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life Sermons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로마서 1장 28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40페이지에 있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주일 오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로마서 1장 25절에 이어 26절부터 말씀을 나눕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알만한 것들을 많이 남겨두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추악한 죄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6절부터 살펴봅니다.
26절이 때문에25절에서 말하는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부끄러운 욕심이란 헬라어 ‘파도스 아티미아라는 말로, ‘정욕’에서 더 나아가
추잡한 성적 욕구’를 의미합니다.
얼마나 추잡한 성적 욕구인지 그 다음 구절인
26절의 하반절과 27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여자들이 순리대로 써야할 것을 바르게 쓰지 않고, 바꾸어 썼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는 자세히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7절‘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그와 같다는 것 26절에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 것’을 말합니다.
남자들도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27절 하반절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남자끼리 동성애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 것
여자들 간의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즉 남자들이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데
남자들 또한 여자들의 동성애처럼, 남자들 사이에 동성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동성애 범죄로 인하여 스스로 죄의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즉 범죄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심의 대가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동성애를 연구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성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병으로 인해서 대부분 오래 살지 못합니다.
사는 동안에도 수많은 고통을 당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성병에 걸린 대부분의 남자들이 성인 기저귀를 차고 생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게 되는 ‘상당한 보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성욕이 불일 듯하여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 일 듯 하매’헬라어 ‘엑세카우데산’의 뜻은 ‘다 타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단어로는 ‘Burn out' 우리가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좋은 의미로는 어떤 일을 열정적으로 쏟아 냈을 때,
정말 열심히 ‘불태웠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Burn out' 됐다.
이렇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욕, 성욕, 탐욕의 육체적 쾌락을 즐길 때,
오늘 밤도 불태우자. 금요일 밤을 불태우는 금요일, 불금이다.
이렇게 많이 표현합니다.
실제로 금요일 밤에 성적인 범죄들이 가장 많이 일어납니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길에서 부침개 요리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문화의 끝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 끌고 가는 사단의 계략과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전에 방탄소년단의 노래 제목 중에 ‘불타오르네’(Fire) 라는 노래가 유행했었습니다.
너도 나도 청소년, 초등학생들까지 춤을 따라하면서 부르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 그 노래를 들으면 가장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의 열정을 불태워보겠다.
내가 전도로, 말씀읽기로, 봉사로, 좋은 일로 불태워보겠다.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이 노래 들을때마다, 오늘 밤을 불태워야겠다.
육체적 쾌락을 끝까지 즐겨보자. 이런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의 노래를 아이부터 어른까지 국민노래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사람들은 꾀를 내어 만물을 왜곡하고 오염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와 착취를 해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품위있고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부끄러운 욕망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망가뜨렸습니다.
어린 아이때는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제멋대로 굴고, 부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본능을 따르기 시작하면,
부모에게는 끔찍한 재앙이 됩니다.
사춘기 딸이 엄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아주 무섭습니다.
서로 악을 쓰고, 욕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엄마가 때리기도 하지만,
자녀가 반항하며 먼저 손을 올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자녀가 내뱉는 말이
“그러니까 누가 나를 낳으래!!”
그러면 엄마는 ‘멍’해져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변에 흔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경험해보신 분들도 계실텐데요.
본인이던지, 자녀이던지, 자매, 남매이던지, 티비를 통해서든지,
주변에 얘기를 들으셨던지... 아마 많이들 들어서 경험해서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도리를 애써 무시하니
짐승은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사람은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짐승은 아무리 사납고 잔인해도, 일단 먹이를 먹고 나면,
결코 다른 짐승을 고의적으로 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분이 나쁘다고 죽일 수도 있고, 재미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게임이나 영화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나하고 생각이 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들은 아무리 문란해도 창조의 질서를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질서를 어기며 잘못을 저지릅니다.
문명의 끝에는 반드시 비상식적인 문란함이 만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가정이 깨어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로마가 망할 때를 보면,
황제들이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성적 관계를 맺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내버려 두심으로서 사람이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받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자기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퍼레이드를 만들어서 권리를 주장해도,
본성적인 사람의 정서는 그것이 불편하고, 비정상적이고, 부끄럽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본성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성애가 창조의 질서를 파괴한 추악한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서로 인정해주고, 결혼할 수 있는 법도 통과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에는 어쩔 수 없이 입양절차가 필요합니다.
