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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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68:5(구약 849쪽)
설교제목: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시편 68:5 NKRV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의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2013년에 만들어진 “설국열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동명의 프랑스 만화를 리메이크 한 것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기상이변으로 빙하기가 온 지구는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가 끝임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 기차는 생존자들의 유일한 거처이고 유일한 터전입니다. 기차 밖은 도무지 생존이 불가능한 추위와 환경으로 기차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차 안의 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기차의 각 칸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꼬리로 내려갈수록 빈곤한 삶에 놓이게 되고 엔진시설이 있는 머리로 올라갈수록 호화로운 삶을 누립니다. 이와 같은 불평등은 결국 꼬리칸에 있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혁명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한 주동자의 선두로 꼬리칸의 사람들이 머리칸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탄한 과정은 아닙니다. 꼬리칸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계속된 저항이 있습니다. 그런대도 꼬리칸 사람들의 의지가 강력했기에 결국 마지막 머리칸인 엔진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일을 주도했던 주인공은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합니다. 아주 작은 아이 하나가 엔진실에 갇혀 부속품을 교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열차가 멈추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아이의 희생이 담보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판타지로 구현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우리 세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계가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약자들의 희생이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는 히브리인 곧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집트의 왕이 열 가지 재앙을 거치면서도 또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고자 했던 것은 그와 같은 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집트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왕국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히브리인 곧 이스라엘 백성들 쉽게 나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약자들의 눈물과 피를 통해서 부와 권력을 거미진 자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또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상층부로 갈 것을 기대하며 힘써 살아가지만, 자신이 속한 층계를 넘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은 설국열차에서 꼬리칸의 사람들이 머리칸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항을 받았던 것처럼, 많은 저항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일이 과거보다 더 어렵고 복잡해졌습니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통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쉽게 계층을 넘어서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거머진 사람들이 그것을 대대로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계층에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막으며 자신의 자식들을 더욱더 출세키려고 혈안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는 참으로 비정하고 계급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계급적인 사회의 모습을 지닙니다. 부모의 직업이 자식에게 물려지는 방식으로 세습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꼭 부당한 방법이 아니라 적법절차에 따른 것인데,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데 복잡한 철차를 만들어서 참으로 점점 더 개천에서 용나기가 어려운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을 보니깐, 하나님은 참으로 다르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시편 68편 5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68:5 NKRV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이 참 길기도 하고 복잡한 내용인데요. 사실은 그 내용의 중심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비유되고 상징될 수 있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 따르면,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재판장’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전쟁이나면, 고아와 과부가 많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끌려가는 이들은 전쟁에 나갈만한 젊고 힘있는 남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이에 따른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것은 오로지 그 가족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로 출전한 전쟁이라도 또는 그와 같은 대의명분으로 희생을 당하는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세상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고, 그러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 아님을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약자를 배제하거나 이용하고 착취하는 방식과는 크게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변호하시고 그들의 편에 서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희생양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 간단히 설명하면 세계의 모든 곳에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약자가 희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민담이나 전설에 관계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마을에 흉년이 들거나 어떤 큰 문제가 생기면, 여자들이나 아이들을 어떤 신에게 혹은 어떤 곳에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희생을 통해 그 사회의 문제가 사라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세계의 공통적인 모습으로 보여지는데,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생긴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을 당하신 분은 가장 약한 자가 아니라 가장 강한 자인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어떤 문화에서도 어떤 나라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이 기독교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사람을 아끼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고 어떤 승리를 이루실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만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세상의 어떤 신도 자기를 희생하거나 모든 사람을 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인데, 이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큰 자부심을 가지고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바라건데, 저는 오늘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분이시고 우리를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끼고 귀히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삶을 참으로 복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자부심을 갖고 주님의 넓은 품에 안겨 신앙생활 해 나가는 저와 우리 성도 분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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