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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설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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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모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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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설교 모음 여러개

눅1:39-45
성탄의 기다림
최근에 목회자를 청빙 하고 있는 교회의 한 장로님이 저에게 추천을 의뢰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목사님,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어요".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은 신학교 졸업생 과다 배출로 고통받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엔 신학교에 학생이 안와서 일군 부족으로 사역의 정체현상을 겪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 후보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사람이 없다니". 이것은 결코 숫자상의 문제는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질적으로 우리시대의 이 민족사회, 우리교회가 필요로 하는 준비된 일군의 부족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와 요셉이 살고 있는 시대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세계를 정복한 로마엔 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훈련된 얼마나 많은 일군들이 많았고, 예루살렘에도 유대교의 엄격한 종교적 훈련을 받은 얼마나 많은 일군들이 있었는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고있는 사람들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은 뜻밖에 나사렛 땅에서 이름 없는 틴 에이져 의 소녀 마리아를 선택하여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기적의 일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어떤 자질을 보셨는지를 보았고, 오늘의 본문은 마리아의 잉태이후의 출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역사의 무대 위에 그녀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시점이었습니다.
아마 여기계신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쓰임 받는 인생을 살고있지 못하다고 느끼신다면 그가 나를 본격적으로 쓰실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쓰심을 기대하는 사람마다 어떻게 준비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까요?
1.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42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의 구세주 잉태를 알고 "큰소리로 불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큰소리'라는 단어는 본래 "기쁨의 부르짖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어서,44절에 보면 엘리사벳의 아기(요한--6개월 앞선)가 마리아가 잉태한 구세주이신 아기를 알아보고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고백 합니다. 마리아 자신도 이 사건후에 찬양하면서 47절에 보면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당연한 라이프 스타일은 기쁨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마리아의 인생의 장에 좋은 일만 예측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마리아가 삶의 초점을 자신의 편안함과 안전함에만 맞추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으나, 그녀의 기쁨의 비밀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에서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2. 교제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심을 기대하는 사람마다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교제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는 선언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기뻐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을 나눌 대상을 찾았고 그래서 엘리사벳을 찾아 간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39절에 보면 이때에 마리아가 빨리가서 40절에 엘리사벳을 만나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엘리사벳을 찾았을까요? 친척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36절--친족) 아마도 더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36절을 읽어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는 것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면서 엘리사벳의 실예를 든 것입니다.(물론 이 두여인의 경험에는 본질적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마리아는 결혼이전이었고 남자 없이 잉태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두 여인 에게는 공유하는 경험이 있었는데 곧 같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끼리 끌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공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남으로 형성되는 그룹을 사회학적으로 homo-geneous 그룹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치유의 경험이 발생합니다. 나눔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제에는 위로, 모방, 치유 그리고 변화의 강력한 경험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삶을 위해 소그룹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약 3개월 여의 엘리사벳 과 의 교제를 통하여 미래를 직면할 새힘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미래의 사역을 위해 이런 교제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3. 찬양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마리아의 기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찬양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문 바로 다음 문단이 바로 "마리아의 찬가"(THE MAGNIFICAT)입니다.-46절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찬양하면서 출산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태교교육 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찬양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 중에 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찬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고,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때로, 우리가 찬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찬양이라는 단어가 너무 종교화된 까닭입니다. 찬양은 영어로는 PRAISE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칭찬입니다. 여러분, 칭찬 받으시면 소감이 어떠신지요? 기쁘시지요? 삶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이것이 칭찬의 능력 곧 찬양의 능력입니다. 칭찬하는 관계, 칭찬하는 공동체에는 건강함이 있습니다. 이 건강함은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저의 기도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뻐하고 교제하고 찬양하면서 미래의 사역을 준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눅1:26-38
성탄의 예고
슬픔많은 세상에서 기다려지는것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슬픔많은 세상을 사는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기쁨의 소식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일일것입니다. 반면에 슬픔많은 세상을 살며 경험할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 있다면 슬픈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일에 쓰임받은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사렛 땅에 살던 무명의 한 틴에이져 소녀가 이 위대한 일에 쓰임받고 성모가 된 비밀을 배울수 있을 것입니다.이 사건을 통해 여러분과 저는 우리네 인생의 장에서 하나님께 붙들리어 쓰임받는 비밀의 단서를 제공받을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쓰임받은 비밀' 무엇일까요?
1.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 입니다.
마리아의 선택을 말할때 가장 본질적 요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마리아를 이란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 로마엔 얼마나 훌륭한 요조숙녀들이 많았을까요? 또 이스라엘땅에도 탈무드와 토라로 잘 교육된 랍비의 딸들이 수도인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런데 이 모든 유명한 도시의 여인들을 택하는 대신 이방의 땅처럼 여겨진 갈릴리 지방에 속한 나사렛(오죽하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는 말이 생겼을 마을이었습니다)의 평범하고 소박한 틴 에이져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이 정답입니다만 그말이 인간적 요인을 전적으로 배제한것이냐?고 묻는다면--그렇지는 않다는 암시가 본문에 있습니다.
