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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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

 

지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주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신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모든 복의 시작이기에 새해의 시작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깨닫고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고 올 한 해도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때로는 슬픔과 비애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의 삶 속에서 슬픔과 비애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슬픔과 애통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여자나 남자나, 세상 어는 곳에 사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늘 평안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들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슬픔과 애통함의 상처들이 남아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슬픔과 애통은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과 애통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애통하며 슬퍼하며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아마도 한 분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슬픔과 비애를 벗어나서, 슬픔과 비애와 마주치지 않고, 그것을 피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그리고 기쁘게 살고 싶습니다. 행복과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애통하며 슬퍼하며 살아갈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애통할 때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팔복을 다룰 때 세가지를 살펴볼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다시말하면 애통한 사람이 복이 있다면, 애통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애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둘째는,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애통한 사람이 복이 있다면,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복을 주시겠다는 것인가? 어떤 복을 약속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도 그와 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복을 우리도 받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렇다면 첫째로 애통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애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까?

가난이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애통은 인간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니가 소유한 것이 무엇이냐?” “니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니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냐?”를 물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슬픔과 비애를 만나지 않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를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슬픔과 비애에 반응하면서 살아갈 것이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반응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떤 종류의 슬픔을 가지고 있느냐?” “너의 슬픔은 무엇이냐?” “어디로부터 오는 슬픔이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슬픔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애통함은 어떤 종류의 애통함입니까?

 

성경은 애통함을 크게 3종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세상적인 세속적인 슬픔, 애통함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슬픔, 애통함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신성하고 거룩한 슬픔, 애통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우리를 슬픔과 탄식 속에 빠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함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슬픔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함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애통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적인 자기 정욕을 채우지 못해서 울부짖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구약에서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자기 이복동생인 다말을 연모하는데 그 다말을 갖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상사병이 걸려서 애통해 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애통함입니다.

또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이었던 아합 왕을 보면,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서 밤잠을 못 자고 설칩니다. 그 포도원을 갖기 위해서 계략을 꾸미고 별 못된 짓을 다 꾸밉니다. 매일 매일 이 포도원 때문에 애 간장을 끓입니다. 이런 애통함 역시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애통함입니다.

가끔 여성분들 보면 욕심과 집착에서 오는 애통함을 종종 갖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 없습니까?

어떤 여자 분이 백화점에 갔다가 너무너무 멋있는 원피스를 봤어요. 그런데 값을 보니까 자기 예산보다 너무 비쌉니다. 그래서 그냥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런데 그 갖고 싶은 옷을 못 사고 집에 오니까 계속 그 옷이 생각나는 겁니다. 밤에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고 며칠 동안 머리 속에 그 옷만 왔다 갔다 합니다. 자 이런 경우 보통 어떻게 됩니까?

 

1.     깨끗이 포기한다.

2.     저축하여 그 옷을 산다.

3.     무리해서라도 그 옷을 산다.

 

여러분들은 이제 모두 수양이 잘 되셔서 잘 절제하시고 자신의 욕심과 집착을 잘 극복하시지만,

한 두 번쯤은 결국 사고 마는 경험을 아마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 후회합니다. 더욱이 젊은 여성들은 경제적인 능력도 없이 저질러 놓고 몇 달을 고생합니다.

그것을 갖기 전의 애달픔, 갖기 전까지의 욕심과 집착에서 나오는 그 신음, 그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애통함입니다.

 

세 번째는 신성하고 거룩한 슬픔, 애통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고통하는 비애가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주님앞에 나아와 애통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애통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성경적인 애통함입니다.

이 성경적 애통함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자기 죄의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이며, 또 죄로 인하여 부패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니면 내가 살 수 없고, 주님이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나아옵니다. 내가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통회합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서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바로 애통함입니다. 세리는 먼발치에서,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애통함입니다.

 

또, 눅 7장에 보면, 죄인인 여자가 자기의 옥합을 깨트려서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함에서 비롯된 눈물입니다.

 

신성하고 거룩한 슬픔, 애통함 두 번째는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그들이 이 세상 속에서 겪는 고통과 비애를 애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이 지은 죄를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눈물에도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거룩한 눈물과 세상적인 세속적인 눈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슬퍼하며,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며 그들의 고통과 비애를 탄식하며 흘리는 눈물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난 날들을 후회하며 흘리는 세상적인 눈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최봉석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소위 "예수 천당! 불신지옥!"으로 잘 알려진 최 권능 목사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는 평생을 전도하는 종으로서 개척전도, 노방전도를 해서 세운 교회가 무려 74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참 열정적인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두 뺨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 권능 목사님을 눈물의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를 슬퍼하며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며 눈물로 이 세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눈물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윗,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고(시 6:6), 또 그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만큼 눈물 많은 인생을 살았다(시 4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예레미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강처럼 흘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애 1:2, 1;16, 2:11, 2:18, 3:48-49).

