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와 거짓복음을 배제하라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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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에 오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압살롬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무질서가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무질서가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요압의 계락 덕에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다윗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압살롬을 왕자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했다면 사울이 요나단과 함께 식사를 한 것처럼, 다윗이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처럼 압살롬과도 함께 식사를 했을텐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압살롬을 대면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압살롬인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화가나서 요압에게 따져 겨우 다윗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결코 좋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관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1절에서 4절을 보아야 합니다. 1절을 보시면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명을 그 앞에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거와 말, 호위병 오십은 일개 왕자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이 아닙니다. 왕자로서 호위를 받기엔 과한 병력입니다. 사무엘하 23장 을 보시면 다윗을 호위하는 부대가 30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거느리고 있는 호위병이 오십명입니다. 다윗보다도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또 병거와 말들이 도열해 있는 것은 전형적인 고대근동의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압살롬이 성문 곁에 서서 백성들의 재판을 보고 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시시비비가 일어나면 그것을 재판하는 것은 왕의 업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이런 업무에 취약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이런 지점을 파고들어서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은 전쟁을 한다든지 건축을 한다든지 이런 큰 일도 하지만 민생의 세세한 부분을 돌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솔로몬 왕도 아기의 엄마를 찾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의 세세한 일을 돌보는 것이 왕의 덕목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전쟁이나 건축이나 이런 큰 일들은 다 잘했는데 민생을 살피는 세세한 부분이 약해서 압살롬이 이런 지점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두고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을 훔쳤다는 말을 우리는 재밌는 표현으로 사용하지만 원문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훔친다는 말은 십계명 20장에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소유해선 안되는 영향력을 소유하려 합니다. 명백한 죄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삼권분립 체제가 되어서 사법과 입법과 행정이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왕이 다 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통치권을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법치주의는 권력을 사용할 때 법의 절차를 밟아서 권력을 사용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고대에는 법치주의가 없습니다. 권력이 재판을 합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지금 성문 앞에서 백성들의 재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백성들을 통치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재판이 통치라고 하면 4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굉장히 노골적입니다.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통치자가 되고’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아직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선지자가 계시를 받아서 압살롬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에 대한 서운하고 안 좋은 감정이 있을 뿐입니다. 권력에 대한 그릇된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 그릇된 욕망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붓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리해서 다스릴 일꾼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방식이고 질서입니다. 압살롬은 그 자신의 욕망과 감정으로 인해 이 질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무단으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불법적으로 권력을 점거하려고 합니다. 기존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시면 압살롬이 어떤 사람에게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다윗이 드고아에서 온 지혜로운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다윗은 나름대로 재판관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해 보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기존의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이 통치자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가 파괴되고 나뉘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일입니다.
(적용) 사람마다 생각하는 합리적인 것이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판단해서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게 틀린 것 같고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죄인들이 갖고 있는 착각입니다. 죄인이니까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질서만이 참된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에게서는 올바른 질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은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판단을 하고 움직이도록 하시기 전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왕을 세우시고 선지자를 세우시고 제사장을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가 질서 있게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셔서 교회가 질서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질서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화평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리수를 두지 않으십니다. 질서 가운데 다스리십니다. 질서가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이 질서에 순종해서 믿음의 공동체가 화평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 질서를 지키면 억압 당하는 것 같고 군대 같고 얽메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질서를 곧 화평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무질서는 무엇입니까? 분열과 갈등입니다. 교회를 지키는 방법은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2- 거짓된 복음이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설명)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거짓된 복음이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또 보호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왕이 없으니까 이방 세계의 침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있으면 이렇게 무시당하며 고통당하며 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을 때 블레셋과 싸우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자마자 인근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주변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전쟁을 수행해서 백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외부의 악한 대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왕이 된다는 것, 왕이 온다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압살롬은 거짓 복음을 퍼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 왕에 찾아가서 자신이 서원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 하며 헤브론에 가게 해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이 하고 있는 그릇된 행동을 모르는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지는 본문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왕권을 잘 안정시켰기 때문에 압살롬이 모반을 꾸미는 것을 알았던 몰랐던 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견제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부자지간에 앙금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압살롬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갑니다. 이곳은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고 기름 부음을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이곳에서 뭘 하려는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탐꾼을 보냅니다. 원문상으로 정탐꾼의 원문은 메라굴람이라고 하는데 레겔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레겔은 발이라는 뜻입니다.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무엇을 합니까? 이 정탐꾼은 이스라엘 곳곳으로 흩어져서 나팔 신호에 맞춰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아까전에 왕이 된다는 것, 왕이 온다는 것은 복음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압살롬이 왕이 된다는 것은 복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신 적도 없고 기름을 부은 적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계시를 전달하지도 않았고 다윗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된다는 말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 거짓된 복음입니다. 거짓된 복음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복음인 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텐데 이제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게 다른 복음을 구하게 됩니다. 압살롬이 왕이라는 그릇된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멸망의 선택지가 생겼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교회사에서 고난은 오히려 교회를 성장시키고 연단시킵니다. 복음이 다른 곳으로 확장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박해가 있으니까 신자들이 흩어집니다. 그 중 한명이 빌립이고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는 바람에 에디오피아로 또 복음이 확장 됩니다. 고난은 복음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거짓 복음은 다릅니다. 거짓 복음은 달콤하게 다가와서 복음도 아니면서 복음인척 하고 자리잡습니다. 압살롬이 다윗과 다르게 내 편이 되어주고 다윗에게서 줄 수 없는 것을 주면 압살롬이 왕이 되는게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주신 건 잘 모르겠고 나한테 좋으니까 이제부터 압살롬이 복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보좌를 통해 역사하시는데 거짓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거짓 복음은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사무엘하 15장 12저에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하고 이야기 합니다. 거짓 복음은 참된 진리로부터 많은 이들을 돌이키도록 합니다.
우리는 거짓 복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이 거짓 복음입니까? 바울 당시에는 율법주의가 거짓복음입니다.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는게 아니고 규칙을 잘 지켜야 구원 받지 이게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큰 목소리 내야 하니까 거짓 복음을 퍼뜨리고 교회가 병들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어쩔 땐 권력이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왕이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권력이 교회를 주무르도록 했습니다. 이런 거짓 복음에 대항한 것이 신대륙으로 넘어간 청교도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불건전한 성령운동이 거짓복음이 되고 또는 예수님 믿고 잘 먹고 잘살고 돈 많이 벌고 하는 번영 신학이 거짓복음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짓복음의 가면은 여러 가지지만 실체는 하나입니다. 바로 자신의 욕망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짓 복음에 대항해야 합니다. 이 거짓 복음은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우리 영혼도 병들게 합니다.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순수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복음을 유지하려면 경건에 힘써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론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순수한 복음을 지킬 때 교회가 살고 내가 살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질서와 거짓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질서에 따르고 복음의 순수함을 지켜서 믿음의 공동체를 잘 세워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교회가 잘 세우질 때 우리가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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