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그가 고난을 겪는 중에 중보기도를 했는지, 아니면 저의 상상처럼, 기도자는 처음부터 고난에 처한 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기도자가 자신을 넘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것은 자녀가 부모를 생각하게 될 때부터가 아니겠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던 이가 자신을 넘어서 부모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성숙해졌다는 것일 겁니다.
저는 이것이 하루 아침에 일어날 일이라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제가 목회자로써 가장 부족함을 느끼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성도님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들을 때가 있는데, 제 경험 밖의 것들은 쉽게 공감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저의 부족한 공감 능력을 한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더욱더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그것은 주의 깊게 그 대상을 관찰하는 일이고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의 깊게 볼 때, 이전에 미처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 대상에 관한 사랑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주목하고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관찰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심이 결국 나를 넘어 타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공감을 가능케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예수님도 그와 같이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그 분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땅 가운데 오셨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중에 참여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신이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의 고통 중에 참여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라건데, 저와 우리 성도 분들께서도 나를 넘어서 타인을 위해 기꺼이 중보기도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더욱더 사랑하기를 힘쓸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