--28절/은혜를 받은자여---여기에서의 수동태는 분명 그녀의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택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30절/--은혜를 얻었느니라,이 역시 수동태로 보입니다만 실은 능동태 직설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You have found faviour(grace)with God"--그녀가 은혜를 찾아왔다는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John Magliola라는 시인의 시가운데 이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한 소년이 별을 보았네,그리고 울기 시작 했다네/
/별님은 말했다네,아이야,넌 왜 우니?/
/소년은 말했다네,별님은 너무 멀리 있어요,그래서 당신을 만질수 없잖아요/
/그때에 별님은 대답 했다네/
/아이야,내가 네 맘속에 이미 있기에,넌 나를 볼수가 있었던거야/
--이 시가 마리아가 은혜받은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요?--이미 은혜를 사모함이 마리아안에 있음을 보고 그녀를 선택하셨다는것으로 적용이 가능할 수 있지 않습니까?
2.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녀가 경험한 기적의 배후에 있었던 믿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34절을 보십시오."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회의적인 발언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영어로 why가 아닌 how(how shall this be?)로 되어 있음을 보십시오. 이는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질문 이었던 것입니다.
-35절에 천사의 대답은 설명이었습니다. 곧 마리아의 잉태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45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것을 믿었다고 했습니다."믿은 여자에게"--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의 능력을 신뢰한것 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기적을 둘러싼 두가지 상이한 입장이 있습니다.
1)신비주의자들은 늘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경험하며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입니다.
2)이성주의자는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나,합리성의 틀에 갇힌 나머지 모험과 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고 기적을 불신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그들은 이성적 인간이나 그러나 이성에만 묶여 있지않고 이성을 넘어서서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성적이지만 이성을 넘어서서 기적을 믿는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라아를 쓰신 이유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신뢰한 까닭이었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말씀의 순종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순종은 대가를 요구하는 곧 값지불을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처녀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롱거리가 되고,아니 유대인의 엄격한 전통에 따르면 죽을수도 있지 않았습니까?--어쩌면 마리아는 이때 에스더같은 곧 죽으면 죽으리이다! 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바로 이런 순종의 자질이 쓰임받을수 있었던 자질이었슴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순종의 덕을 평가절하하는 시대요,오히려 반항이나 비판을 더 커다란 미덕으로 오해하는 시대입니다.히5:8엔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고 기록합니다. 반항이나 비판은 저절로 되지만 순종은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앤드루 머레이는 "반항은 죄인의 체질이다.그러나 순종은 고된 학습이다"고 말합니다. 희생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고자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이요, 이런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는 만들어져 갈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쓰임받는 인생의 보람을 누릴것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입니다.남은생애가 순종의 생애가 될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시간 입니다.
--군대갔다가 첫 휴가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군대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순종이지요" 대답하는 아들에게 "그건 나도 가르치지 않았더냐?"했더니--"물론 이십니다.그러나 아버지,군대는 나에게 지금 당장 순종할것을 가르쳤습니다"하더래요.
한해의 결산,인생의 결산을 앞두고 우리는 과연 오늘 당장 즉각적으로 "주의 종이오니,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할수 있을까요?
이 응답여하가 여러분의 생애의 질을 결정할 것입니다.
눅 2:1-7
성탄의 실현
20대 초, 예수 믿기 직전 죽음을 생각해본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자살의 유혹을 느끼게 한 소설이 두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까뮈의 이방인이었는데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살인합니다.--살인의 이유가 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강렬한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 진것입니다. 그는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습니다. 해변가에 파티에서 웃지도 않습니다.--전 어쩐지 그를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의 소설(에세이)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중간에/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덥다.--나는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무슨 제목으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아무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이 두 개의 작품의 주인공이 걸린 병은 권태였습니다.(후자의 책은 초 현실주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이상의 권태의 첫머리글 이었습니다.)
