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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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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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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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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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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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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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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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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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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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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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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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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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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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정말 잘 아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눈치를 채셨을 것 같은데요.
누구일까요?
네 맞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닮지 않은 쌍둥이입니다.
형은 태어날 때부터 붉은 털로 덮여 있었는데, 붉은 털을 특징으로 삼아 ‘거칠다'라는 뜻의 에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발꿈치'라는 뜻의 야곱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쌍둥이지만 생긴 것이 달랐던 것처럼, 성장의 모습도 다릅니다.
에서는 사냥에 능숙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으로 ‘장막에 거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에서와 야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사냥꾼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에서는 굉장히 화가 많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는 사람이기에 야곱은 내성적인 사람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사냥꾼은 고대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직업이었습니다.
사냥감을 찾고 사냥에 성공해서 결과물을 들고 오려면 성격이 다혈질 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냥감이 사냥꾼을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접근해야 하며 때로는 숨을 죽이며 매복도 해야 합니다.
진득한 참을성이 없다면 노련하고 유명한 사냥꾼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야곱이 장막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해서, 그가 마마보이였거나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의 의미는, 목축하는 사람.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역할도 절대 쉽지 않습니다.
목자도 사냥꾼처럼 강인한 체력과 힘 그리고 적극성이 필요하거든요.
양떼를 쉬게 하려면 목자는 정말 엄청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양들은 생리상 네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주어야 누워서 쉬기 시작합니다.
일단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양들은 흐르는 시냇가에서 나오는 잔잔한 소리마져 불안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에, 정말 고요하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양들은 계속해서 서열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이 끝나야 안식을 위해 눕습니다.
싸움을 하면 상처가 나겠죠.
그러면 목자가 할 일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양들이 서열싸움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자는 쉼 없이 산책을 합니다.
또한 파리나 기생충으로 인한 괴로움이 있는 양들은 눕지 않습니다.
목자는 서열 싸움을 하지 못하도록 돌아다니는 와중에, 파리나 기생충이 붙어 있는가도 확인을 해야 하며, 붙어 있으면 쫓아내고 상처난 자리에 약물을 발라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양들은 배가 불러야 눕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데려간 후, 싸우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돌아다니고 또 약물까지 말라주는 동안 양들은 배불리 먹고 나야 눕습니다.
낮과 밤으로 쉬지 않게 계속해서 돌봐야 양들이 쉬기 시작하는 것이죠.
푸른 풀밭을 찾아 목자는 계속 길을 떠나거나 혹은 푸른 풀밭을 만들기 위해 돌을 가리고 풀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며 정성을 다해 키워야 해요.
그러니까 야곱은 절대 내성적이거나, 힘이 없는 그리고 마마보이와 같은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이죠.
단지 두 사람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삭의 자녀 에서와 야곱은 잘 성장하여 각자 맡겨진 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자녀가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이삭과 리브가는 굉장히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28절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사랑하는 자녀가 다르다는 문제가 이 가정에 있었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다.”를
원어로 살펴보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항상 그의 입에 두었습니다.”입니다.
에서를 늘 가까이 두고 있었다는 의미이죠.
이삭은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삭은 그 말씀대로 살았어야 합니다.
에서가 어렸을 때부터 이 부분을 설명하고 그가 받아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져버렸던 이유는 “그가 가져다 주는 고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머니 리브가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야곱을 더 사랑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그냥 야곱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뢰 했다면,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야곱을 설득하여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오도록 시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방법으로 아들이 장자의 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사이가 나쁜 형제 중 하나가 에서와 야곱입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후손들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싸워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부모의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자격 없는 자들
오늘 본문은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유명한 팥죽 사건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팥죽이 아닙니다.
이 단어를 원어로 보면 그냥 “붉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하게 먹는 “붉은 빛이 나는 스프"입니다.
혹시 렌틸 콩 아시나요?
저는 보기만 했지 먹어보지는 않았는데요.
에서가 먹은 것은 ‘렌틸콩으로 만든 붉은 빛이 나는 스프'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에서가 야곱을 만나 팥죽을 달라!라고 말하는 장소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렸을 때 저는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을 달라고 했던 곳이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곳을 부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장하고 나서, 그들이 만난 곳은 집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큰 부자였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던 족장 이삭의 집에서 아들 에서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일어 날리 없었습니다.
사냥을 다녀오면 배가 고픈 것을 알기 때문에 음식을 준비했을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먹어야 했기에 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직접 요리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곱은 양무리를 끌고 야영지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집이 아닌, 양들을 치고 있는 목축지.
