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가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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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채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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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10–13 KRV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시기에는 일년 중에 우리가 성경읽기표를 따라 계시록 읽기를 마치고 창세기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게 됩니다. 특히 베드로후서와 계시록은우리의 감각을 일상적인 염려과 관심거리에서 벗어나 엄중한 영적 현실을 직면하게 하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현실감각을 갖게 합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의 현실입니까? 일상적인 염려거리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까? 후자입니다. 저는 진정한 현실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자주 베드로전후서와 계시록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우리가 그 세세한 내용은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참된 영적 현실감각은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계시록의 마지막 세 장과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KRV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창세기 1:1 KRV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하늘과 땅이 사라졌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다니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 말씀이 다른 곳에서 이렇게 증언됩니다.
베드로후서 3:5–7 KRV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창조의 첫째날에 빛과 어둠이 분리되고,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갈라지고, 셋째날에 육지와 ㅅ이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합쳐지고, 땅 밑에서 샘이 터져서 온 땅이 다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창조가 일곱째 날에서 거꾸로 둘째 날이 시작되기 전까지 되감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렇게 노아 때는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다음에 오는 심판은 창조의 둘째 날까지가 아니라 맨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노아 때는 물로 덮는 심판이, 마지막 날에는 불사름을 받는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제는 그 동일한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전에는 물로 씻듯이 심판을 하셨지만, 그날에는 불로 소각하는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이 지구는 이산화탄소로 지구온난화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모릅니다. 지구가 더워져서 더워진 바닷물에서 나온 이산화탄소가 증가한 것인지 아니면 이산화탄소가 많아져서 지구 온도가 더 올라간 것인지 모릅니다. 사이다의 온도가 올리면 이산화탄소가 사이다에서 더 나오지 않습니까?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바닷물 속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도 더 배출됩니다. 그리고 지난 100년간 지구 온도는 섭씨 0.9도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변화는 지구 역사 속에 흔히 있던 것인데, 마치 지구가 망할 것 같이 호들갑을 떱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한 후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지구의 녹지가 현저히 증가했고, 앞으로 캐나다의 녹지는 420만 평방 킬로미터, 러시아는 430만 평방미터 증가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면적인지 감이 잘 안 오지요? 캐나다의 녹지가 대한민국 면적의 420배, 러시아는 430배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대로 된다면, 지구의 식량문제는 해결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지구를 그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허술하게 지으셨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없습니까? 진짜 지구의 멸망은, 온난화가 즉 따뜻해지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소각되어 없어지는 식으로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온기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온 불로 망합니다. 진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지 탄소가 아닙니다. 사이비종말론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 하십시오. 이산화탄소보다 두려워 할 것은 우리의 죄악과 주님의 심판입니다. 마귀의 책략은 항상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을 덜 중요한 것으로 대체하게 하는 것,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덜 두려워해도 되는 것으로 대체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으로 하실 일의 본보기를 소돔과 고모라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6 KRV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그때는 국소적으로 일부 도시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지만, 주님의 날에는 노아 때 처럼 온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장 7절에서 보면, 지금 보존되고 있는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간수되고 있는 것, 일시적으로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우주는 영원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이 하늘과 땅은 폐기되기 위하여 대기 중인 disposable한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인식을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인생이 덧없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사는 지구도 폐기되기 위하여 대기 중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사실을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생각해 보세요. 이 측량할 수 없는 우주, 우리가 다 탐사하지도 못한 이 지구를 폐기하시다니 얼마나 아깝습니까?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하늘들과 땅을 폐기처분하시는 것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폐기되는 우주와는 비교가 안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3장 9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9 KRV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왜 주의 약속은 이리 더딥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주님이 왜 아직도 오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을 심판하실 계획을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도시가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 같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멸망을 즐거워 하지 않으십니다. 소돔성에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하나님은 소돔성의 심판을 미루셨을 것입니다. 또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KRV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먼저 배도가 그리고 무법자들이 오지 않고는 그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배도가 일어날 때 놀라지 마십시오. 이런 일을 반드시 거친 후에야 주의 날이 옵니다. 그리고 오늘날 무법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요즘 서구사회에서 일어나는 영적, 도덕적 타락, 지성과 통치의 타락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고 배우고자 했던 서구사회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나라, 우리의 개화기에 인재들을 키워내 준 나라, 일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나라, 북한의 침략과 중공에게서 우리를 지켜준 나라, 625 이후에도 우리를 지켜준 나라이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한국사람들 누구나 한 다리 건너면 다 미국에 친척이 있거나 친구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공부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점점 바벨론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 두 달 전에 존 맥아더 목사님이 캘리포니아의 뉴썸 주지사에게 공개편지를 보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낙태를 금지하는 주의 여성들이 캘리포니아에 와서 자유롭게 낙태 수술을 받도록 광고를 내었습니다. 주 정부는 낙태를 금지한 주는 사랑이 없는 주이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존 맥아더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주지사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살인을 저지르는 일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다니 대체 당신에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느냐?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라고 하면서 낙태를 권하고, 살인하는 일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다니 당신의 영혼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빨리 회개하라.”