성탄의 계절인데 좀처럼 삶의 의욕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너무나 똑같은 그날이 그날이라는 이 평범성 때문에 삶의 의욕을 못 느끼고 계신 분이 있으신지요? 저도 한때 인생은 이렇게 부조리하고 권태로운 힘겨운 존재 그 자체라고 믿고있었습니다만 예수 믿고 나니까하루 하루가 기대요, 감격입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내 인생을 바꿀줄 정말 몰랐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2000 년 전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기리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신 방법과 그 교훈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방법--그는 의외의 방법으로,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1.의외의 방법
1) 의외의 상황
--가이사의 호적등록의 명령이 그것을 입증합니다./2:1--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황제이었습니다. (본명은 Caius Octavius, 30BC-14AD)줄리우스 씨저의 조카였던 그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그의 생일인 9.23을 새해로 바꾸었고, 그를 구세주와 신으로 선포했습니다.--세금수입이 중요했던 그에게는호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것이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진짜 구세주가 탄생한 것입니다. 가짜 구세주의 통치하에 진짜 구세주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 의외의 장소
--베들레헴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의수도 로마, 성도 예루살렘, 항구도시 가이사랴, 욥바, 아름다운 갈릴리 해변 의 디베리아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라니? 오죽하면 미가 선지자 가 주전 650년경에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한 로마의 변방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작고 가난한 마을을 택하신 것이 의외가 아닙니까!
3) 의외의 인물
--마리아와 아기/나사렛땅의 틴 에이저 소녀를 통해 아기의 모습으로.구세주가 이렇게 오심도 의외였습니다.
2.평범한 방법
우리가 그의 출생에서 느끼는 의외성은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평범하게 오셔서는 안된다는 가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의외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1) 호적등록
--독재자의 통치수단인 인구조사로 세금을 강화하여 정부의 재원을 증가시켜 보겠다는 것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목격하는 평범한 현실이 불과 합니다.
2) 베들레헴
--이스라엘 땅의 평범한 서민마을로 지금도 팔레스틴 통치아래서 인구수는--수지보다 적은 가난하고, 평범한 마을일뿐입니다.
3) 마리아와 아기
--미혼모였다는 것이 특별해 보이지만(우리는 성령의 잉태라는 사건을 알고 있지만) 외적으로만 보면 미혼모들을 통한 출생도 죄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들 일행이 호적등록으로 분주한 이 마을에서 투숙 거절을 당한 것도 평범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II.교훈--의외의 방법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다는 것-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요?- 두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1.평범한 일이 중요한 일이다.
2.평범한 일이 주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원론적 사고의 극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과 세상일이,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따로 따로 존재한다는 사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로 가정일과 직장일 에 당당하게 임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베들레헴 주민들과 여관주인의 입장에서 그 날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치러야 했을까요?
무감각하게 될 수 있음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주님이 태어날것을 알았더라면, 메시아의 부모가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가르칩니다. 6-7절에 보면, 해산의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주님의 태어남을 알았더라면 그랬을까요? 그 일이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아주 평범한 반복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섬김의 대상이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우리가 주님이 맡겨 주신일로 알고 주께하듯 한다면 우리의 일상적 삶은 얼마나 놀라운 삶으로 변신할수 있을까요?
이런 시각 곧 주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인생은-하루 하루가 특별한 날이요, 경험하는 모든 일이 특별한 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평범한 아기에 대해서도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 윤리가 확립된 사회는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문제점을 유발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윤리를 적용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이 값없는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 은혜를 얻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도저히 기록될 수 없는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놀라운 선물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정근 하나님의 성탄선물 - 은혜
1.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강간하여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오면서 다소간에 잘못을 범합니다. 실수로 인해 평생 후회하며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탄 선물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 과거에 상관없이 말씀에 반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3D 업종의 하나인 옷감 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라합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올바로 반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이것은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들려온 말씀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입니다.
3. 소외되고 절박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룻은 이방인이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셨고, 그녀의 이야기를 성경 66권 가운데 한 책을 할애하여 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외되고 절박한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 이들이 어떠한 범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 이 불안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또 우리 주위의 소외되고 절박한 이들을 찾아가 이 선물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
누가복음 2장 25절~33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
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라는 어느 노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어느 주석자는 여기 나오는 이 시므온이 AD 13년에 산헤드린의회 의장을 지낸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므온은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장차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년 후 말라기가 예언자로 활동을 마치고 주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400년간을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시므온은 그런 400년 동안 영적 암흑시대를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면서 기다렸던 그 시대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이 확실하게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보고 죽으리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태어나신 예수께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왔을 때 만나게 됩니다. 결례는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만에 여자 아이는 80일 만에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모가 해산하면 몸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산모와 아이가 깨끗해졌다는 확정을 받는 예식이 정결예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시므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또 36절을 보면 아셀 지파의 비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인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아셀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 이름입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로 한나라는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조혼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안나도 14세를 전후해서 결혼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14세에 결혼해서 7년 남편과 살았고 남편과 사별하고 84년을 혼자 살았으니까 지금 안나의 나이가 105세쯤 됩니다. 이 여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여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 부를 때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고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예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선포하고 공개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므온과 안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기다림
