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책임의 백성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5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에 오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용맹을 떨치는 랍바 포위 장면 이후에 나옵니다. 겉보기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데 이후에 나오는 그 백성의 삶을 보면 그 나라가 든든히 서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서려면 그 백성이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죄인은 사람을 수단으로 여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죄인은 사람을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선 문맥에서 다윗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충성스런 신하가 있습니다. 요압이 랍바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전쟁의 공을 온전히 다윗에게 돌리고 싶어서 마지막엔 다윗에게 와 달라고 합니다. 랍바를 치고 나서 그곳의 왕의 왕관을 빼앗았습다. 성읍에서 많은 물건을 노략했습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다윗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다윗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구나 다윗만 있으면 우리 민족이 세계 열방 위에 뛰어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위상은 나날히 높아져 갑니다.
이런 긍정적인 상황에서 13장 1절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가 나올텐데 다윗이 위풍당당하게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후에 이 일이 있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전쟁에서는 승리와 집안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대비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안타깝게끔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다말입니다. 다말은 아름다웠습니다. 아마 압살롬의 이복형제였을텐데 암논이라는 다윗의 아들이 배다른 여동생인 다말을 연모했습니다. 그냥 생각나고 그리운 정도가 아니라 다말 때문에 울화가 생겨서 병이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3절에 보시면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사람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사촌지간인 친구입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 심히 간교한 자라고 이야기 하는데, 앞으로 굉장히 안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줍니다. 마치 창세기 3장 1절에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이 간교하다고 설명한 것처럼 암논은 이 간교한 친구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듯이 건드려서는 안될 것을 건드리게 될 것입니다.
요나답이 암논에게 왜이렇게 얼굴이 안좋으냐 나한테 무슨 일 있는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합니다. 암논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나답이 꾀를 냅니다. 암논이 아버지 다윗한테 부탁해서 다말이 암논을 위해 음식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논은 요나답이 말한대로 다윗에게 부탁을 합니다. 다윗은 다말에게 이복 오빠의 집에 가서 음식을 차려주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말이 암논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암논은 다말에게 음식물을 가지고 침대로 오라고 합니다. 다말의 손에서 음식을 먹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다윗도 다말에게 음식을 먹여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암논에게 음식을 먹여주려고 할 때 암논이 다말을 잡습니다. 그리고 동침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11절에 내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라고 이야기 하는데 히브리어에서 내 누이야라고 부르는 것은 연인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가서에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내 누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은 적극적으로 거절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아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지금 암논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동생의 권면을 듣고도 암논은 안하무인입니다. 13절에 말하기를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다말이 암논에게 이렇게 하면 말씀에 어긋난다고 이야기 한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어차피 수치스러울꺼 다말을 범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암논은 결국 다말을 범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암논이 다말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억지로 동침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당연히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센데,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암논의 폭력성을 강조하고 다말 입장에서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나서 15절에서 말하기를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라고 이야기 합니다. 2절에 보시면 처음에는 다말 때문에 상사병에 걸렸는데, 이제는 다말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말에 대해서 성적인 욕구만 있었을 뿐이고 이제 그 욕구를 해소하니 다말이 미웠습니다. 이 여자가 이제 나가면 나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겠구나 내가 나중에 왕이 될 때 이 여자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길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인은 사람을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람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자신이 상상한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어떤 아름다운 관계도 없습니다. 밉고 귀찮고 싫어질 뿐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인간적인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이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격의 원형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로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하시고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으로서 사람을 부르시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적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결코 사람을 욕망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 자체에 목적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순간 폭력이 사용하게 되고 냉정하게 되고 다른 이를 아프게 합니다. 사람이 목적이 되고 사람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싸운다는 것은 사람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죄인은 책임지지 않는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죄인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은 어떤 일에 대해서 전혀 신실하지 않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그렇게 원했지만 다말을 범하고 나서 암논의 태도는 180도 달라집니다. 다말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던 욕망이 해결되자 이제 다말은 필요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암논이 다말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암논이 성폭행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암논이 가라고 할 때 다말이 냉큼 도망가지 않습니다. 암논이 가라고 한 것이 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16절에 보시면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이 성적인 순결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내용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암논이 범한 더 큰 악은 무엇입니까? 바로 책임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명기 22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결하게 살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혼 안에서만 성을 사용해야 하고 음란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 중에 신명기 22장 28절-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만약에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지 않은 여자와 동침하게 되면 이것은 그 여자를 욕보였기 때문에 그 여자를 아내로 삼고 평생 버리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혼전순결을 지키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결혼 전에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는 것은 여자를 욕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하지 않는 여성을 철저하게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여성이 순결을 잃으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이 여성을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젊은 과부로 사는 것을 막고 기회를 줍니다. 22절에는 유부녀일 경우는 둘 다 모두 죽이게 되지만 처녀인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게 되면 암논이 다말을 내치려고 했을 때 다말은 이것을 굉장한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범했으면 이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암논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남자의 강압에 의해 순결을 잃어버리면 공동체에서 처할 대우가 뻔한 것입니다. 또 다말은 공주였기 때문에 이제 젊은 공주로서의 명예스러운 혼사 기회도 다 날아갔습니다. 다말은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데 여기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고 그저 욕망의 해소하는 용도로 사람을 쓰고 버리는 암논의 태도는 명백한 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말은 최선을 다해 말씀에 따라 순결을 지키려고 했고 강압에 의해서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다말이 기대할 것은 신명기 22장 29절에 나오듯이 여자를 욕보인 남자가 평생 여자를 책임져야 하는 그 율법인데 암논은 이 율법의 정신, 약자를 보호하고 책임을 지는 이 율법의 정신을 어겼습니다. 죄인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죄인의 사랑은 그저 욕망이고 거기에는 윤리와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왜 음욕을 절제하고 혼전순결을 강조합니까? 바로 책임입니다. 책임감을 갖고 사랑하기에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이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엡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디까지 책임지셨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책임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암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죄인은 책임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고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고 책임지는 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할 것은 자기 욕망에 따라 행하고 책임지지 않는 죄인이 아니라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닮아서 신실한 이웃이 되어야 하고 책임지는 이웃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책임지지 않으면 수 많은 이웃들이 고통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실한 하나님을 닮아서 이웃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죄인의 본성은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마땅이 져야 할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인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주시고 끝까지 신실하게 책임지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을 목적으로 대하고 이웃의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본문의 교훈을 지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하루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