즉 야영지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보다 더 가까웠던 야곱의 야영지를 찾아왔고 그 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붉은 빛 스프를 보게 된 것이죠.
에서는 그것을 보자마자, 굶어 죽을 것 같으니 당장 달라고 말합니다.
이 것은 우리식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진짜 죽을 것 같지 않은데, 배가 엄청 고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잖아요?
그것처럼 에서는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빨리 그 것 나 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냥 붉은 죽 하나를 주면 되는데, 이 때 야곱이 형에게 말을 겁니다.
“그럼 장자권 나한테 팔아"
에서는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고 붉은 죽 하나를 얻어 먹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장자의 명분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재산을 받을 때 두 몫을 받을 권리입니다.
아버지를 이어 가장이 되는 것이기에 두 배 많은 유산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문에는 또다른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세 가지 약속을 이어 받게 되거든요.
엄청난 장자의 복이 있는데 에서는 그것을 쉽게 동생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에서는 지금 굉장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음식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이 있었고, 사냥하며 끼니를 건너 뛰었을 뿐입니다.
사냥이 생각하는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늘 말린 육포와 같은 것들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다 먹어버려서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냥하면서 요리도 수시로 했기 때문에, 에서도 요리를 곧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눈 앞에 있는 완성된 스프를 보고, 요리를 하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장자권 흥정
에서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내가 장자니까 당연히 장자권을 받는다.
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 축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집안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들들에게 말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타지에 와서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는 계속해서 말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선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사는 것을 자녀들에게 납득 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나님은 부모님 혹은 할아버지의 신일 뿐, 자신의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었거든요.
그저 듣기만 해왔기에 하나님이란 존재와 그의 약속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집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가나안 땅에 왔고, 투쟁하여 삶의 자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집안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장자는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 가족들을 독려하며 끌고 가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을 쉽게 동생에게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붉은 죽은 당장 내 삶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보이는 것'입니다.
언약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이 붉은 죽은 지금 당장 취할 수 있거든요.
당장 내 주린 배를 채우고 나에게 포만감을 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 앞에 있는 죽을 선택했습니다.
그 집안의 장자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의 재물과 하나님이 주실 복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에서처럼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선택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 같기 때문에,
우리도 흔들릴 때가 있고 믿지 못할 때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당장 내 눈 앞에는, 내 소원을 단시간 내에 이루어 줄 수 있을것만 같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을만큼의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때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오셨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내가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좋고 크고 위대한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나라에서 내가 잘 살아가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그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죠.
너무 에서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잊고 있었던 야곱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야곱이 한 일은 잘한 것일까요?
아니죠.
그도 잘못했습니다.
야곱은 콕 찝어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장자의 명분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장자권을 빼앗아’ 왔어요.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은 부모님의 신에 불과 했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않았고, 자신의 방법으로 거래를 했습니다.
그도 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약속의 성취'보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장자권을 쟁취'해낸 것이죠.
자격 없으나 자격 있는자
에서와 야곱 둘 다 장자의 축복을 받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야곱이 조금 더 낫습니다.
‘보이지 않는 장자의 축복'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권한이 자신에게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에게 장자의 권한을 요구 한 것입니다.
형이 반대해도, 하나님이 주실 것을 알았기에 말한 것이죠.
어차피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것은 나의 것이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에요.
비록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는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큰 실수를 통해 자격 없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 장자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야곱이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실수할 때도 있고,
또 하나님의 축복과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격 있다! 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자격"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싸움을 실제와 영적으로 싸워내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다고 공격을 받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다고 계속 괴롭힙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으면서 평안을 깨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을 계속해서 신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며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고, 끊임없이 그 삶을 살아내려 몸부림칩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며, 그 분들이 내 삶에 역사하시며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어떻게든 버텨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장자의 축복"과 같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의 것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내가 새로워졌음을 믿는다면, 내가 그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기대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격 없음"을 계속해서 말하며, 마음을 흔들 것입니다.
지지 말아야 합니다.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고,
내 삶 속에서 그 것을 작업하고 계심을 믿고,
그것을 누릴 그 때를 기대하며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견디는 우리를 바라보며
“잘하고 있다.
사랑한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넉넉히 견디어 낼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일부터 세상에서 우리는 또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청년들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제 개인 유튜브와 가온누리 청년부 유튜브에 매일 오전 8시에 1분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혹 가능하시면 그 1분 묵상을 보시면서, 내 마음을 매일 점검하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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