사람들은 메시야가 탄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이제나 저제나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그대로 예수께서 오시면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위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어린 아이가 맹수들과 함께 놀며 뱀의 구멍에 손을 넣는 그런 회복의 세상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갈등과 고뇌와 불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이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있다는 말이고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3절을 보면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나 뉴스도 믿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소돔성이 심판받기 바로 직전, 유황불이 쏟아지기 직전에 롯이 사위들에게 빨리 피하라 곧 재앙이 쏟아진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농담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 심판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을 때 노아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황급히 돌아다니며 준비하라, 이리로 들어오라 이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웃으면 헛수고 입니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일이 복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불행입니다. 믿음을 갖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불행입니다. 여기 시므온이 예수를 만나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철하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정치적 기다림
개중에는 신앙적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또 대다수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는 상대하기가 너무 컸습니다. 로마가 몇 년 안에 무너지거나 망할 것이라는 징후는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 때 일본이 너무 강하고 커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장차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더 열악하니까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의 오심을 더 기다리고 대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하고 화려함이 그대로 재현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들에 5천명이나 모였습니다. 어린아이 노년 여인들까지 포함하면 2,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수십만 인파가 모였습니다. 왜 모였는가 하면 근래 기적을 행하는 젊은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5병2어를 행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돌아다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시겠다는 메시야는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모두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망하라고 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빨리 재림하셔서 일본의 천황부터 심판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결교단은 재림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 성결교회가 제일 먼저 교회 문을 폐쇄당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기다린 메시야는 힘을 가진 초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찌르고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의 초점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라고 예언된 예수는 구원자 예수입니다. 평화의 예수, 구속의 예수, 하나님의 속량의 역사를 펼치러 오시는 예수입니다. 무력과 해방과 로마를 무찌르는 메시야와는 상관도 없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마를 무찔러 이기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가 어긋날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곡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내 삶을 이익 지향적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게 유리한 대로 이루게 하고 복을 주시는 예수로 해석합니다. 내 삶에 형통을 주고 고침을 주고 성공하게 하는 예수를 기대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해석입니다. 모두 정치적인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에 형통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오셔서 로마로부터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일들은 생각도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 도피하고 다녔습니다. 왕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로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 능력을 발휘했으면 국민적 영웅이 되고 세상에 유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내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가 가장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개의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배반한 것이고 유대인들도 모두 실망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강도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 기대를 하고 복을 달라 하고 건강을 달라 하고 입시에 아이들이 붙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때 모두 유대인들이 실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듯이 모두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어도 별수 없다 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모두 정치적 예수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곡해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 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 이 포기에서 오는 결과는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거지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한데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무의미나 허무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로마치하에서도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곡해이기는 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주님이 재림하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가 없고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때로 쉽게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어 미래를 현실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민족을 이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을 팔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치시대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이 났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사명감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장사하며 삶을 살아가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항의했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 억울하다, 나는 나치에 대항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때 레지스탕스가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무 짓도 안했는가, 지금 민족이 다 죽어가고 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긴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챙기는 일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해 보훈처에서 청소년들의 의식을 조사했는데 오늘 젊은이들이 아주 대견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젊은이 600명씩 모두 2,400명에게 물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74.8 % 미국 49.7% 일본 29.3% 한국 56.3%가 나왔습니다. 또 우방과 관계발전의 의지를 물었습니다. 중국 78.9 % 미국 70.3% 일본 67.1 % 한국 80.1%가 나왔습니다. 또 다문화인들의 사회 기여도를 물었더니 한국이 단연 최고 수치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아주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국민은 때로는 불평도 많고 요구도 많습니다. 때로는 이기적일 만큼 자기를 챙기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데모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합니까.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이 열정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뭔가를 해 내는 것입니다. 교육열을 보십시오. 입시 때가 되면 산속 절간 추운 곳에서 하루 수백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를 왜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금식하는 일입니다.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을 하는가 하면 당면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금식기도가 순수하게 영적 삶을 위해서 한다면 더욱 뜻이 깊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기도 한다면 더더욱 소중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주님이 더욱 기뻐하실 기도입니다. 내가 좀 더 깊은 영적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순수하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퓨 리서치가 오늘 미국인의 성인 1,546명을 대상으로 신앙의식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오늘 미국도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10명중 4명이 2050년 안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미국인 41%는 향후 40년 안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인 중 58%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였고 32% 나는 가톨릭교인 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인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90%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에 아들 예수를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고 안나는 금식하며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목자들은 양을 치면서 주의 오심을 고대하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던 날 동방박사들에게, 목자들에게, 시므온에게, 안나에게 사전에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다음 주님의 재림의 날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다림 자체가 없이 어느 날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으니까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시므온이 주님을 맞이하듯이 안나가 주님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탄을 사모하는 자의 자세
누가복음 1:37-38
오늘 이 시간에 "성탄을 사모하는 자의 자세",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성탄을 사모하는 자의 자세", "성탄을 사모하는 자의 자세."
