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모호성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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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 12:1(구약 14쪽)
창세기 12:1 NKRV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믿음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어제 이 시간을 통해 나눴는데요. 제가 이번주 수요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단 또는 사이비에 관한 내용에 관해 살피고 있습니다.
이는 최근에 화제가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라는 것에서 비롯된 관심인데요. 이와 관련해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JMS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많았어요. 가령,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또한 그 JMS에 속한 이들은 진정으로 그 정명석이라는 교주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거예요.
이게 사람을 미혹할만큼 대단히 신비하고 매력적인 주장으로 들리시나요? 저는 누가 들어도 어이없고 황당하다 여길 주장으로 들립니다. 그것이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종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명석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요?
그래서 이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의 JMS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불편한 마음이 들었어요.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그러니까 과거에 JMS에 속했던 이들이 자신이 당한 피해를 폭로하는데요. 그들이 당한 불행에 관해서는 너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 대체 왜 그들이 한때 그곳에서 활동을 했는지 좀 답답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었어요.
되도록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피해를 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그들을 질타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이게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어요. 마치 그런거죠.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있어 났을 때, 잘못된 반응 중에 하나가 피해자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잖아요. ‘너가 그렇게 행동해서 또는 너가 그렇게 차려입어서’라는 식의 이야기 말이죠.
제가 사이비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거예요.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운데, 대체 왜 그런 바보같은 결정을 해서, 그런 일을 당했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그 사이비에 빠져서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이야기, 특별히 이렇게 기도했다는 내용을 들으면서 깨달았어요. 이런 기도를 했는데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주님은 사이비 교주를 뜻하는 것인데요. 그러니깐 자기 생각과 상식으로도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이 감당되지 않았던 거예요.
비상식적이고 추악한 행동을 벌이는 교주의 모습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이를 놓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본래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고요. 믿음은 본래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서 또 확인하게 되는데요. 다시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12:1 NKRV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성경구절인데요.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여줄 땅’이라는 거예요. 정확하게 어디로 가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은 확실성에 있지 않고 모호성에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100퍼센트 성공하고 안전한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로 갔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확실한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죠. 그러다보니 우리는 믿음의 문제 앞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불안해해요.
사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미래의 확실성을 얻고자 사주도 보러가고요. 한편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기도 해요. 왜냐하면 그 속에는 뭔가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어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대부분 거짓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단적인 예로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또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당장 이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요.
원래 우리는 그렇게 불확실한 존재이고 모호한 삶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오면서 또는 우리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믿음 안에서 선택하는지 몰라요. 가령, 우리가 앉은 이 의자는 안전한 것일까요? 의자에 앉기 전에 이상없는지 검사 안하셨죠? 또 우리가 걸어왔던 길은 우리가 타고온 자동차는 어떤가요? 확실히 안전하다고 정밀검사하고 오셨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과거에도 문제가 없었으니 믿고 어제와 같이 이전과 같이 선택하며 행동하는 것이죠.
그래도 분명한 것은 언제 어느 때 문제가 생길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물론 나름대로 예측하거나 예상해 볼 수 있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낡거나 망가질 수 있으니까요. 또 심지어는 매일같이 점검하면서 살필 수도 있죠. 그런데 삶의 모든 것을 그렇게 예측하고 살필 수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믿음 안에서 늘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때로는 가혹하게 다가오기도 하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100세때 겨우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저는 앞서 말한 사이비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서 그와 같은 믿음을 보았어요. 사실 그것이 올바르거나 좋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본래적으로 그렇게 모호한 것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신앙 안에서 상식을 초월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요. 과연 나는 저들과 같은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가 하고 말이죠.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상식과 내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또는 내 욕망과 내 뜻과 같지 않으면 그것을 쉽게 거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요. 물론 지혜롭고 영적인 분별력은 필요해요. 그러나 믿음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맞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믿음을 바로 세우는 일은 확실한 정답을 쫓는 길이 아니라, 모호한 지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에 있다 생각해요.
그리고 이 모호성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소망이나 가능성을 주기도 해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망 가운데 쫓았을 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보다 현재 자신의 확고한 삶의 터전을 더 믿고 따랐다면,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질 수는 없었겠죠.
그래서 우리는 모호한 삶과 믿음으로 인해 불안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이 하나님에 관한 신뢰로 가득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생각과 내 뜻을 쫓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 뜻을 삶에 우선순위 놓고 살아가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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