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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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한주간 동안 평안 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복 많이 못받으셨어요?

우리는 새해가 되면 으레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문화 속에는 이 복의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 말해줍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이 복에 대하여 독특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있는 민족도 드물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대문 손잡이로부터, 문갑, 은수저, 옷의 무늬, 베게 모, 방석 등에 복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가구들이나 침구에서 복자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복에 대한 개념은 사실 우리의 전통 무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칠성당에서 냉수 떠다 놓고 빌고, 시골에 가면 마을마다 칠성당이 있죠. 이 칠성당은 북두칠성을 모신 사당이죠. 또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칠성각은 우리민족의 토속신앙이었던 칠성신앙이 불교라는 외래종교 속에 녹아 든 자취입니다. 이와 같이 이 전통무속신앙은 불교나 유교, 도교등과 함께 혼합되었고, 다원화된 종교 속에서 혼합된 복의 개념이 우리 선조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의 개념은 무의식적으로 후대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조상의 무속신앙과 그 밖의 불교나 유교에 기반한 복의 개념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사를 갈 때 좋은 날을 정해서 이사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손 없는 날? 이라고 하죠 아마. 네, 그런 날이 복 있는 날에 이사를 가야한다고하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와 같은 날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복은 어떤 시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묘지를 정 할 때나, 집을 살 때 그 집터와도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인 가정에서 조차 결혼을 할 때 궁합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좋은 배필 만나서 복을 받고 잘 살길 위해서 라고 합니다.

하여간 복은 우리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복은 일반적으로 아주 실제적(물질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황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이 물든 사회 속에서 이 한국적 복의 개념은 더욱 물질적인 축복에 치우쳐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복은 “[ 福 ] 복(福)[명사] 1.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 좋은 운수. 복조(福祚). 행복. ¶복을 듬뿍 타고난 사람./신불(神佛)에 복을 빌다. 2.좋은 운수로 얻게 되는 기회나 몫. ¶먹을 복을 타고나다./자식 복이 많다.

******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사전적 의미의 복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좀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복은 너무나도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물질적인 가치관에 치우친 한국적 복의 개념이 성경적 복의 개념을 오해 하게해서 결국 믿음과 신앙체계를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된 복의 개념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 한해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성경에서 제일 처음 인간과 관계하여 복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계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손들의 선물”이라는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옷도 신발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복의 개념으로 그들은 복받은 사람들입니까?

성경에서 두 번째 언급되는 복은 안식일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신 것(창2:3)것이다. 이것 역시 한국적인 복에 대한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쉼 자체를 복으로 말씀합니다.

또 성경에서 복에 대한  선명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에서와 야곱이 복을 두고 싸우는 장면에서도, 야곱이 결국 복을 쟁취하지만 야곱이 에서에 비해서 더 큰 물질을 가지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지거나 더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볼 때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물질적인 복의 개념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작년에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한 사람을 추적한 기사가 뉴스에 방영되었습니다. 당첨된 이후 1년 동안 은밀히 추적을 해서 그 사람의 삶을 기사화한 것이었습니다. 복권당첨 이후 1년 동안 이 사람이 겪은 일들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여러 번 돈을 강탈당하였고, 쫒겨다녀야 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결국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겨서 이혼하게 되고 온갖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로또복권에 당첨된 한 경찰관이 결국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다는 기사가 났었지요. 친구도 친척도 다 버리고 고국땅을 떠나서 살아가야 하는 이 사람은 과연 복받은 사람입니까?

얼마전 삼성그룹 총수의 셋째 딸이 자살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불행한 일이고 안된 일이지만, 세인들은 그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 딸이 갖고 있던 재산이 2000억을 넘는다고 하죠.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죽어? 그 돈 갖고 행복하게 살면 되지, 결혼 반대한다고 죽나…

