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눅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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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장남은 용서하고 통합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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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주인공은 탕자로 상징되는 죄인과 영접하고 용서하는 아버지. 그러나 비유의 대상은 누구 들으라고 하는 비유일까? 큰아들로 비유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다. 1~3절을보면 이 비유가 어떻게 시작되는 지 알 수 있다.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니까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이것을 보고 초점을 맞추어서 그들에게..라고 초점을 맞추었다. 이 비유를 살필 때 이 본문은 서리관과 바리새인들로 묘사된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야하는데 이 사람이 비유에 나온 사람이 큰 아들이다. 렘브란트의 그림.하나님의 가정이 회복되는 모습을 장남을 통해 살펴볼 것.
장남의 모습은 어떠한가? 분노하는 장남. 왜 분노했나?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떠나서 마음대로 쓰는 모습을 보고 분노함. 시기가 있고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모습에 분노함. 재산 많은 자녀들의 꿈은 재산 빨리 나눠주는 것. 일찍 나눠주시면 많이 돈을 돌릴 수 있는데 아들들이 다 도둑놈이다. 큰아들은 자기 형편 때문에 아버지 모셔야하니까 이걸 못한 것이다. 친구들하고 있을 때 염소한마리 못먹어 본 것같다. 자기는 절제하면서 그렇게 사는데 동생은 당돌하게 재산 달라고 요구하고 아버지는 또 허락한다. 받자마자 마음것 쓰겠다고 타국으로 가서 들리는 소문에 온갖 방탕하게 잘 산다는 것이다. 큰 아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었던 것. 나는 왜 의무감 속에서 이렇게 살아야되지? 힘드니까 동생에 대한 분노가 더 심한 것.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동생이 망했고 거지가 되었다. 남의 집에 하인이 되어서 먹을게 없어서 쥐엄열매를 대신 먹으면서 살아가는 소식을 듣게 되었음. 그런제 장남은 연민이 없다. 그래서 동생의 그런 절망에 대해서 고소하게 생각한다. 쌤통이다. 결국 그렇게 되었구만.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 소위 인간성 상실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게 인간성상실. 망하면 측은히 여기는 것이 신적 인간성의 상실.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하나님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 욕하고 지적할 수 있다. 그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똑같은 죄를 여전히 나에게 범하는대도 화가 나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이게 기도할 때 생기는 것이다.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에 대한 긍휼이 올라오는 것이다. 대부분 그렇지 못하고 분노와 화가 치민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이 그렇다. 왜 저렇게 죄를 짓고 사나? 이게 아니고 분노. 원청봉쇄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구원관은 행위, 율법, 도덕구원론이다. 세리와 창기들은 처음부터 못들어가게 암하아레츠. 율법을 일부러 안 알려주는 것. 지식구원론으로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것이다.
이 연민없음은 아버지 때문. 이 노인네가 맨날 동구밖 처다보고 행복하지 않다. 웃지를 않고 맨날 근심에 있다. 그것이 마음에 안드는 것. 그러면 동생은 미워도 아버지때문이라도 동생을 찾으러 가야 한다.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이런 아부지 못보겠습니다. 이래야 되는데 안떠나고 동구밖 보는 아버지 보면서 냉정하게 보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동생에 대한 연민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장남의 냉정함은 하나님에 대한 냉정함이다. 동생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연민을 상실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하나님의 연민을 상실한 것인데 이게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상태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린 것. 하나는 집 밖에 나간 탕자, 하나는 집 안에 있는 탕자. 아들이 아니다.
마지막에 장남이 뚜껑이 열린다.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간다. 먼저 뛰어나가서 용서하는 사람이 아버지. 눈은 아버지가 더 나뿐데 아버지가 달려나간다. 돌아왔는데 하인이 동생 때문에 잔치 벌렸습니다. 하니까 그때 뚜껑이 열렸음. 못마땅해도 그럴텐데 한 마디 더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송아지를 잡았어요” 이게 트리거. 정관사가 있다. [그] 살진 송아지. 특별한 송아지. 27절, 29~30절에도 그 살진 송아지. 이것은 아버지 특별구역에 있는 송아지. 아들이 못건드리는 송아지. 아버지가 쌈짓돈 모아둔 것이 있는데 장남에게도 안주는 것. 자기 존재를 담아서 가지고 있는 돈이 있는데 그것이 그 살진송아지이다. 못 건드리게 하는 것. 애지 중지하고 사랑하는 송아지가 있었고 그 송아지는 절대로 못건드리는데 하인이 일어바치길 그 송아지를 잡았어! 놀래서 장남에게 찌르는 것. 뚜껑이 열렸다. 그 속에서 숨겨진 자아가 나오는데 분노가 폭발한 것. 내가 그렇게 섬겼어도 내 친구들왔을 때 염소새끼 하나 안잡더니 그 송아지를 잡았습니까!! 그리고 따지는데 동생이 3인칭. 그놈이 돌아오매! 여기서 뚜껑이 열린 것.
장남마음이 그렇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머무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된다.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이 싫고 부럽다. 교회에 일있으면 어쩌다가 헌금한 사람은 귀하게 여기는데 나는 매일 수발들고 힘들어하는데 어쩌다 나타난 둘째 셋째 며느리는 귀하게 보면 속상하다.
정말 하나님 나라의 장남답게 변해야 하는데 그걸 넘어서야 한다. 어떤 장남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장남이 되어야 한다. 어머니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대해야 겠다. 형의 마음을 가지고 잘해줘야 한다. 장남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으면 달랐을 것. 장남으로 인해서 온 가족이 하나가 되고 차남이 아버지 뿐 아니라 형님에게도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을 것. 이게 생각해볼 일이다. 여기서 장남은 온 집안에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장남이 기득권이 있다. 재산을 더 물려주고 우대하는게 있다. 이런 가부장적 기득권 세대가 끝났다. 그런데 장남에게만 그런 짐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문화가 바뀌었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 나라의 장남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푸는 아들, 이 사람이 첫째든 둘째든 그 사람이 장남이다. 그 아들을 보고 부모님의 마음이 너무 좋다 이러면 그 사람이 장남이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장남이다. 집안에는 교회에는 하나님 나라의 장남 자녀가 한 사람은 있다. 배려하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서로가 다시 화합하는 것. 먼저 태어난 장남이 아니라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하나님 나라의 장남이 되어서 먼저 희생하고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형제로 바라보면 싸움난다. 엄마 아빠의 마음으로 형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라. 그러면 그 마음을 주신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장남. 부모님은 분깃을 못 줘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그 교회를 축복하실 것이다. 이것에 쓰임받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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