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을 넘어서는 신앙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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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54:1-7(구약 841쪽)
시편 54:1–7 NKRV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4편은 소제목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편이 어떤 분위기와 배경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의 소제목을 풀어서 말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십이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사울 왕에게 다윗이 숨은 곳을 말할 때’
이는 구약성경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서 나오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후로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자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은 다윗을 시기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합니다.
이에 다윗은 몸을 피해 여기저기로 도망을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십이라는 지역에 숨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사울 왕에게 다윗이 자신의 땅에 숨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사울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를 피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사무엘상 26장에서 이 일은 다시 반복됩니다. 십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 왕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사울 왕에게 죽을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다윗의 마음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십이라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십이라는 지역은 고대 이스라엘의 남쪽지 역으로 다윗이 속한 유다지파 사람들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쉽게 말하자면, 다윗은 고향 땅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고향 땅에서 다윗을 두 번이나 밀고해서 죽을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일종의 배신을 당한 것이고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꼈을 겁니다. 사실 다윗이 고향 땅 쪽으로 온 것은 주변 지역이던 그일라라는 곳에 당시 이스라엘의 적이던 블레셋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 중에도 고향 땅을 수호하기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블레셋과의 전투를 치루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당한 일은 오히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 또는 배신당하는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그와 같은 배신 또는 고통을 배경으로 쓰인 시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때로는 배신의 쓰라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내가 사랑하는 자식일 때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 때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무서운 말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옛 속담에서처럼, 이러한 종류의 배신 곧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과 같은 배신은 우리에게 굉장한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한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트라우마라 불리며 이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간략히 말씀드리긴 했지만, 저에게도 배신에 대한 고통의 시간이 있었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통이 몰려올 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고통을 주는 이들을 향하여 복수와 앙갚음을 꿈꿉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좌절을 경험하고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도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인데, 넷플릭스라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방영된 드라마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회자가 되어서, 그것과 관련된 여러 패러디가 TV방송에서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어린 시절 학교폭력을 당하여서 삶이 고통으로 얼룩진 주인공이 복수한다는 내용인데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 사람이 고통을 주는 대상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처단하고픈 욕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기도 할 것이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늘 시편에서 배신당한 다윗과 같은 시인의 반응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물론 배신을 당한 시인도 그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수를 해주실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복수를 통해 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전적인 믿음으로 그 고통의 순간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얘기했던 대부분 사람이 배신과 고통을 대하는 자세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고통을 준 대상에게 갚아주어야만, 고통이 해소될 것을 믿기에 복수를 꿈꿉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앙갚음을 해주시기 때문에 고통이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으로 인해서 고통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관심과 초점이 신앙 안에서 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보면서 그 고통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신앙 밖에 있다면, 고통을 주는 대상에게만 집중함으로 어쩌면, 영원히 고통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과거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타조는 위기 상황이 오면, 자신의 머리를 땅에 처박는다고 말입니다. 이는 눈앞에 보여지는 현실을 회피함으로 거짓 위안을 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면 당장의 위기는 보이지 않으니, 위기를 벗어났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는 것이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눈앞에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트레스나 고통이 닥칠 때 사람들이 과음을 하거나 폭식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일 것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통을 넘어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수한다고 완전히 그 고통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실 복수를 꿈꾸지 못합니다. 나의 원수들은 쉽게 복수를 당해줄 만큼 약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고통은 우리에게 큰 좌절감과 삶의 의지들을 꺾어버리게 합니다. 비극적이게도 그것이 우리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에게 합당한 처우를 해주시길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통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고통을 주지 않으면 얼마나 좋냐고요. 네,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들을 통해 이루실 일을 보아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고통을 넘어선 이들은 분명 과거보다 놀라운 변화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물론 아픈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요. 그러나 그것이 분명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임은 틀림없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그와 같은 여러 아픔을 통과하고서 이만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시인과 같은 고백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시편 말씀 6절과 7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54:6–7 NKRV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 인생은 고통의 문제를 넘어서 감사와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실 그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께서 그와 같은 삶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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