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찾아온 브닌나와 이 시대의 한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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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1장 1-18절 말씀입니다.
1 Samuel 1:1–18 NKRV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서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도 익숙한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나머지 쉽게 쉽게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낯설게 바라보고, 새로운 부분들을 발견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들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무엘상은 사사시대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 초반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온전하고 건강한 영향력들을 이스라엘 영역 전체에 미쳤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대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조금씩은 왜곡되고 건강하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지역적으로, 그것보다 더 적은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사사기의 저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라고 평가 합니다. 그렇다면 사사시대의 마지막이었던 사무엘상 초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앞서 이야기했던 사사기의 마지막 상황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사사였던 엘리는 다음세대 사상인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교육하지 못했구요.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와 울면서 기도 하고 있을 때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져 왜곡하고 정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성막에 많이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았죠.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 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마치 우리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할 수 있는 영적 거장 믿음의 선배들이라고 했을 때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저는 어릴적 이태석신부님의 울지마 톤즈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는데, 이런 분처럼 멋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선배들이 매우 적죠. 또한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상황들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 하는 게 답인 것처럼 얘기하죠. 그리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야만 하는 시대,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꼰대라고 표현하며, 배척하는 시대이죠.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사무엘상 1장에 등장하는 엘가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엘가나의 족보가 등장하는데요. 우리는 족보가 등장하면, 그냥 슝하고 읽어버리죠. 하지만 족보에는 대표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것과 연관된 의미들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다윗의 왕으로 오신 약속된 메시야라는 의미가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의 족보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엘가나이죠. 그렇다는 것은 엘가나가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가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두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첫째 아내는 한나고요. 둘째 아내는 브닌나이죠. 일부다처제는 옳지 못한 행위고, 결국 그로 인해 아픔들을 겪게 됩니다. 뒤에서 함께 살펴보게 될 텐데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3절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3절을 보면, “엘가나는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이 시대는 하나님에게 아예 관심을 갖지 않거나, 다른 신을 섬기거나, 자기를 위한 제사장을 고용해 자기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팽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시대 속에서 엘가나 집안은 매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에브라임 나와 실로로 올라 갔다는 것이죠. 굉장히 보기드문 믿음 좋은 집안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집안이 매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아파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재물을 나눠주는데요.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기에 둘째 아내와 그의 자녀들에게 주는 것보다 두배 양을 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브닌나에게 자극이되서 한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괴롭힘 정도가 아닙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만든다. 즉 한나가 격분해 있다는 뜻인데요. 원어로 살펴보면, 천둥이 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지금 한나의 마음 속에 천둥이 치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죠.
도대체 한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힘들어할까요?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기 때문이죠. 출산을 고대 사회 맥락에서 보면 더 큰 의미들을 담고 있는데요. 그 시대의 가족이나 국가는 여성의 다산에 의존하였습니다. 자녀가 많을수록 일손이 늘어나기 때문에 가족이 더 많은 돈을 갖게 됩니다. 또한 자녀가 많아야 일을 할 수 없는 노년이 되어서도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복지 시스템이 없기에 노인들은 오로지 자녀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자녀가 많지 않은 나라일수록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했습니다. 자녀들이 많지 않으면 군인들이 없고, 결국 정복당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출산은 가족의 기쁨이요, 국가의 이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성의 출산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불임은 절망을 표현합니다. 한나가 느끼는 것은 단순히 자녀가 없다가 아니라, 그 시대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느껴집니다. 브닌나는 한나에게 했던 말은 결국 그 시대와 문화가 주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아이를 낳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가치도 없고, 희망도 없어요.”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아이를 원했지만 가질 수 없다는 그 고통이 천둥과 같이 내면에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대 문화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한 시대의 외침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기준이 다산에서 바뀌게 된 것이죠. 이제는 개인의 성취(학업, 능력)와 돈, 영향력들이 그 기준을 대신합니다. 우리 문화 속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주변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스스로를 싫어하고 경멸하게 되죠. 끊임없이 비교하는 SNS에서 자신을 드러내죠. “나 돈 많아. 유행에 뒤쳐지지 않아. 나 이것도 해봤어. 나 인플루엔서야. 나 살아있어” 그런데 그러지 못할수록, 가진 것이 없고, 성취하지 못할수록 이 시대의 브닌나가 찾아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어요. 당신은 이 사람들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주변 사람의 기준에 맞추고 나면, 더 높아진 주변 사람들이 기준이 되어 또 다시 “나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증명해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한나가 겪었을 비참한 상황인거죠. 다행인것은 남편이 다가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있지 않냐. 너에게는 자녀가 없지만 내가 있으니 낫지 않겠냐. 너무 슬퍼하지 마” 참으로 스윗하고 다정한 남편인 거죠. 밥도 안 먹고 울고 있는 한나에게 다가가 위로와 격려를 행합니다.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주변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진통제와 같은 것이죠.
