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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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62:1(구약 846쪽)
설교제목: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시편 62:1 NKRV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 분들은 기다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때로 기다림은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만나는 그 시간을 손 꼽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함께 보낼 즐거운 시간을 생각하며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하는 등의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관해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진 기다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기다림은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난에 처한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온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 이에게 산다는 것이 지옥같을 수 있고 회복의 때가 소멸된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날이고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로움을 더할 뿐일 수도 있습니다.
기쁜 기다림이야 우리에게 크게 해될 것은 없지만, 슬픈 기다림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니 이러한 때를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어쩌면 슬픈 기다림의 순간에는 고통이 너무커서 이 일이 끝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 기다림의 끝에 달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기다림의 과정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을 통과 했고 그 기다림이 괴로웠던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의 순간 또는 슬픈 기다림의 순간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오늘 시인은 교훈을 줍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 고통의 순간을 통과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의 순간에 우리에게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 분들께서는 절절하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바로 응답을 주시던가요?
아주 간절하게 기도해도 우리에게 즉각 응답이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버터내는 일이 그렇게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고난 처한 여러 인물들을 봅니다.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욥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날 원인 모를 고통 속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그가 당대에 참으로 신실한 이여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리며,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욥기 1:21 NKRV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렇게 욥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 가운데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되었고 욥은 그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욥기 3:3 NKRV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당대에 하나님께 온전하다 평가받은 욥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통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 기다리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시편의 시인이 전하는 교훈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고통의 순간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욥이 침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욥기는 42장으로 이뤄진 책입니다. 하나님은 욥기 38장에 이르기까지 욥에게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욥기 38장 이르러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자 비로소 욥은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욥의 침묵의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침묵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교훈은 참된 지혜입니다. 고통의 순간에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생각케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텐데요. 20세기 일본의 소설가 엔도슈사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17세 일본에 실제로 있었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포르투칼에서 일본 선교를 목적으로 보낸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얘기가 로마 교황청에 전해집니다. 이에 이것을 조사하고자 다시 포르투칼에서 두 명의 신부를 일본으로 보내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는 것에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일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통해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후미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진 나무나 금속판을 밟도록 하여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배교 사실을 조사차 들어온 두 명의 신부도 붙잡히게 되고,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를 받습니다. 한 명의 신부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바다에 빠트려져 순교합니다. 다른 한 명의 신부도 이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함께 갇혀있던 일본 기독교인들이 고문 받는 이유 앞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 곧 후미에라는 예수님이 그려진 그 판을 밟으면, 일본 기독교인들이 모진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에 고뇌하며 기도하는 신부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결국 그 신부는 일본 기독교인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후미에를 밟으로 가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발의 아픔을 알고 있다.” 이에 그 신부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었음을 말입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 같이 신음하고 참여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고난 중에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이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충분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 이로부터 반드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고, 우리는 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시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시편 62:1 NKRV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늘 이와 같은 시인의 교훈을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다림에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당장에 고통이 나에게 그것을 어렵게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우리 성도 분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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