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중심

출애굽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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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막 2. 자원하는 마음 3. 중심의 성막

Notes
Transcript

예배 공동체

성막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요. 하나님은 왜 광야에서 계속 이동하며 살아야했던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을까요?
사실 성막은 굉장히 불편한 작업을 반복해야 했어요.
광야를 떠돌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은 집이 없었죠. 그리고 수많은 가축들을 먹어야 했기에 광야에서 끊임없이 풀을 찾아 돌아다녀야만 했어요. 이동식 집을 계속해서 쳤다가 거뒀다가 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어요.
이것만으로도 엄청 귀찮고 피곤한 일일텐데, 그 것 외에 성막도 펼쳤다 접었다 해야 했어요.
단순히 사막에서 침낭 깔고 누워서 잠자고 해 뜨면 일어나서 움직이고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집을 설치하고 가축들을 두어야 하는 울타리도 만들었다 치웠다를 반복해야 하는 그런 그들의 고단한 삶 가운데, 성막까지 있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성막은 힘든데 더 힘들게 만드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이 “예배하는 공동체”로 바뀌기를 원하셨어요.
저는 오늘부터 저녁예배를 설교 하게 될 때 “예배하는 공동체” “성막”에 대해 나누려고 해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에 늘 임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그것을 함께 나눔을 통해 이 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제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해요.

