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항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시작됩니다(마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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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3월 2일 목요일 새벽
본문 : 마태복음 15장 21-28절 *신25
찬송 :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Point Message : 1.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인가?]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으며, 또 종교에 따라 믿어야 하는 주체가 다르지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들이 모두 하나님과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지만, 부처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또 부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세상을 살 때 덕을 쌓아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의 목표를 보면 결국 구원이라기보다 그저 붓다같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내고자 힘쓰기는 하지만, 그렇다하여 예수님의 자리를 내가 대신하자고 힘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 자가 되고보니 자연스럽게 예수님처럼 살아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우리 삶에 있어서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이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가치와 방향성과 목표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도움을 청하는 자, 즉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22절을 보니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정확하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고백합니다.
구약의 말씀서부터 꾸준히 알려진 내용이기에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읽고 지키려 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오셨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그렇게 말씀을 읽고 또 읽었음에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까? 자신들의 교만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자 율법을 가까이 했다기 보다, 율법을 많이 읽음으로 인해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자가 되는 것이 이들 마음 가운데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며, 딱하기도 또 짠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절망적이고 막막하기까지도 합니다.
우리도 이 시간을 깨어 나와 기도하지만, 또 우리가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지만, 그 기도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닌 내가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부르짖기보다, 내 뜻과 욕심을 구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돌이켜 생각하여, ‘내 삶에 믿음의 주체는 누구인가? 정말 예수님을 내가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또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가? 나의 부르짖음의 주체가 가나안 여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인가?’ 를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옵기로는, 오늘 이 새벽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뜻에 초점이 가기 보다는,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주관자 되시는 주님께 초점 두어 기도하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Point Message : 2.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또 가나안 여인의 태도를 보며 우리는 배울점 하나가 더 발견됩니다. 이 여인의 간구함은 제자들에게 꽤나 걸리적 거리는 모습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23절의 기록과 같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라며, ‘주님, 이 여인이 너무 걸리적 거리니 빨리 치워버리시죠.’ 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런 제자들의 태도 속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자세를 놓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주 앞에 절하며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우소서” 라 간구했습니다.
사실 이 간구함에는 그녀가 얼마나 낮은 자세로 주님 앞에 나아왔는가를 보게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 앞에 나아옴은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기에, 이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해 나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구함은 무엇입니까? ‘나’를 도와달라는 겁니다. 즉 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며, 딸을 위해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은 눈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은 율법을 내세우며 정작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바리새인들과 대조되며, 자신 앞에 누추하기 그지 없는 이 여인을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처절함 속에서도 예수를 바라보았고,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모습에도 ‘그래, 너가 고생이 많구나. 너의 딸 내가 치료해줄게.’ 라 말씀하시기 보다, 그녀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26절과 같이 말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라 말씀하시며, 그의 딸이 낫게되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낮아졌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보다, 내 뜻과 욕심을 드러내기보다 주 앞에 낮아졌습니다. 자존심 하나 남기지 않고 바닥 끝까지 낮아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여인과 같은 낮은 태도를 주 앞에 보입니까? 아니면, ‘이건 안되고, 저건 안됩니다.’ 라 말하며 주 앞에 잴 것 다 재고, 나아가는 척만 하는 태도의 신앙을 보입니까? 신앙의 정도를 제가 알 수도 없고, 설명도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주 앞에 자복할 때, 온전히 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시작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믿음은 ‘크다’라는 표현으로 설명되어지지만, 이 안에는 온전한 믿음과 낮아지는 믿음이 모두 공존합니다. 그녀는 주 앞에 어떤 것 하나 잰 것 없이 오직 주만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 여인과 같은 자복하는 신앙, 항복하는 신앙이 되길 소망합니다. 내가 아닌 오직 주께서 일하시며, 그 일하심에 기꺼이 사용되어지는 우리의 삶 되길 소망하며, 또 그런 삶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우리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 새벽 기도하실 때, 다른 것 아닌 주만 바라보며, 주님과의 온전한 시간 보내며, 주께서 일하심을 기대하며 부르짖는 시간이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 이 시간 들은 말씀을 가지고
- 나의 믿음의 주체는 곧 주님이시니, 주 앞에 부르짖는 오늘 이 새벽되게 하소서
- 내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그저 주님 앞에 항복하여 나아가는 신앙의 크리스천 되게 하소서
2)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각자 가지고 나오신 기도제목을 가지고
- 신앙강좌를 인도하는 목회자들과 또 이를 함께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시간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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