네, 12월이 되면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뭘까? 성탄절입니다. 성탄이 뭡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다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가 문제냐? 사람들이 성탄절을 좋아하는 이유가 각각 다른 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 '엄마, 아빠가 어떤 선물을 얼마나 많이 사줄까?', 그 생각이 꽉 차있습니다. 또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아기 예수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좀 쉴까?', '어디로 좀 놀러갈까?' 그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성탄절을 여러 휴일 중에 하나로 보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1년에 휴일이 많아요. 또 절기가 있어요. 그 날 중의 한 날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최대의 축제일인 것입니다. 또 성탄절은 창세기 3장부터 기다리고 준비되어 온 날인 것입니다. 성탄절을 내 생일보다 더 성대하게 축하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성탄절을 자기의 결혼식 기념일보다 더 정성스럽게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성탄절을 첫 아기의 출산을 사모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모하는 날은 참 좋은 거예요.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한다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107편 9절 말씀이십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 시간, 성탄을 기다리고 사모했던 성경의 인물을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성탄절을 준비해야 할지 알아봄으로, 그래서 이 성탄의 기쁨이 나뿐만 아니라, 또 가정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요셉
첫째, "요셉"을 생각해봅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출산한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인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어떤 신앙으로 성탄을 기다렸느냐?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 24절입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그랬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했습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마리아와 약혼했습니다. 결혼을 작정하고 정혼한 사이입니다. 마리아와.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겁니다. 자기와 하룻밤도 잔 적이 없는데, 자기와 정혼한 그 여인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 이야기입니다. 남의 여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와 함께 결혼할 사람, 자기 여자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올 수 있습니까? 데려올 수 없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요셉은 데려왔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장 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자기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누가 말씀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이 말씀을 누가 들었습니까? 요셉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 말씀을 믿은 겁니다.
요셉은 자기 기분과 생각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자신을 맞춰서. 아마 자기 생각대로 했다면, 자기 기분대로 했다면, 충청도 말로 말하면 쥐어 팼을 것입니다. 아니면 딱 끊었을 것입니다. 파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기분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잠을 자서 잉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인류의 구세주를 자기가 정말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하셨다고 하실 때, 그 말을 받아들인 겁니다. 믿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내가 손해나도, 내가 좀 손해나도, 내가 억울한 일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오늘의 삶에 손해가 안 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의 삶에 혹 손해가 나더라도, 혹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 이것이 산 믿음인 것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성탄절은 사람들과 기분 내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온전한 성탄절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 이것이 건강한 성탄절, 성경적 성탄절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순결한 삶을 통해서 성탄절을 기다렸습니다. 순결한 삶을 통해서 또 기다렸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믿은 것뿐만 아니라, 순결한 삶을 통해서 아기 예수가 탄생할 것을 기다렸습니다. 보세요. 마태복음 1장 25절 상반절에 보니까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를 잉태한,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를 이제 데려왔습니다. 데려왔으니까 자기 아내입니다. 동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한 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까지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를 데려왔지만, 동침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밤자리에 잠을 같이 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자신도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요즘 성탄절은 "성탄 문화"는 없고, "세상 문화"만 가득합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한 성탄 문화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주일이 아닌 성탄절에 헌혈을 하는 것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인천교회는 지금까지 계속 한 14, 5년 전부터 해마다, 해마다 헌혈합니다. 언제 합니까?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여름은 언제 합니까? 6.25 주간에. 겨울에는 언제 합니까? 성탄절 날, 성탄절 날. 부족하지만 저도 저 자신도 지금까지 한 30번의 헌혈을 했습니다. 헌혈할수록 건강해지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혈 역사상 성탄절 날 헌혈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한 것은 순복음인천교회가 첫 테잎을 끊었습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언제 헌혈하는 게 좋을까? 민족 전쟁을 일으켰던 6.25 주간에. 우리가 피는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헌혈해서 사람을 살리자. 그런 정신이 살아난다면,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나지 않을 것이다. 6.25 주간에 우리는 현혈하자. 그 다음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 날, 제일 큰 선물이 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피를 주셨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할 일이 뭐냐? 우리는 생명의 이 피를, 피 때문에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헌혈하자. 그래서 성탄절 날 헌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계속. 우리는 14, 5년 전부터 성탄절 날만 되면 헌혈했습니다.
성탄절 날 최고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뭘까?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기뻐할 것이 뭘까? 피가 없어서 수술 못 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그 깨끗한 피를 우리가 헌혈해서 그들을 위해서 준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성탄 선물이 어디 있냐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탄절 날 헌혈하는 것도 성탄의 문화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인터넷 통해서 설교를 들으시는 분은 이해하세요. 우리끼리 이야기예요. 순복음인천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닙니다. 새로운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교회입니다. 성탄 문화, 성탄절 날 헌혈함으로 말미암아, 성탄 문화를 바꿉니다. 성경적 효를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성경 문화가 이제 세상 문화를 바꿔놓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는 이웃과 함께, 고통 당하는 사람과 함께, 외로운 사람과 함께, 자녀 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독거 노인들과 함께, 부모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들과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우리가 함께 해야 됩니다. 화해하고, 사랑하고, 저 북한 땅에도, 성탄을 모르는 저 북한 땅에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물품을 보내서 함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성탄절인 줄 믿습니다.