자원하는 마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면서 폈다 접었다 했던 다른 이동식 집, 울타리들과는 다르게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 하셨어요.
디자이너가 무엇인가를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성막을 디자인하셨고, 이스라엘이 그대로 그것을 만들도록 하셨어요.
성막을 디자인하실 때 하나님께서 고려하셨던 것 중 하나는 위치였어요.
이스라엘의 진 한 가운데. 모두의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 바로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라 하셨어요.
12지파의 한 가운데 있었던 성막. 그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배를 떠올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가운데 성막을 짓도록 위치를 잡아주시면서 동시에 이 장소는, 예배하는 장소이다.
즉 너희들과 내가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라는 것을 같이 보여주시는거죠.
성막은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딱 위치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성막과 성막과 관련된 모든 기물들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성막 안을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다 예배에 집중하기 위한 것들이었어요.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총 감독을 맡으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세워주셨어요.
성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관여하셨고, 하나님의 일하심 즉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와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드리면서 만들어졌어요.
성막은 예배하는 곳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예배해 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억지로 사람들 불러 모아서 이제 여기에서 예배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모여서 함께 예배 장소를 만들었어요.
그 예배 장소를 함께 만들어가면서 그들은 점점 예배하는 공동체로 변해가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오합지졸이었던 이스라엘. 중구난방으로 각자 흩어지고 갈라진 마음으로 예배하던 이스라엘이 성막을 하나님과 함께 지어가면서 그들 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예배의 자리를 만들어나가면서 그들 스스로에게 “진짜 예배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던져지기 시작해요.
예배를 드리는 것에 있어 꼭 성막 혹은 이러한 건물이라는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혼자만 서있는 것 같은 그 광야에서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매일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예배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그게 바로 성막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시간 동안 마음이 힘들고 흔들리면 고개를 돌려 중앙에 있는 성막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떠올렸고 새 힘을 얻어 다시 살아갔어요.
그들이 성막을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막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함께 하고 계신다. 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출애굽을 하며 여러 기적을 보았으나 여전히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믿음 없이 공존하던 그들에게 있어, 성막은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곳이었죠.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하나님에게 성막이 필요했을까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정말 하나님이 거할만한 공간. 와서 쉴만한 공간이 필요했을까요?
이 모든 우주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인데 진짜 성막이라는 이동식 건물이 필요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공간도 필요 없어요.
그리고 성막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거하시기에는 좀 많이 누추해요.
성막은 10x30규빗으로 지어졌어요. 가로 5미터 세로 15미터에요.
성막은 황금이 많이 들어간, 황금의 집이니까 크기와 상관없이 그래도 무시하면 안 된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애굽의 왕들 중 가장 영향력 없었던 왕의 무덤에 있는 작은 방의 크기보다도 작아요. 또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에 들어갔던 좋은 백향목 나무처럼 최고급 자재들로 지어진 것도 아니에요. 또 성막이 으리으리하게 멋있지도 않았어요.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거주하는 천막의 모양이였어요.
하나님을 위한 공간. 하나님이 쉴 공간 치고는 좀 그렇죠? 광야니까 좋은 것들을 구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요.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로 지어진 곳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가져왔던 모든 금과 귀중품들을 다 가지고 와서 녹이고 활용해서 성막을 만들었어요.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을 기꺼이 드려서 만든 것이 성막이에요.
만약 성막을 사람들이 디자인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만들었다면, 광야에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건물을 지었을거에요.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디자인 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사실 최고급의 건물, 삐까뻔쩍하고 으리으리한 건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성막의 위치는 정 중앙이라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성막을 보며 하나님을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예배를 상상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막을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드리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보고 나를 떠올리는 것은 좋지만,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성막을 보고 계속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건물에서 하나님이 아닌 성막을 더 사랑하고 마음에 품게 된다는 것이에요.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성막을 짓게 하셨는데, 성막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하며 성막을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여기는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직접 만들게 하지 않고, 디자인하고 감독하셨던 것이에요.