입양된 아이가 남자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고, 여자를 아빠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의 인권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입니까?
그러면 그때부터는 남자, 여자 둘 다 엄마, 아빠 가능한 것으로 또 법을 바꿔야 합니까?
매번 법만 바꾸면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방종을 자기 권리라고 여기고 몸을 부당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은 자기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날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창조의 질서와 도리를 유린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절‘마음에’ 라는 말의 ‘마음’헬라어 ‘에피그노세이’ 라는 단어로
‘마음’이라는 뜻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지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식은 일반적으로 널리 편재해 있는 지식과는 다른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 ‘보다 근원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뜻으로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지식, 근원적인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인데, 그곳에 하나님을 두는 것을 거부합니다.
여기에서 ‘싫어하매’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헬라어 ‘에도키마산’ 이라는 단어인데, ‘금이나 은 등의 금속을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PPT - 활석방형>
‘시금석’이 무엇이냐 하면, 단단한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 돌을 뜻합니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배웠던 것인데, 기억나시는 분 계실까요?
활석많은 방형이 인정없이 석황을 강금했다.
이게 금속의 단단함 순서를 외우기 쉽게 말로 풀어놓은건데요.
활석, 석고, 방해석, 형석 이렇게 딱딱한 정도가 순서대로 있는 표입니다. (클릭)
그래서 앞자만 따서 활석방형 인정석 황강금 이렇게 외웁니다. (클릭)
그래도 안외워지면, 말로 풀어서 (클릭)
활석많은 방형이 인정없이 석황을 강금했다.
그러니깐 굳기, 딱딱한 정도를 표시할 때
손톱은 석고에는 긁히는데, 방해석에는 안긁혀서
2도와 3도 사이, 2.5도쯤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일 단단한 것이 금강석인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지요.
다이아몬드로 긁으면 다 긁힙니다. 제일 단단하니깐요.
그렇게 무언가의 기준을 정할 때 쓰는 것이 바로 시금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 바로 이렇게 시금석으로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지식 안에 두려하지 않고,
그냥 시금석 삼아 이리 저리 시험만 해보고,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상실한 마음’ 곧 마음은 근본적인 지식인데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지식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결국 합당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합당하지 못한 일’이란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26절, 27절의 동성애의 죄악들입니다.
그리고 29절부터 말하고 있는 수많은 불의의 죄악들입니다.
이것이 결국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버린 죄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8절에 말하고 있는 모든 경건하지 않음, 곧 불경건의 죄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절부터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짓게 되는 모든 불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불의’‘의’의 반대개념으로, ‘의롭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첫째로, ‘추악’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악한 행위입니다.
둘째로, ‘탐욕’은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위해 남을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악의’는 추악의 내적인 의미입니다.
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지식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찬 모습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섯째로, ‘살인’육체적 살인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증오도 포함합니다.
남을 시기하면, 우리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그 사람을 증오하고 죽입니다.
결국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며, 실제로 살인에 이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섯째로, ‘분쟁’은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움을 좋아하는 기질입니다.
일곱째로, ‘사기’는 악을 이루기 위한 교활함, 속임, 배반 등을 가리킵니다.
여덟째로, ‘악독’은 사람을 해치려고, 그 사람을 고의적으로 악한 상황으로
밀어 넣으려는 성향입니다.
사람이 악해질수록 악독해집니다. 알면서도 일부러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사람을 교묘하게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9번째, ‘수군수군하는 자’는 이웃에게 비밀스럽게 이간질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독’을 붓는 행위라고 번역된 성경도 있습니다.
즉, 악평을 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30절에 10번째, ‘비방하는 자’는 수군수군하는 자와 달리 공개적으로 악평을 합니다.
11번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자로 이해되지만,
성경의 문맥으로 볼 때, 먼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고는
지식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가 더 바른 해석입니다.