요셉은 순결한 삶을 통해서 성탄절을 기다렸다 그랬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한 성탄절 문화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주일이 아닌 성탄절에 헌혈하는 것,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헌혈 같은 좋은 일이 성탄절에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베풀어주는 일이 막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눈이 와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거룩한 삶 때문에 세상이 순결해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바뀌어져야 될 줄 믿습니다.
둘째, 마리아
두 번째,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 마리아. 마리아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성탄절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성탄절을 준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했습니다. 보세요. 누가복음 1장 38절에 보니까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게 웬 일입니까?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여, 성령의 능력으로 너에게 예수님의 잉태가 임할 것이다." 마리아가 볼 때, 이것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정혼한 남자가 있습니다. 정혼한 요셉이 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 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결과가 올까? 잉태했다면 정혼은 파혼될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혼한 상태에서 결혼하지 아니하고 잉태하면, 그 아버지도, 그 부모도 그를 족보에서 빼버려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이제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니 손해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약혼자와 파혼해야 됩니다. 자기 아버지 족보에서 뽑혀나가야 됩니다. 돌로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불이익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동정녀 탄생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고도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잉태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동정녀 탄생,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게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상식으로, 의학으로 도저히 안 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믿는 것도 "다른 사람이 그랬대." 그러면 "아, 그런 가보다. 그럴 수 있나 보다." 그러는데, 그 일이 자기에게 오는 겁니다. 엄청난 손해가 옵니다. 불이익이 옵니다. 그런 걸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 요셉에, 그 마리아 아닙니까? 마리아는 아기 예수가 구세주로 오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분이 구세주로 오시기 때문에, 내가 죽어도, 내가 희생을 당해도, 하나님의 아들, 그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시는데 내 몸을 써주신다면 나는 받아들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위대합니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성탄은 성탄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는 성탄은 성탄절이 아닌 것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누구이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독생자 예수이십니다. 아기 예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주인공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알고 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아기 예수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구세주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성탄절을 만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최고의 성탄 준비는 무엇일까요? 영혼구원입니다. 전도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겁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척, 친구, 이웃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친척에게, 친구에게,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선물 사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 아직 예수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전해서 "갑시다. 교회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갑시다. 갑시다." 그러므로 최고의 선물은 뭐냐? 물질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물인 것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아기 예수를 전하면,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아기 예수의 오심에 기뻐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자마자 곧장 엘리사벳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눅 1:39-46).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또 엘리사벳에게 가서 아기 예수의 오심을 또 찬양했습니다(눅 1:46-55). 감사했습니다. 아기 예수의 잉태를 또 찬양했습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가 더 성탄절에 찬양하지 않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백화점이나, 기업이나,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에 어떻게 하면 장사를 잘 할까, 어떻게 하면 수지 맞을까, 어떻게 하면 좀 즐겁게 놀까, 신날까" 해서 성탄 문화가 아닌 것 가지고, 성탄을 기뻐합니다. 즐거워합니다. '한 탕 벌자.' 그런 식으로 성탄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정작 아기 예수의 탄생을 더 많이 기뻐하고, 온전하게 성경적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찬양하고 기뻐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잠잠합니다. 세상에 문화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의 캐롤을 따라가지 말고, 예수의 이름을 힘껏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아기 예수가 없는 캐롤이 더 많습니다. 캐롤이라고 다 캐롤이냐?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찬양이 있어야 캐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년 중에 12월 한 달만큼이라도 예수 찬양이 세상을 뒤덮게 만듭시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12월 달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많이 찬양하고, 그러므로 잃어버렸던 예수를 다시 회복하고,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혼 구원을 다시 회복하고, 잃어버렸던 전도를 다시 회복하고, 12월 달 한 달 가정도, 일터도, 직장도, 교회도, 구역에도, 모두가 다 예수님의 찬양으로 덮어버립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시므온
세 번째입니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스라엘의 위로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은 세상적인 유익과 쾌락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부귀와 명예와 출세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것은 만민을 향한 주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기다림 끝에 시므온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안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시므온은 그 아기 예수가 성전을 찾아갔었을 때, 그 예수님을 보고, 그 뿐이 아닙니다. 시므온은 나이 많이 예수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기다렸던 그 시므온은 예수님을 안아봤습니다. 누가복음 2장 28절로 32절 말씀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기다렸습니다. 기다렸어요. 기독교는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소망을 품고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자녀들에게 성탄절에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예수를 소망하는 예수 가족이 됩시다. 따라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예수 가족이다. 예수 가족이다." 아멘. 지난 열한 달 동안 우리의 기다림과 소망은 세상적인 것이 너무나 많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헌금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조차도, 혹시라도 육체적 소원 때문에 더 많이 할 때가 없었습니까? 금번 한 달만큼은 예수님을, 예수님만을 더 많이 바라봅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아기 예수를 위해서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봅시다. 예수를 향한 거룩한 기다림은 거대한 기적을 낳을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를 직접 안았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므온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가족 구원, 직장 구원, 사회 구원, 민족 구원, 세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8선 너머 저 북한 땅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당, 저 땅에 우리의 동포들이 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고 배고파하는 동포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가지고 가서 줄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그 땅에도 봄이 오듯이 오게 될 것입니다.