사람이 만들면 또 욕심이 들어가게 되거든요. 만들고 나서도 내가 만들었어. 내가 여기에 보탬이 되었어. 하는 으쓱한 상황이 반드시 생기고 그렇다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만든 성막의 의미가 심하게 변질되고 지저분해 질 수 있었어요.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랬어요. 내가 이 성막에! 라고 하면서 의미부여하지 않고, 성막을 성막 이상으로 보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성막을 보며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을 찾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혹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장소들이 여러분에게 있나요?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을 때 혹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나는 그런 장소들이 있을까요? 아마 그런 곳이 있다면 인생에서 정말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거에요.
저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어요. 바로 필리핀이에요.
9살 때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늘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자랐어요. 그런데 문제는 경험할 기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부딪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잖아요? 특히 선교라는 것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문화, 가치관, 역사 등등 완전 모든 것들이 다른 곳에 가서 살면서 그들과 동화되어야 하는데, 이론으로 공부하는 것에는 큰 한계가 있잖아요.
군대에 갈 때부터 전역 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이 있었어요. ‘하나님 저에게 선교의 기회를 주세요. 제가 정말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살면서 부딪치고 깨지고 선교에 대한 부분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복학을 했죠. 당시 저는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었어요. 3+1이라서 중국을 1년 다녀와야 졸업을 할 수 있었어요. 중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니, 어쩌면 그 곳이 저에게 있어 선교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계속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아무런 마음을 주지 않으시는거에요. 과에서 시험을 보고 5-6군데 지역의 학교를 지망해서 가야하는데, 이상하게 시험 준비도 안되고, 시험을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그래서 시험 등록을 하지 않았어요. 교수님들이 전화오고 수업시간마다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보셨는데, 웃으면서 넘겼어요.
너무 마음이 답답한거에요. 동아리 방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자취방에서도 기도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물었어요. 역시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답답해하던 중 주일 설교를 듣는데 담임목사님께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로 말씀을 전하셨어요. 그래서 어라? 하면서 청년부 예배를 갔는데, 공교롭게도 청년부 목사님의 설교 본문이 똑같았어요. 각자 다르게 준비하셨는데 본문이 같았던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시나 싶어 조금은 시원한 마음과 찝찝한 마음을 갖고 학교를 갔어요.
나름 기독교 학교라 여기저기 이달의 말씀이 걸려있거든요. 아무 생각없이 채플실을 가다가 고개를 딱 들었는데 또 잠언 말씀이 적혀 있는거에요. 그래서 ‘아 이건 가지 말라고 하시는거다.’는 마음이 들어서 2학년 2학기에 중국을 가지 않고 3학년 때 가겠다고 교수님께 말했어요. 사실 말이 안 되거든요. 중국 안다녀오면 3학년 2학기 수업을 들을 수 없거든요.
그리고 나서 청년부 목사님과 연락이 되었어요. 내가 필리핀으로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는데 같이 가자. 뭔가 조작한 것 같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죠. 여러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에 가게 됐어요. 아주 패기 넘치게 갔는데 가자마자 일이 터졌어요.
말 한마디를 못하겠는거에요. 영어 선생님은 한국어를 모르죠, 나는 영어를 모르죠. 도대체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죠. 그때부터 땅굴을 파기 시작했어요. ‘나같은 놈이 무슨 선교를 한다고. 영어를 10년 넘게 공부했으면 뭐하냐 아무 말도 못하는데. 이러면서 무슨 선교사님을 도와 선교활동을 한다고. 나는 진짜 뭘 해도 안되는 놈이야.’ 라고 생각을 했어요.
마음은 급한데 영어는 늘지 않고, 선교사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어요. 3-4개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지쳐갔어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언어가 되지 않으니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없고 그들의 문화나 가치관 등이 점점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삶을 포기하려 했어요. 도움도 되지 않고 밥만 축내고 있는데 그냥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야겠다. 선교사는 내 길이 아닌가봐. 나는 선교사만 되겠다고 지금까지 보고 달렸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누워 있다가 목사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감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게,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성경책을 폈어요.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저는 펑펑 울었어요. 나를 필리핀에 불러주신 것은 ‘고생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구나. 나에게 너는 선교사가 되어 나의 일을 감당해야 해.’ 라고 말씀해주고 싶으셨던 것이구나.
이사야 42장 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세어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필리핀은 저에게 있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나의 삶에 한순간도 빠짐없이 임재하고 계셨구나를 깨닫게 해준 곳이에요. 여러분에게도 각자 이러한 장소 혹은 기억나는 하나님과의 추억이 있을거에요.
성막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그런 곳이었어요.
하나님과의 진한 추억을 쌓아갈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이 내 삶에 적극적으로 늘 매순간 개입하고 계시는구나를 알게 해주는 장소였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친밀감을 더해갈 수 있는 장소. 하나님과 더 친해질 수 있는 장소인 것이죠.
개개인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질수록, 그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는 더 풍성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거든요.