저는 평소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요. 건강한 교회는 대체적으로 매운 음식을 못 드시더라고요. 흔히 얘기하는 맵찔이들이 있어요. 근데 오은영의 상담소 영상을 보다가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일종의 자해일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매운 음식을 먹는 순간 입 안에 들어오는 자극, 통증으로 인해 고민과 스트레스로부터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것이죠.
마치 한나가 남편에게서 받는 위로 또한 그렇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한나가 이러한 고통을 언제 겪었나요? 7절에 얘기하는 것처럼 매년 예배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한나에게 갑절로 주는 거에요. 그러면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게 하는 거죠. 남편은 선한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거에요.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살아갔는데, 오히려 교회에 가니, 예배를 드리니, 더 아프고, 더 상처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해결해야만 하는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냐? 5절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사실 한나에게 이 상황이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거에요. 차라리 내가 잘못한 거였다면 괜찮을텐데, 내가 바알과 같은 다른 신을 섬겼으면 이해하겠어요. 근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죠.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결핍과 아픔이 있는 곳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그 결핍과 아픔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한 결과로 생기는 일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허락하시고, 그 일 또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마음이 무너지고 밥도 먹지 않고 울고 있던 한나가 움직이기 합니다. 여기서 첫번째 반응이 진짜 중요한데요. 9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여기서 한나는 무엇을 합니까? 일어납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는 표현은 단순히 그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게 아니고,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하다”의 관용구입니다. 즉 그녀는 브닌나의 외침, 마음의 찢어지는 아픔에 대해서 남편의 위로와 격려로 잠시 잊어버리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어요. 결단하는 것과 일어서는 것은 굉장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배목사님에게 그것으로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일텐데요. 누군가에게 “하려고요”와 “시작했습니다” 사이에 찰나의 시간이 있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무한한 시간이 들어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한나는 그 문제를 들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성막으로 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통곡하며 마음을 쏟아냅니다.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아픔들을 다 토로하는 것이죠. 브닌나로 표현되는 시대가 공격하는 마음, 자기 자신이 아파하는 마음, 위로하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악화만 되는 남편,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11절의 기도를 합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기도는 그녀가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저를 위해 먼저 아들을 주시면, 제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제 나에게 아들을 주셔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게 해주세요”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원을 하며, 말도 안되는 기준을 붙입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께 아들을 있는 그대로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것은 나실인의 상징인데, 평생토록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도이죠. 왜냐하면 그녀가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인해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를 다시 하나님께 드려버린다면, 결국 그 아이는 한나, 엘가나 집안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한나는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로 인하여 남편의 사랑을 더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나의 이 기도는 지금까지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려고 했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고백이며,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인 것이죠.
지금까지 한나는 나의 성취와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즉 “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녀를 구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한나는 그 아이를 통해 사회가 말하는 성취의 노예, 남편이 주는 사랑의 노예, 더 나아가 태어난 그 자녀를 자신의 무기삼아 보호하며, 다른 이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한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아이를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아직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 모르겠으나, 자신의 결핍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받지도 않은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이죠.