넷째, 안나
네 번째, 한 사람 더 말합니다. "안나." "안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난 여 선지자입니다. 안나는 배운 게 없습니다. 가진 게 없습니다. 세상 말하는 것처럼 명예도 없습니다. 권세도 없습니다. 빽도 없습니다. 안나는 시므온처럼 예수를 만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안나에게는 동방박사처럼 별이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안나에게는 목자들처럼 천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안나가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뭘까? 쉽게 말하면 성전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안나가,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났다, 그 말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 37절로 38절입니다.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아기 예수는 몸된 성전을 찾는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자가 아기 예수를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 예수를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그 증거가 뭐냐고요?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복음인천교회 성도는 순복음인천교회 이 본당이 성전입니다. 북인천성전이 성전입니다. 연수성전이 성전입니다. 제 2성전이 성전입니다. 동해안순복음교회 교회가 성전인 것입니다. 그 성전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울수록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해져야 됩니다. 혹시라도 세상살이 바빠서, 학교공부 바빠서, 대학을 가기 위해 수능시험으로 바빠서, 직장생활에 바빠서, 자식들과 처와 함께 돈 벌어먹기에 바빠서 힘들었다 하더라도, 해마다 이제 12월 달, 성탄절이 있는 12월 달은 더 많이 성전에 찾아와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고, 떠났던 사람들이 성전을 향해서 자꾸 달려와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세상의 거리와 백화점이 사람들로 북적북적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의 성전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북적북적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아야 할 불신자들로 북적북적되어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은 가족, 친척, 친구, 이웃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와서 아기 예수를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아기 예수를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성탄절은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축제의 날인 것입니다. 나 하나만이 아닙니다. 가족, 친척, 친구, 이웃, 우리가 사는 인천광역시, 우리가 사는 조국 대한민국, 저 북한 땅에까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온 세계가 다. 온 인류가 다,.예수님의 탄생하심은 하나님 아버지께는 영광이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말씀했습니다. 거룩한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며, 거룩하게 준비하는 거룩한 성도가 됩시다.
- 기 도 -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성탄절이 우리 앞으로 다가옵니다. 아버지, 정말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사모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한 삶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함께 기뻐하며, 함께 나누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성탄의 3가지 의미 -- 마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엔 평화, 사람 에게는 기쁨"
유명한 목사 이며 설교가 이며 신학자인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노상
에서 전도를 하는데 한 무신론자가 다가와서 도전을 제시했습니다. 오는 주일
오후 과학 회관에서 기독교 신앙과 무신론자의 공개 토론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청중 동원과 비용은 자기 부담 으로 할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 만만한 태
도였습니다. 이에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쾌히 승낙을 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제시
했습니다. 즉 남, 녀 두 사람의 증인을 대동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신론 이라는 종
교를 믿어서, 속이고 훔치고 음란하고 악독했던 사람이, 정직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사람으로 변하여 그 가족과 친구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두 사는 사람이 있으
면, 2사람 만을 실증으로 요구하면서, 자신은 그런 남녀 증인을 100명 데려 오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오만 했던 무신론자는 "잘해 보시오"하고 달아났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구름과 같은 증인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한번 허락하신 성탄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누고저 하는 것은 성탄이 품고있는 세가지 의미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먼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크리스마스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에
는 주님의 탄일이 명시 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초기 교회 시대에는 어떠한 날을 정
해서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AD 4세기에 와서 부터 범 교회적으로 지켜지
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와 알미니안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의 해석 차이로 서방 교회는 12월25일을, 동방 교회는 1월6일을 각각
성탄절로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양 쪽 모두의 날짜가 그 지역
이방신의 축제일과 중복됨으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성탄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SON OF God의 탄일이 sun of god (태양신의 아들을 섬기는 제전인 )
Saturnaliafestival의 겨울 축제의 기간과 겹치게 됨으로 인하여 많은 혼동이 오게
되었습니다.그들은 그 기간에 Merry making, 이나 그날에 어울리는 선물들을 교환하
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초록색 장식을 그 날의 의미로 사용했고 소 나무에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장식을 사용했으며 굻은 장작을 때므로 인하여 새해
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 하세요? 그래서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
은 이 모든 이방의 풍습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엽에
번성하는 상업주의에 부응하여 이 풍습이 전 세계적으로 퍼저 나갔습니다. 이제는
크 리스마스는 기독교인만의 절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것이 옳
고 그름을 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만 성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확실
히 하기 위해서는 한 번 쯤은 살펴봐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 2장 1절-5절 말씀을 보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
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첫 번 한 것이라"
당시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로 부루터스에게 암살당한 줄리어스 시이저의 조카로
그의 뒤를 이어 로마사상 가장 막강한 제국을 건설한 황제입니다.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 재정 확보를 위한 준비 단계
로 인구 조사가 실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는 이러한 이방의 왕의