임신한 여성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은 누구입니까? 자기 뱃속에 있는 태아가 아닙니까? 자기 몸 속에 있는 아기를 기생하는 생물 정도로 취급하는 악한 자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다니 이 세대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캐나다에서는 요즘 공개적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상품’ 광고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Physician Assisted Suicide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을 배경으로 이러한 살인을 미화시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왜 존재합니까? 사람을 살리려고 존재하지요? 그런데 이런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비즈니스로 삼아 버젓이 광고를 합니다. 낙태가 그렇고 안락사도 그렇습니다.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있는 의사들도 그랬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한 두려움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존귀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인간의 존엄성을 압니다. 왜 그런지 모를 뿐이지요. 고대 시대에 왕의 형상을 어떤 도시에 두는 것은 그 도시가 왕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도시의 통치자는 왕의 대리자임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이고 하나님의 권위가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이웃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언청이로 태어났다고 태어나자 마자 아이를 죽이는 중공이나, 중국에서 임신해 왔다고 북송되자 마자 낙태를 시키는 북한하고 서구사회가 다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8:44 KRV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를 특징짓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이고 또 하나는 죽음입니다. 마귀가 가는 곳마다 죽음이 따라다닙니다. 낙태, 자살, 살인, 전쟁, 테러가 따라다닙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고, 온 지면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마귀를 따르는 자들은 이 지구상에 인구가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백 년 전에도 그런 말을 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이 명령을 취소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그만!” 이라고 하실 때까지 이 명령은 유효합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제 그만!” 이라고 합니까? 자기가 하나님인 줄 아나 봅니다. 나치는 유대인들만 학살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했습니다. 중공은 한 자녀 이상 갖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오랫 동안 지속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시장에 버려졌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은 전쟁을 유발합니다. 불임을 종용합니다. 멀쩡한 어린 아이들을 꼬득여 성전환수술을 받게 합니다. 한 번 성전환수술을 받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임 상태가 되는 것이 뻔한데, 그런 짓을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되,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그것을 억지로 부인하기 위해 이상한 젠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성은 수십 가지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마귀가 어떤 말로 이 세상을 속여도, 사람의 생명은 너무 소중하며, 인간에게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존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수 불가결한 전쟁이 아니면 전쟁도 자제해야 합니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은 너무 쉽게 전쟁을 유발합니다. 최근 수 십년간 일어났던 전쟁 중에 정당한 전쟁이 얼마나 됩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누구의 자식, 누구의 아버지, 누구누구의 형제가 죽어 나갑니다. 전사자의 가족들, 부상자들의 가족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정부가 무너진 나라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저질러 놓고 수습도 하지 않은채 떠나는 무책임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아, 이 죄를 다 어떻게 하려는지 ……
다시 3장 10절로 돌아가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10 KRV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기서 ‘체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여러 번역들을 비교해보면, 천체, 원소, 기본원리 등으로 나옵니다. 창 1:1 까지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시록 21:1 그대로 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계 20:11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1–12 KRV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땅과 하늘이 마치 도망간 것 같이 사라졌습니다. 베드로후서로 돌아가서 보면, 여기서 ‘드러나리로다’의 원 뜻은 ‘발견될 것이다' 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발견될까요? 한 번 눈 앞에 그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하늘도 땅도 다 사라진 상태로 내 자신을 가릴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벌거벗은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모습을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받는 평판, 명예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젊어서는 돈을 버는데 관심이 많다가,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명예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명예라는 것이 얼마든지 거짓될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내 자신을 가려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받는 평가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은 상태이니 그날에 멸망의 심판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상태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담은 나뭇잎을 엮어서 자기의 벗은 것을 가렸는데, 그날에는 그것마저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급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잘 하였도다" 하는 평판을 받게 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자라고 착각했던 자들이 “악하고 게으른 자야. 너의 삶은 다 거짓이다. 너의 삶은 완전히 배설물이다" 이런 평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나의 벌거벗은 것을 가릴 옷이 있는가?”