그러나 그녀에게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행복을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녀에게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인격적이며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복 역시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행복, 그 첫 번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적 복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복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세상의 복은 언제나 소유의 개념입니다. 물질이 많을 때 복이 있습니다. 좋은 집과 차가 있을 때 복이 있습니다. 먼가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을 때 복이 있다고 합니다. 또 옛날에는 자식이 많으면 또 다복하다고 했습니다. 먼가 소유할 때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소유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잘 아는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즉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여덞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산상수훈의 팔복을 다룰 때 복의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세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는,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다시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둘째는,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다면,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복을 주시겠다는 것인가? 어떤 복을 약속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도 그와 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복을 우리도 받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지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럼 심령이 부자인 사람도 있겠네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리고 심령이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니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품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행복을 이루어가는 기초를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혹자는 심령이 가난한 것을 경제적 빈곤, 가난과 혼동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가난이 복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빈곤인 가난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부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보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였던 바나바가 자기가 가진 재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또 두아디라의 자주장사 루디아도 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과 실라를 만난 뒤로 자신의 부유함을 가지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이오라는 사람도 나오고 빌레몬이라는 사람도 나오고, 전부 그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선천적으로, 체질적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도 있고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들도 있고 내향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내향적인 사람들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태어난 우리의 개성, 체질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없음도 아니고, 선천적인 개성이나 체질과도 관계가 없다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 가난하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보고 가난하다고 이야기합니까? 가난하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내 힘으로 조달이 안 될 때 그 사람보고 가난하다고 합니다. “핸드폰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 그런 것보고는 가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 속에서, 특히 의식주의 면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기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외부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외부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가난은 결핍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이야기합니까? 심령이 가난함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영혼의 결핍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외부적 도움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외부적 도움 없이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I have nothing.(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I can do nothing.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외부적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외부적 도움이 뭐냐면 우리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아니하시면 나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얼굴 들고 다닐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열심히 마음만 먹으면 기어코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는 정도 재물도 소유하였다고 교만하십니까?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은 절대로 심령이 가난함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주님이 안 계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요, 내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렵고 떨림”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세리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자기 가슴만 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그저 내가 문제 있을 때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내 문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과 관계없이 “주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고백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믿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의 그 바닥에 가서 보면, 문제는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이 없어도, 주님이 안 계셔도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거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복의 가장 첫 출발은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질 때 비로소 모든 복이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다면,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천국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이란 무엇입니까? 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국은 보통 미래적인 면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흔히들 죽으면 천당간다고 말하지요.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천국, 아니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비로소 임하게 될 미래적 천국, 그 이후에는 예수님이 영원하게 왕노릇하고 예수님께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노릇하게 될 그 천국, 그것은 미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미래적인 면 말고도 이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그 때에 이루신 천국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임한 천국, 이미 천국이 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했다.” 라고 과거 형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이미 임하고 확정되는 그러한 천국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이 있습니다. 믿는 백성들이 실제 삶에서 누리고 영유해 나가는 천국, 바로 이 천국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조건들이 맞을 때 그 천국을 갖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팔복이 바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의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팔복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얻게 될 현재적 의미의 천국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팔복의 조건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 현재적으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팔복이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에 천국갈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금 현재 여기서 누리는 천국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번 주에도 금년에도 여러분이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천국, 영원한 안식과 평안이 있는 여러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을 여러분이 누리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냐면,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도 그와 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복을 우리도 받을까요?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주십니까? 수없이 많은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고통과 환난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 고통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통하여 고통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 고통을 주시고, 머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전도를 해보면 압니다. 어떤 때 전도가 잘 됩니까? 그 사람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순간순간에 전도가 제일 잘 됩니다. 그 때가 심령이 가난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환경이 어려울 때, 금전적으로 어려울 때, 여러분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실직했을 때, 앞날이 불투명할 때, 내 삶 속에 뭔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보이는 순간순간에, 내게 크나큰 질병이 드는 순간순간에, 그 때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믿을 것이 많다-돈이 많다, 건강하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재물이 갑자기 날아가 버렸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건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 사람이 여러분을 배신했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여러분으로부터 따나갈 때,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연약한 모습, 자신의 추한 모습, 별수없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친구가 없습니까?

제게 참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 형님이 한국의 재벌 집 사위가 됐습니다. 머리도 정말 비상하고, 정말 얼마나 잘생겼는지 몰라요. 키도 186에 대학에서 조정, 작은 배를 젓는 것, 그런 운동을 해서 체격도 정말 멋집니다. 집안도 좋아요. 54번 버스, 혁성운순가 하는 운수회사도 하고, 여행사도 하고, 머 부러울 것이 없는 집안입니다. 학교 다닐 때 그 형님 주변에는 늘 많은 여학생들이 쫓아다니고 그랬습니다. 늘 보면 그 형님은 이 세상이 자기 것같이 행동합니다. 머 못할게 없이 보여요.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열심은 아니더라도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늘 형님을 걱정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그 형님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렸어요. 대우라고 한국의 재벌그룹이 파산하면서 그 회사와 연관된 수백억이 하루아침에 날라가버린 겁니다. 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작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형 죽었어. 자살했어. 불쌍한 놈.---- 그리고 이 친구 그제서야 뼈 절이게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을 통해서 내게 깨달음을 주셨어. 교회 열심히 나갈꺼야…열심히 살아야지..

지금 저는 그 친구가 기쁨을 회복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던 재물, 건강, 친구, 모든 것들을 잃고 나서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종종하는 말이 하나님이 내가 교만해서 따귀를 때리셔서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다, 나는 이것을 일생동안 가지고 갈거다.”

환난으로 모든 교만을 벗기시는 순간에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만이 나의 갈급함을 풀어주실 분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그 환난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시고 최종적으로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 속에 살아갈 때 환난이 닥치기 전에, 따귀맞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인가하는 고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축복과 미래의 소망을 함께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는 비결이 멀까요?

첫째로 우리의 삶 속에 절제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먼가를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마음대로 우리 뜻대로 그냥 막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유하지만, 그 중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절제하는 뭔가는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 다를 수 있어요. 스스로, 내가 주님을 믿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삶 중에서 이 부분은 뭔가 절제를 하겠습니다. 그걸 하나씩 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뭐하고 같냐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을 때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하나는 못 먹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을, 내 삶 속에 선악과 하나를 두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뭔가 여러분이 범접치 않는 그 어떤 한 가지를 두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 면만은 내가 분명히 지키겠다.” 하는 한 면을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절제하는 그 한 가지 면이 여러분의 신앙이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절제가 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겸손해야 합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습니다. 환경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겸허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비울수록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순수한 신앙고백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자기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가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은 아주 유명합니다.
교만이란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국의 훌륭한 목회자였던 Andrew Murray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이미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더 선하다, 좀더 낫다, 좀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임을 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복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 거기에서부터 애통함도 있고 온유도 있고, 다 그 다음에 있습니다. 출발점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면에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연초부터 가난한 심령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며 이 금년 한해도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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