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3 양청] 소요리문답 11-1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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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문.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권능 있게 모든 자신의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12문. 하나님은 창조된 상태로 있는 사람을 향하여 어떤 특별한 섭리의 행위를 행하셨습니까?
답.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서,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과 생명언약을 맺으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먹는 것을 사망의 벌로 금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단지 예수믿고 천국간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복음이 본질이지만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면 복음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늘 내용도 사실은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잘 따라와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소요리문답을 공부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숲을 보는 것이다. 왜 이런 질문이 여기에 등장하느냐 이다. 섭리라는 것이 나오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것이 창조였다. 창조와 섭리, 이 두 가지를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실행”이라고 말씀드렸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창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겠다고 작정하신대로 그대로 실행하셨다.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대로 창조되었고, 그 뒤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섭리를 통해 이 모든 것들을 붙잡고 역사하신다.
창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지만, 하나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했고, 또 하나는 사람을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섭리 역시도 세상역사를 섭리하심과 동시에 사람에 대한 섭리를 말씀한다. 이것이 오늘 살펴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1문은 세상을 섭리하시는 것. 그리고 12문은 사람을 섭리하시는 이야기이다. 작정에 대해 7-8문이 이야기했고, 9-10문이 창조, 11-12문이 섭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그림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섭리의 방식은 무엇이냐. 이 말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섭리의 사역을 하시느냐 이다. 11문을 보라.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권능 있게”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세상을 섭리하는 하나님의 방식을 볼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 같으면 이렇게 안 할거야,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안할거야" 여러분, 혹시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를 본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주인공이던 브루스 라는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렇게 안할거야" 라는 생각을 하다가 진짜로 이 사람이 이메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다. “니가 하나님 한번 해봐라" 라고 하면서 전능한 권한을 갖게 된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자신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보다 모든 것들을 탁월하게 해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무한한 권능의 자리로 올라서고 보니 자신에게 무한한 지혜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게도 지혜와 경영의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달라서 어떤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을 능력이 있을지 몰라도, 모든 존재들이 얽히고 섥힌, 그 복잡하게 꼬여있는 관계 속에서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고 최고의 선을 이뤄낼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권능은 있지만 거룩과 지혜가 없는 지도자들을 보게 된다. 또한 지혜는 있지만 권능과 거룩이 없는 지도자들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거룩과 지혜와 권능이 무한하셔서 이를 통해 섭리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생각해보라. 우리교회 금요기도회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찬양을 부르고 있는데 어떤 분이 급하게 방송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찬양을 목청껏 하고 싶은데 전체적인 볼륨이 너무 작은것 같아요! 소리좀 키워주세요!” 그래서 볼륨을 조금 높였더니 또 어떤 분이 급하게 방송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에요! 소리좀 줄여주세요" 그래서 소리를 다시 좀 줄였다. 그랬더니 몇 분 후에 다시 또 다른 어떤 분이 찾아와서는 “목사님, 볼륨좀 올려주세요!” 또 조금있다가 다른 분에게 카톡이 온다. 소리가 너무 크다고. 우리는 늘 이렇다. 누군가를 만족시키려면 다른 누군가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모두 만족시키는게 불가능한 것 같다. 세상 역사를 보아도 어느 왕, 어느 지도자, 어느 지도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었던가.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섭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지혜와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과 같다.
3번의 섭리의 대상을 보라. “모든 자신의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 모든 일에 미친다는 것이다. 시103:19 를 찾아보자.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새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하나님께서 붙들고 다스리신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경험하는 자연현상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며, 들의 풀과 백합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라가고, 새들이 날아가고 바람이 불며, 낙엽이 지고 떨어지며 새싹이 돋는 이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이어서 4번, 섭리의 3요소는 보존, 협력, 통치이다. 먼저 보존에 대해 생각해보자. 창조세계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보존된다. 보존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말씀이 있는데, 히1:3 을 찾아 읽어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내가 제 아무리 내 생명을 위해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열심히 운동해도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1분 1초도 생명연장을 할 수 없다. 만물을 보존케 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섭리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협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창조와 섭리의 차이 중의 하나는, 창조는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다면, 섭리는 피조물과 같이 행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이스라엘을 직접 인도하셔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았다. 고레스 왕에게 감동을 주셨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과 함께 역사를 섭리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협력하느냐, 50대 50이런 의미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개념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선한 사람은 선한 일로, 악한 사람은 악한 일로 하나님께서는 다 하나님께서 용도에 맞게 지으셔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을 보라.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결국 노예로 팔았다. 하나님은 그들이 동생을 미워하도록 부추기진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를 막지 않으셨다. 허용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요셉을 보내셔서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대단하다. 어떻게든 그분의 일을 이뤄가신다는 것이다.
바로와 군대를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거두셨다. 그러니 그들이 더욱 완악하여졌다. 고난의 대명사였던 욥의 대적들을 생각해보라. 갑자기 사탄이 그를 시험하고자 했고, 스바사람이 일어나고 갈대아 사람이 일어나 그의 재산과 그의 가족들을 모두 쳤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 그렇게 하게 하도록 허용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더욱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고, 그 섭리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이뤄가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강제하지 않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통치하신다. 잠16:33 말씀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다들 잘 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빌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시지 않고, 의지와 이성과 감정과 욕구를 가진 존재로 만드셔서 기쁨으로 그 일들을 감당하게 하신다 한다. 방금 읽은 말씀에 몇 절 뒤로 넘어가서 빌2:15 를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마귀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로서 잠시동안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용하셨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고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은 지금 통치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최고의 선으로 보여주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자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절망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때로는 예수를 믿는 자들도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때로는 진짜 기가 막히고 한숨만 나는 인생의 막다른 길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기에.
