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요한복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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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1:47-51(신약 144쪽)
요한복음 1:47–51 NKRV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성경의 책들도 비슷하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굉장히 깊이 있는 책이라 여로모로 살필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복음은 쉽게 읽혀지는 특징이 있기도 합니다. 비유하자면, 깊이가 있는 맛있는 음식 같아서 누가 먹어도 맛있게 즐길 수 있지만,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복음서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이 책을 놓고 평생을 씨름해도 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제가 가진 지식의 한계들로 인해서 우리는 오늘 맛보기 정도로 그쳐야할 것입니다. 깊은 맛을 경험하고 싶으신 분들은 관련된 책들이나 설교들을 더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려고 합니다. 결국 복음서라고 불리는 책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요.
우선 요한복음에 관한 일반적인 특징들을 안내하면 이렇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다른 견해들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장로였던 요한이라는 견해도 있고 예수님의 12제자 외에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한 제자’ 또는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전통적으로는 사도 요한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정확한 정체는 모릅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깊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그리스 철학의 사상과 유대인들의 사상 이른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님 주변에 있던 인물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인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절반 가까이는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간혹 서민 혹은 빈민으로 이해될지 모르나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는 중상층에 가까운 자영업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특히나 당대에 사상을 대표하던 그리스 철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철학적 사상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깊어지게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거듭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니고데모처럼 다시 모태로 들어가 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 이 중생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중생이라고 사용된 말은 헬라어로 ‘아노덴’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사상을 반영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 특별히 플라톤의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흔히 이데아라고 불리는 진짜 세계가 있고 그것의 그림자인 가짜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에게 빛이 비춰지면 그림자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림자는 진짜 우리는 아니고 우리의 모습을 닮은 것에 불과한 가짜 우리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는 진짜 세계가 있고 그것을 비추는 그림자인 가짜 세계가 있음을 그리스 철학은 말합니다. 그리고 진짜 세계는 위에 속한 것이고 가짜 세계는 아래의 속한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래에 머물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그 위로부터 온 사람이 예수님이며, 자신을 통해서만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어떤 노력을 한다고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가 변화된 것을 보면, 그 후로 깨닫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의 이야기에는 심오한 철학 사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이 철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신학을 보다 정확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은 일전에 말했던 공관복음서와는 다릅니다. 그러니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같은 관점으로 기록된 복음서라는 말이며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가 거의 90% 이상입니다. 또 그 전개 방식도 매우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라고 말하는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또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1번 올라가셨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3번을 올라가셨습니다. 한편 이를 근거로 예수님이 33세 십자가에 달리셨을거라고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유월절이었는데 유월절은 1년에 한 번씩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에 관해서 설명할 것들이 더 많이 있지만, 아직 오늘 우리가 나눌 성경 본문에 관한 얘기도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 오늘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느냐입니다. 사실 이것도 공관복음서와 다른 요한복음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스스로의 정체를 직접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혹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총 7개의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나열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흔히 이것을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풀면, ‘나는 무엇무엇이다’라는 것인데, 이 무엇무엇이라는 말에 세상의 빵, 세상의 빛 양의 문 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래 이 말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은 자신이 이러이러한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시면서 그 속에 자신이 바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스스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복음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이야기의 반복인데, 그럼에도 이 말이 주는 의미를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이 만나는 장면이고 이 만남을 통해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다소 의야한 구석이 있습니다. 좀 엉뚱해 보이는 표현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죠.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을 때 보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굉장히 이상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일종의 율법을 상징합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배우는 장소로 많이 택한 곳이 무화과 나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화가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변되는 율법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였던 곳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그를 따르게 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또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된다’라는 것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짐작하실 수도 있겠지만,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 노숙하던 중에 만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흔히 야곱의 사닥다리라고 알려진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새로운 이스라엘을 열어갈 분임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참고로 야곱은 훗날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데, 예수님이 야곱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율법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분으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세상을 구원할 분으로 오신 분입니다. 관련해서 딱 한 가지 얘기만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시작과 끝은 496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깐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을 흔히 프롤로그 곧 도입부라고 하는데 헬라어로 보면 496음절로 이뤄져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21장은 에필로그 곧 맺음말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 보면 496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숫자는 어떤 숨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수님의 족보가 14대로 나눠져 있다고 했는데요. 이 14라는 숫자는 히브리어로 다윗을 숫자로 바꾸면 14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496도 어떤 단어를 숫자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말합니다. 한글성경은 이것을 ‘독생자’라고 번역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독종자’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써 독생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원래 모노게네스는 같은 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과 같은 종류의 신 곧 유일하고 동일한 존재의 독종자입니다. 요한복음은 사실 처음부터 끝가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것을 여러 이적들을 통해 나타냈지만 당시 사람들은 불행히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봅니다. 간혹 오늘날도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이라는 식으로 좋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식으로 격하시키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또 앞서 살펴본 복음서들이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 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일이 참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를 때,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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