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스가랴, 평화의 왕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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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스가랴 9:9-10(구약 1321쪽)
스가랴 9:9–10 NKRV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루살렘에 가실 때에 성경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펼쳐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호합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로 지키는데요.
이때에 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는지를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알려 줍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스가랴에 기록된 오랜 예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아 곧 구원의 주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구약성경 스가랴에 나오는 이 예언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스가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러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70년 간의 포로생활 이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른바 1차 포로귀환인데요.
이 1차 포로귀환은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를 비롯한 인물들이 주도하고 지도자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그들은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고국의 실정은 1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케 하였습니다. 사실상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 또 당시는 가뭄으로 생존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낙담하는 분위가 만연되어 갈 때,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 스가랴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8개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건하시고 그의 대적들을 멸하실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와 더불어서 그 일을 행하실 이 곧 메시아의 도래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 메시아의 등장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는 것인데요. 그것의 큰 특징이 바로 나귀 새끼를 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 곧 앗수르와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걸쳐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의 통치자들은 어마어마한 힘과 권능으로 압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는 메시아 또는 그들을 다스릴 왕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귀라는 동물은 전쟁에 사용되는 동물이 아니며, 힘과 권능을 나타내는 동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에 적합한 동물은 말입니다. 그래서 말은 전장을 누비고 전쟁에서 승리를 한 장군들이 개선행진을 할 때 올라타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나귀는 우리 문화에서 비교하자면, 소와 같이 아늑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의 정경과 어울어질 동물입니다. 그래서 나귀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탔었고 경우 따라서는 어린 아이도 탔습니다. 한편 이는 평화로운 일상에서 위치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니 나귀를 타고 임하는 메시아 또는 왕이 다소 위엄이 떨어지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이 왕이 ‘겸손하다’라고 말하는데요. 이는 원어적인 의미를 놓고 보면, 비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또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초라하고 비천해 보이는 왕을 통해서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가운데 성취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또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또 그 분을 통해 이룩되어지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평화’라 할 것입니다.
이 평화는 총이나 칼과 같은 무력으로 이룩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실상 힘의 논리에 따라서 평화가 이룩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힘이 빠졌다고 해도, 세계 경찰국을 자청하는 미국은 막강한 힘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고자 합니다. 그에 대항하는 중국도 그에 견줄말한 힘이 있기 때문에 세계에 영향력을 뻗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평화는 그러한 평화가 아닙니다.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 던짐을 통해 이룩하는 평화이고 세상의 모든 고난을 짊어짐으로 세상과 화해를 이루는 평화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우리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십자가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그와 같은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요. 사람들은 그와 같이 유약한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호산나라고 외치고 환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어떤 큰 변화와 전복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가 어긋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평화의 왕을 거부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를까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원수들을 쓸어버려주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고, 나의 모든 필요를 아낌없이 공급해주심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바람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내가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눠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 곧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나타나고 있나요? 혹은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방식을 추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요? 한번 돌이켜 볼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평화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에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룩되어지는 화해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원해진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회복의 길을 가야할 줄 믿습니다.
바라건데, 저와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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