12번째, ‘능욕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겨 보는 사람입니다.
13번째, ‘교만한 자’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14번째, ‘자랑하는 자’는 헛된 목표를 내세우며 의미없는 약속과 거짓을 자랑합니다.
15번째,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를 죄악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악의 전파자이며, 매일 새로운 악을 찾아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16번째,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조차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와 부모는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런데 부모에게조차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31절에 17번째, ‘우매한 자’는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18번째, ‘배약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입니다.
우리나라는 코리안 타임이라는게 있어서 항상 약속시간 30분은 기본으로 깔고 갑니다.
행사를 진행할 때에도 30분은 코리안 타임이라고 해서, 항상 30분 뒤에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19번째, ‘무정한 자’는 기본적인 애정이 결여된 자입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나, 나이든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식과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그당시 헬라 지식인들에게 있었습니다.
20번째, ‘무자비한 자’는 고통받는 자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도 무심코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의 행동과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지나치는 것이 습관이 될 것 같아서
도와줘야 될 사람이 보이면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주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참 어이없는 경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하철에 다리가 없어 기어다니는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멀쩡하게 걸어다니며 오락실에서 오락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주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그 돈은 그 거지를 위해서 준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쓴 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습관,
먼저 낮아지고, 섬기려는 습관, 손해보려는 습관
이런 좋은 습관들을 많이 만들수록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자꾸만 탐욕이 생기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고, 남보다 잘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보단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게되고,
내가 손해안보려고 남을 손해보게 만들고,
내가 인정받으려고 남을 깍아내리고...
이런 모습들이 지식이 많다고 하면서, 그 지식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시험하고는 버린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런데 그들이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사형에 해당되는 중범죄임을 다 알면서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드라마를 보면, 대외적으로는 아주 성공한 정치인인데,
악역의 끝판왕, 최악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그 악역의 끝판왕이 항상 하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왜 신은 나같은 녀석 안데려가고 뭐하고 있는걸까?”
“지옥은 나같은 놈들 데려가라고 있는 곳이야”
“지옥을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지옥이야”
본인이 가장 나쁜 놈이라고 본인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탐욕과 정욕에 끌려 다니면서 계속해서
불의를 저지르면서 끝없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사형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법정에서 받는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사형,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죄악을 끊지 못하고, 계속 행할 뿐 아니라
그렇게 행하는 잘못된 길로 행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은 어떠한 노력과 이유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심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과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순과 결핍과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지식에서 배제한 것,
곧 하나님을 상실한 그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진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합당치 못한 일들을 계속해서 행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를 배제하고 보니깐
악을 행하는데 거칠 것이 없게 되었고,
옳고 그름보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계속 내버려 두니깐,
가장 가까워야 될 사람의 관계부터 다툼과 불화가 시작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각자가 불의한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려고 하니깐 모든 종류의 죄가 동원되었습니다.
내가 만족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질이 나쁜 죄는 명백히 죄가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 시키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서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잠시 동안 위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법정에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법이 엄중하게 집행이 됩니다. 형량이 가중이 됩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체벌을 하기 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묻습니다.
이럴 때 뻔뻔스럽게 ‘제가 무얼 잘못했는데요?’ 이렇게 따져 묻는 아이들에게는
법대로 엄중하게 아이를 다루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권위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은 더욱 엄중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29절에서 31절까지 나타났던 20가지의 죄악된 모습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면,
내 안에, 나의 생각과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이켜 모든 앎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의 중심을 내어 드려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중심, 생각, 아는 것의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결단기도
1. 동성애와 모든 성적인 죄악에 빠진 영혼들이 그들의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2. 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했던 죄악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방종이 아닌 진리의 가르침으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도록
3. 나를 창조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리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3가지 기도제목으로 짧게 3분간 통성으로 기도하시고, 제가 축도로 예배 마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 크게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의 상실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심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에 감사합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스스로 추악한 죄인임을, 그런 나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을
더 깊이 느끼고, 알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 지혜가 한 주간 더 말씀을 붙잡게 하는 힘이 되게 하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우리 안에 지금도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깨닫고
지식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여기 모인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머리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Related Ser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