그렇습니다. 신성하고 거룩한 슬픔, 애통함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웃의 아픔과 슬픔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지은 죄를 안타까워하며 탄식하고, 눈물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경적인 애통함입니다.

 

2. 그러면 두 번째로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그러면 위로를 주신다면 그 위로가 어떤 위로인가? 를 살펴봅시다.

 

언젠가 제가 공관복음은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기에 공관복음이라고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말하면 같은 내용을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다른 문체와 다른 저자의 시각으로 다루고 있고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다른 관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다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장을 보시면, 신약성경 98페이지, 누가복음 6장 20절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우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네 그렇습니다. 위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웃음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현재성입니다. 지금 울고 있지만 나중에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울지만 나중에는 웃는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웃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나중에, 결국에는 울게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위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가 쉽게 되기 위해서 세상적인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여러분 고스톱 쳐보셨습니까? 지금도 가끔 치시는 분? 그럼 민화투는 쳐보셨죠?

처음에 잘 되고, 돈 따고 그러면, 사람들이 머라고 그렇니까?

첫끝발이 ….네…개 끗발이다…그러죠..결국 이 말은 …멉니까…손털고 일어날 때 보자….끝에 가서 누가 따나 보자. 마지막 승자가 누군가 보자는 말이죠…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다” 는 것은 언제나 주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그 죄에 대해서 세리처럼, 죄인인 여자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웃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속에서 절망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소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 속에서 웃음을 되찾고, 그리고 그 소망이 열매 맺게 되는 그 날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 보십시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는 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 자신의 죄를 감추고 덮어버리고, 이 세상속에서 아무 꺼리낌없이 살아가는 자, 이러한 자들이 배부른 자요, 이제 웃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애통하며 울리로다”는 것이 주님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 \\ “말년이 행복해야 인생이 행복하다”고들 합니다. 젊어서 아무리 죽을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말년이 행복하면 그 젊어서의 고생이 전부다 추억거리가 됩니다. 젊어서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노년에 춥고 배고프고 힘들게 살아간다면 그 젊어서의 삶이 다 회환이 됩니다. *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현재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주님앞에 나와 애통하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열매를 거두는 그 날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위로와 소망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우리도 애통하는 자가 되어서 그 복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성경적 애통함, 신성하고 거룩한 애통함은 자신의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고통하는 비애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애통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옵니까? 어떻게 애통하는 자가 됩니까?

 

첫 번째는 진정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Conversion, 회개, 지금 가던 길을 멈추고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가고 있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심각하게 돌이켜보려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못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충고를 감사하게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귀찮게 생각합니다. 되도록이면 그런 자리는 피하려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를 않습니다. 돌이키라니까 어떻게 돌이킵니까? 360도를 돌아버립니다. 어떻게 회개가 되겠습니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회개의 자리에서 다시 죄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늘 남 탓하는 사람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를 못함니다. 그러니 늘 남 탓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회개는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도 함께 슬퍼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위해서 함께 눈물 흘리며 애통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보다는 “제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지은 죄,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좀더 구체적으로 회개할 때 진정한 돌이킴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위로를 얻게 됩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적인 회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이제” 는 늘 현재입니다. 언제든지 애통하는 자, 계속적인 것입니다. 처음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죄를 깨달을 때, 그 기도원에 가서 눈물 흘리고 애통했던 것, 그것들은 모두 과거입니다. 주님께로의 그 첫사랑을 매일 매일 회복하여야 합니다.

지금 현재 매일매일 여러분이 눈뜨고 깨어나면서, 매일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그 순간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순간순간에 나의 연약함과 죄성을 깊이 인식하고 애통해하는 것, 그것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께 돌아가는 삶이 이루어지고, 이때 우리는 이웃을 돌아보게 되고 그들의 아픔도 함께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애통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물으십니다. 진정한 회개와 매일 매일 삶 속에서 계속적인 회개를 통해서 우리자신을 돌아보며 이웃을 함께 돌아보는 애통함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웃게 되는 최후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먼저 돌아보고, 죄로 인한 이웃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애통해 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남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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