이 심판은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노벨상을 탄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벼슬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시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 승소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억울한 심판을 받았으나 그날에는 명예롭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 세상의 거짓된 교훈을 거부하고 끝까지 진실을 말하고 증거하다가 사형을 당한 우리의 형제들이 그날에는 충성된 증인으로서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 평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평판과 명예보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평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 2023년 새해 첫 주에 [Facing a Tolerant World with Intolerant Truth] 라는 제목 설교를 하셨습니다. [세상이 수용할 수 없는 진리를 들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세상을 맞서기] 정도의 제목이 되겠습니다. 마치 그의 모든 설교를 집약한 것 같은 설교로 느껴졌습니다. 설교를 하시는데 목소리가 너무 불안했습니다. 호흡곤란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를 진행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자연스럽게 돌아왔고 50분 설교를 잘 마쳤습니다. 후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존 맥아더 목사님의 여러 혈관들이 막혀서 수술을 받으시고, 지금은 회복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연세가 83세 이시고, Grace Community Church에서만 50여년간 설교를 하셨으니, 이제 퇴장하실 때가 됐나보다 하면서 아쉽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수 십년간 잘 싸워오셨고 많은 사람들에게 참 좋은 교사이셨던 목사님에게 직접 얼굴을 보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기회가 올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이후로 이 목사님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치열하게 싸운 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대중의 평판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듯,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 교훈에 주의하며 사신 분입니다.
그는 종교다원주의가 만연한 때에 대중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증언하였고, 이슬람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에 삶을 바쳤습니다. 그는 20세기의 은사주의의 거짓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는 strange fire라는 책을 내시고 또 strange fire conference를 열어서 은사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또 체험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분들에게 신학적으로 설득하고 또 사례를 통해서 확신있게 이 문제를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은사주의에 깊이 빠진 교회 안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결정적인 포인트는 strange fire conference의 모든 동영상 파일을 보고 나서입니다.