그리고 한나는 엘리에게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평안히 가라, 하나님께서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 원하노라”는 메세지를 듣고 돌아옵니다. 근데 이제 한나는 기뻐하며, 돌아와, 먹지 않았던 밥을 먹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순서를 보면 희한합니다. 한나는 본인의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일어나지 않았죠. 보통은 기도하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응답받으면 기뻐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기도하고 먼저 기뻐하고 응답받는 순서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이제 더이상 브닌나의 외침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 아픔과 고통을 아신다면, 그것을 통해 만들어가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이죠. 단순히 잊어버린 것으로 문제를 넘기는게 아니라,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한나의 이야기에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 삶에는 각자 브닌나가 찾아옵니다. 누군가는 시대의 목소리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가족의 목소리로,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로 찾아와 우리를 절망스럽게 하고 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자 우리는 때로 물리적인 환경을 벗어나기도 하고요.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로 잊어가며, 새로운 도피처를 찾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럴수록 우리는 해결할 방법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결국 한나가 다시 예배 드리러 올라가면 부딪히는 그 절망감처럼, 일정한 자극이 생기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죠.
오늘 한나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결단하고 그만두고 결단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그 첫걸음을 떼서 기도하는 것이죠. 내가 감춰왔던 그 경험과 아픔들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그 한 걸음이 우리 삶 속 앞으로의 많은 것을 바꾼다는 것을 믿고요. 브닌나는 여전히 놀리고 공격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나는 근심하지 않았죠. 우리 삶 가운데 여러 문제들과 찾아오는 브닌나들을 가지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가지고 간 그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것이고요. 불임이었던 한나가 자신의 아들, 사무엘을 통해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떠올랐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커피 캠프에서 만났던 은혁이라는 아이였죠. 그 친구는 항상 까불대고, 앞에서 진행하고 있어도,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였습니다. 제가 보면서 충만 쌤께 혹시 저 친구 아픈가요? 라고 물어봤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충만 쌤께서 아주 지극한 잼민이, 어린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날 잠깐 이야기할 시간이 생겨서 그 친구의 팝콘을 뺏어먹으면서 얘기했습니다. 그 친구가 팝콘에 소스를 꽤나 잘 뿌려놔서 그걸 칭찬하면서 얘기했죠. 혹시 듣고 싶은 칭찬이나, 가장 기분 좋았던 칭찬이 있었냐? 그런데 “저는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거에요. “혹시 이유가 있을까?” 그랬더니 “저는 항상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어서 별로 칭찬을 듣고 싶지도 않아요”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니, 2명의 동생이 있고, 그 친구들은 장애가 있어서 본인이 챙긴다는 거였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술 마시러 나가시며 동생들 잘 챙기고 내가 없을 때는 너가 가장이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자 그 친구가 에너지를 여기서 이렇게 표출하는구나 싶으면서도, 평생 지고 가야할 집안의 문제 앞에 그 친구 앞에 아무런 얘기도 못하겠더라고요. 대견하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다.
근데 말씀을 묵상하는데 엘리가 떠오르더라고요. 사실 되게 한심하게 봤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떨어져 자녀의 문제에 방관했고, 기도하는 한나를 향해 술 취하였다 하였고, 한나는 일어설 때, 그는 앉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전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엘리가 마치 저와 같더라고요. 살려달라고 얘기하는 이 시대의 한나들에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엘리가 해야할 일은 한나가 기도할 때에 그녀를 위해 함께 일어서 기도했어야 했던 것처럼 나도 간절하게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기도해야만 했구나. 함께 일어나 같이 기도해야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먼저 우리 삶에 찾아오는 브닌나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나아가야만 하는거죠.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결단하며 일어나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묻어두고, 숨겨두었던 해결해야만 하는 그 브닌나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역자로 두는 사람 더욱 중요합니다. 자신의 브닌나를 해결하지 않은 사람은 사역 하는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더라고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보람과 정체성을 위해 사역하기도 합니다. 더더욱 점검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가는데 애써주세요.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 시대의 한나들을 위해 같이 기도해주십쇼.
결심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었던 사람으로써 우리 건강한 교회의 미션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는 자신의 브닌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건강한 교회 내에 있는 한 사람과 교회에 있진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마음 주시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브닌나를 물어보고, 같이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