이제 교재 5번에 사람과 생명언약을 맺으셨다는 부분을 볼 것인데, 교재 상단에 12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서,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과 생명언약을 맺으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먹는 것을 사망의 벌로 금하셨습니다” 생명언약이란 무엇인가? 적을 수 있으면 메모해 두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자녀들의 순종에 축복과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신 자기 맹세가 바로 생명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약속을 굳이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과 약속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 순종하면 뭘 해 줄게” 하고 약속을 한다. 왜 이런 약속을 하는가? “내가 너에게 선한 부모야” 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도 굳이 우리 눈 높이에서 약속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선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오셔서 약속을 주신다.
7. [(12-2)언약의 조건]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A. 인간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완전한 순종 ? 즐거운 순종! B.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실패했고, 아담의 후손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로 태어나 실패한다. C.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완전한 순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표현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복을 약속하셨다. “너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해 완전한 순종을 할 때 이러이러한 복을 줄게" 여러분, 어떤 분위기에서 이 약속을 주셨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아이고, 하나님께서 또 우리를 못살게 구시려고 또 억압하려고 명령을 주신다. 이게 아니다. 너무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시고 “얘들아 너희가 이것을 누리고 살아가려면 내 말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란다”. 완전한 순종은 곧 즐거운 순종이라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런지 모르지만, 그 의지는 사실 죄에 영향을 받은 의지일 뿐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도 했고, 죄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류는 그 죄로 인하여 함께 타락하였고, 함께 죄로 부패하였다. 따라서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죄를 지을지에 대한 자유 밖에 없다. 세 평 짜리 감옥 안에서 왔다갔다 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담이 가졌던 자유의지와 오늘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의 차이점, 이해가 되시는가?
아담은 에덴에서 완전한 순종, 곧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 그의 순종을 이뤄낼 수 있었다. 마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족하여 넘어질만한 온갖 지뢰들을 매설하시고, “저놈 저거 넘어지나 안넘어지나 보자”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오직 단 한가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만 주셨다. 만일 바로 왕이 요셉의 꿈 해몽을 듣고, 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하겠다 싶어서 요셉에게 전권을 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오직 이것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뭘까? 보좌이다. “내가 너에게 전권을 주는데 모든 권세를 줄 것인데, 너에게 그 모든 권세를 준 이가 바로 나임을 잊지 말아라, 내가 보좌에 앉아있음을 잊지 마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주신 명령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아 왜 하나님께서는 저거 못먹게 하신거야! 왜 내 자유를 억압하시는거야?” 할게 아니라,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풍요, 이 행복,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책임지실 분이야" 이런 태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사망의 벌로 금하셨다. 창2: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명령이 함축하는 바는 상과 벌을 함축한다. 잘 지키면 상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종의 조건으로 약속하신 영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타락한다. 영생을 잃어버린다. 영생은 무엇인가? 요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즉,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런에 이러한 영생을 잃어버렸다? 즉 하나님과의 사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을 통해 사망의 벌을 경험한다.
아담은 생명언약을 맺었다는데, 이는 나중에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를 다른 말로 행위언약이라고 말한다. 너가 이렇게 하면 살고 이렇게 안하면 죽는다. 행위에 기초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순종이라는 행위는 영생을 얻는 조건은 아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어떠한 결과물이 나오려면 그 과정이 결과물과 대략 비슷해야 한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러분, 꼭 돈으로 비유를 들어서 죄송하지만, 1000원을 투자해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과 10억을 들여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같을 수 있을까? 이레가 얼마 전에 코나를 뽑았는데, 코나를 사는 기쁨과 벤트리를 사는 기쁨이 서로 같을 수 있을까? 오락실 요즘 얼마 하는지 모르겠는데, 100원을 넣으면 100원어치의 재미를 볼 뿐이다. 크게 잡아봐야 100원으로 천원어치의 재미를 볼 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안먹는 행위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포함하여 앞으로 주실 더욱 큰 복들을 받게 된다? 인풋과 아웃풋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한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서 혜민이가 너무 예쁘다. 작고 귀엽고. 그래서 내가 가진 뭔가를 그냥 막 퍼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냥 막 주기엔 좀 그러니까. ‘나 이것좀 도와줄 수 있어?’ 하고 퍼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생명언약을 범함으로 죽음에 이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언약으로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신다. 이는 나중에 20문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완전히 행위를 조건으로 주어지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행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다는 차원에서 행위언약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밑바탕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적용과 교훈.
첫째, 인생과 역사에 우연은 없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우연이란 없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언어에서도 우연은 없다. 어떤 작은 일들조차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조차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된다고 하셨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엇다고 한다. 우리의 사소한 영역까지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룻을 생각해보라. 모압여인 룻이 남편 죽고 아들들도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만 남았다. 둘째 며느리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고 따라왔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 이후로도 나오미가 하라는대로 룻은 순종한다. 결국 룻의 인생은 예수님의 족보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인생에서 우리들도 경험할 수 있을 법한 사소한 결정이다. 그런데 그 사소해 보이는 순종의 결정이 내가 한 결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대도 안되는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 것일까, 이를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여쭙게 되고 주의 뜻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잠25:21-22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원수에게 독을 먹이는 것은 쉬우나 꿀을 주는 것,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수를 먹이라 하셨을 때에는 내가 원수를 먹이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섭리를 믿는 신앙은 그야말로 대단한 신앙이 된다. 우리 집에 어려운 일이 당해도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는 강한 신앙으로 자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당장 다음장면에 일어날 일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 장면 뿐만 아니라 영원을 그분의 손바닥 안에 놓고 계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싸움을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행해야 할 믿음의 경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맞닥들이게 될 다양한 답답할법한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붙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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