그는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확실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관화 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서 객관적인 진리를 확실히 밝혔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객관적인 진리를 절대적 윤리규범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모든 것이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성이 수 십 개라고 하고, 동성끼리 결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혼란은 선악의 아는 나무 실과를 먹은데서 나옵니다. 윤리의 기준이, 덕의 기준이, 선악의 기준이 자기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다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 실과를 먹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 모든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매일 발견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결혼에 대하여 질문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마태복음 19:4–5 KRV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구약성경 어디에도 중혼을 금지한 명시적인 명령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순수한 상태였다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이요, 사람이 그것을 나눌 수 없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도 선악을 아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맘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진리가 주관적일수가 있습니까? 포스트 모더니즈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오늘날에는 깊은 확신 위에 서있는 사람들을 기피합니다. 그러나 존 맥아더 목사님은 그런 확신의 근거가 매우 탄탄한 분입니다. 지적으로 매우 잘 정리되어 있고, 윤리적으로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남에게 거스리는 말을 하는 것을 교양 없다고 여기는 이 세대에서 진리에 확실히 서서 확신있게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일수록 공격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교회 목사님일수록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존 맥아더 목사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쓰신 책 몇 가지만 말해보면, [진리전쟁], [Gospel according to Jesus(구원받는 믿음은 무엇인가?)], [이상한 불], 대부분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논란과 공격을 두려워 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을 성경의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런 내용을 설교하고 책으로 출판하고 콘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런 싸움을 끝까지 잘 싸우셨습니다. 그 과정 중에 많은 상처를 받으신 것 같고, 이제 체력이 다하신 것 같습니다. 마치 엘리야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처 중에 가장 큰 상처는 함께 동역하던 형제들에게 받은 상처일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냐는 것 아닙니까? 형제들이 이해해 주지 못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후서 3:11–12 KRV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영원할 것만 같던 천지가 다 풀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날에 하늘들은 불에 사름을 당하고 모든 물질의 근원이 녹아질 것을 아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12절에서 ‘간절히 사모하라' 이 대목은 명령어가 아니라 분사입니다. speudo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단어 speed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번역 중에는 ‘재촉한다'로 번역된 것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분사의 어감을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재촉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까?” 입니다. “어서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하면서 모든 관심과 정성이 여기에 쏠려있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베드로후서 3:13 (KRV)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가 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밟고 사는 우리에게 계시록 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증언은 우리의 감각과 경험으로는 감각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각종 보석들의 이름은 창2장의 보석 이름들을 기억나게 하고, 새 예루살렘의 주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물은 창2장의 강의 이름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그 강 양 옆의 나무들도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연상시킵니다. 우리에게 새 에덴동산을 주시는 것은 알겠는데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의가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온갖 거짓된 것, 더러운 것, 비열한 것, 모함과 착취와 학대, 사기, 살인, 폭력과 살인, 교만, 음란함, 우상숭배 등을 보면서 날마다 탄식하고 신음합니다. 그러면서 “아!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합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의가 거한다고 합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나 좋습니까? 다시는 악을 보면서, 거짓된 것을 보면서 탄식하고 신음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밖의 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몸을 입은 감각으로 알게 되겠지요.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에게 의가 거하는 곳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마태복음 5:6 KRV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6:33 KRV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합니까? 이 땅의 통치가 너무 엉망이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의로우신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면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14 KRV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원문의 의미를 좀 더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들을 기다리니 그에게 흠도 점도 없는 상태로 발견되도록 힘쓰라."
그러면 이 주제를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다루는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8:2–4 KRV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받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나오라고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도읍이 멸망할 때 그 발에 뭍은 먼지 때문에 불똥이 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롯도 소돔성이 심판을 받기 전에 진작에 그 성을 떠났어야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7–8 KRV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그는 그 죄악의 도시에서 신음하듯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도 바벨론 같은 이 세상의 풍속을 떠나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자기 아내를 잃고 딸들과 사이에 자식을 낳게 되는 지경까지 갔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 받지 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수치를 당하거나 그의 아내처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 롯의 식구들처럼 동화되고 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 21:7–8 (KRV)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기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의가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반복해서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증언', ‘증인' 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충성된 증인이셨고 우리에게도 충성된 증인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하는 자들 즉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를 주님의 평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겁쟁이들은 이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자는 사실 믿지 않는 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는 자는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흉악한 자' 라고 번역된 원 뜻은 ‘가증스러운 자' 입니다. 살인자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음란한 자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술객’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pharmacos입니다. 화학적인 장난으로 사람을 속이는 마술사입니다. 연기를 피우거나 환각적 효과를 노리기도 합니다.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짓들을 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연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이런 영적인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욕구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의 아비,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인 마귀를 따라서.
요한계시록 22:14–15 NKRV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 자신의 거짓됨과 죄악을 날마다 주 앞에 고백하며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은 그 심판대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어떤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며,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신뢰하고 지키며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된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락을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당신은 하늘과 땅이 다 사라진 후에도 안전한 위치에 있습니까?
당신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당신이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중요한 평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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