중심의 성막

만약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첫 번째,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시거든요? 한순간도 떨어진 적 없이 늘 계셔요. 성막을 디자인하고 주셨다는 것은요. 내가 너희를 찾아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인거에요. 너희가 나를 찾아 시내산으로 올라와라. 나를 만나고 싶으면 정해진 장소로 와. 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갈게. 너와 함께 있을게”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거에요.
제가 인도 여행을 하다 보게 된 신전이 하나 있는데요.
우리 교회 십자가 탑보다 더 높은 돌 산 위에 정말 작은 신전이 하나 있더라구요.
자신들이 믿는 신을 만나려면 저 돌무대기를 올라가야해요. 제가 가보고 싶어서 길을 찾았거든요? 안보여요. 저기에 어떻게 신전을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모든 신들은 나를 찾아오라. 나에게 와서 합당한 것을 받쳐라. 암벽등반해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수고를 보여라. 말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우리에게 오셨어요. 정신 못 차리고 자꾸 헷갈려 하니까 성막으로 구름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오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나 여기 있어. 이제 헷갈리지 마”라고 말씀하세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신의 모습과 달라요.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고 계셔요.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장소, 일하실 수 있는 장소인 성막을 세워야 해요.
하나님을 기억해낼 수 있는 곳.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의식해서 만들어주는 성막을 내 삶에 세워야 해요.
물론 이 성막이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해요. 그것이 우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또 실패하게 되는거에요.
이게 참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면서 예배하고 싶지만 사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곳이 죄가 가득 찬 세상이거든요.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갈등이 생기고 흔들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실 장소를 만들고, 내어드리는 성막과 같은 것을 만든다 해도 우리는 죄의 공격을 매일 받아요.
하나님을 위해 내어드린 나만의 성막이 우상화될 가능성이 정말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내어드린 그 공간이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과 예배를 통해 돌아보아야 해요.
두 번째, 하나님께 드린 공간의 위치를 삶의 중심으로 가져와야 해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 말은 쉬운데 행동은 진짜 어렵잖아요? 하지만 해야 해요.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해야 해요.
성막은 이스라엘의 한복판에 위치해있었어요. 바로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중심이 되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죠.
삶의 중심에, 한복판에 성막을 하나님을 놓아야 하는 이유는요. 그래야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우리가 살아갈 목적을 늘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그 이유와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 중심이 될 수 없거든요.
흔들리지 않는 삶. 아니 흔들려도 결국 궤도로 돌아오는 사람은요. 마음의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에요. 내가 버틸 수 있는 이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그 힘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붙잡으려 할거에요.
우리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우리는 찾고 의식하면서 살아야만 해요.
이것을 의식하려면 삶의 중심. 내 삶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계셔야만 해요.
중심은 곧 기준을 이야기 하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한복판에 성막을 세우신 이유는 언제나 삶의 중심이 바로 나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고 하기 위함이에요.
마지막으로 성막은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에요.
하나님께 드린 공간이 변질되고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삶의 중심으로 그 공간을 옮겨오는 사람만 드릴 수 있는 예배. 그것이 가능한 곳이 바로 성막.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요.
성막은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곳이라고 했죠. 하나님이라는 디자이너의 뜻과 생각이 반영된 장소라는 거에요. 성막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표현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성막에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셨어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진짜 마음을 다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셨어요. 그리고 그런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되기를 또 원하고 계시구요.
우리에게는 이런 성막이 없잖아요? 그럼 교회가 성막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어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해요. 교회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떠오르고 또 기도하게 되니 성막처럼 하나님을 떠오르는 기능이 하는 것은 맞지만, 이 곳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진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어요.
성막에서 다양한 제사들이 진행되고 또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진짜 예배. 진정한 예배. 참된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성막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것은요.
예배의 자리는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예배가 일어나는 곳은 우리의 중심이에요. 변질되지 않았는가 늘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가 있는가를 늘 확인해야하는 우리의 마음. 그것이 바로 예배가 일어나는 곳이에요.
한 주간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가 바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결정해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예배를 의식하며 누리며 살았다면 이 자리는 엄청난 기대의 자리가 되겠지만, 내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면 이 자리는 습관적인 예배의 자리가 되고 말거에요.
성막. 내 중심의 이동. 그 최종목적은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높이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함이에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세요.
“너의 삶에 내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네 삶의 중심이 되고 싶다.”
하나님은 이 말을 하기 위해 굳이 성막을 디자인 하셨어요.
이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것을 새기도록 하기 위해 성막을 그 광야에 만드셨고,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죠.
한 주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매일 매일 확인했으면 좋겠어요.
자꾸 분산되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다 잡는 하루가 되기를 바래요. 이스라엘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고민이 될 때마다, 흔들릴 때마다 성막을 바라보고 힘을 내었던 것처럼요.
우리의 마음에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여러분의 중심으로 옮기는 작업을 꼭 하기를 부탁해요.
내 마음의 정 중앙이에요.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위치해야 해요. 여러분이 각자의 삶에서 먼저 예배를 회복해야 해요.
예배와 예배자는 절대 분리될 수 없어요. 예배가 일어나는 곳은 여러분의 중심이고, 중심을 통해 우린 하나님과 관계가 더 깊어 질 수 있어요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감이 깊어진다는 의미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실지 몰라요.
“너의 삶에 내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네 삶의 중심이 되고 싶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한 주 되길 바래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축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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