정치적 정책까지도, 당신의 도구로 쓰셔서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시도록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2장14절에 보면 천사의 찬양 가운데
성탄의 세 가지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 이요
둘째는 땅에서는 평화이며
셋째는 사람에게는 기쁨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살
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예언의 성취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인간과 대화하는 통로로 선지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
을 통하여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
은하 나님의 뜻과 Plan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에 보면 "다윗 동네
에 즉 베들레헴에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인데 이 예언이 성취가 된 것
입니다. 성경은 갈4:4에 말씀하시기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
에게서 나게 하시고"
두번째 본문을 통해서 본 성탄의 의미는 2장14절 하반부에 보면 땅에서는 평화
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의 평화를 위함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
기 3장에 보면 인간 타락의 기원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
님의 말씀을 불순종 했으므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의 결과로 인하여 모든 관
계에서 평화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창 3장 12절에 보면 - 아담은 이 범죄가
하와 때문이고 이 하와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결국 하나님 탓 이라고 어거지를 씁
니다. - 즉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앞으로 있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투쟁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6절에 인간의 생존을
위한 고통과 수고가 더 하여졌고, 17절에 심지어는 땅까지, 즉 자연까지도 인간
과 불화의 관계가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다 평화를 갈
구하며 원하지만 죄의 지배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인간은 평화를 위
한 명목아래 전쟁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 하시기를 주님이
오심으로 이 평화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사9:6을 보면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
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이름
은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통해서 상실된 평화를 회복시키시는데 단계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먼저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엡2:14-16에 "
그는 -주님은 우리의 화평 이신지라 둘도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며 또 십자가로 이들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죄로 말미암
아 벌어졌던 관계가 회복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적인 평안을,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평화를 누리고 계십니까?
양심의 정죄로 부터 평안을 느끼십니까?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평안을 느끼십니
까? 가정에서 가족 간에 화목 하십니까? 모든 인간 관계에서 불화는 없습니까?
하나님과 화평 하십니까? ...... 참된 화평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영적으로 살
아야 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롬8:6 말씀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
안"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이기 때문 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
에게 지금 영적인 평안을주시고 계시지만 종국에 가서는 온 우주적인 평화를 주시
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2:2-4에 말씀 하시기를 "말일에 - 말세에 -여호와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데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
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나올 것임이라.그가 열방 사이에서 판단 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
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평화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
님의 탄생을 창3:5절 말씀으로 부터 시작하여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선택적
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셨 듯이 앞으로 주실 미래의 영원한 평안함도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종국에는 천사의 나팔 소리에 홀연히 바뀌
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
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
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있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한 평강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셨
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한 성탄의 의미는 인간에게,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2:10에 천사가 이르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
다. 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생기는 고민은 어떤 선물을 누구에게 어느 정도 해야
하는 가를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Meaning이냐 value 이냐 , 즉 의미를 중시
하느냐 아니면 체면을 다루느냐 하는 고민을 하게됩니다. 왜냐하면 선물이라는 것
은 서로 서로의 뜻을 표현 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드리는 넥타
이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 하는 표현 입니다. 직장 상사에게 주는 케익과 두툼
한 봉투는 다음 승진 때 자알.. 부탁한다는 뜻이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샤
넬 5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남자에게 장미 한 송이를 보낸다거나
여자가 여자에게 면도기를 선물 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선물 이지요....
하니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반역하고 목
이 곧고 시기하고 방탕하고 속이고 음란하고 교만한 인간을 향해서 폭포수와 같은
사랑으로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연민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롬8:35 말씀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 어느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
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것에 우리가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요?
Thank You! 한 마디로 끝낼 수가 있을까요? 주님 고맙습니다 그 표현으로 될 수
있을 까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온 것이 기록 되어 있는데 .. 그들
은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즉 예배하러 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christ+마스 라는 말은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예배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영어의 worship은 worth 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worth는 가치라는 뜻이지요, 즉 예배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는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마
굿간에서 겸손하게 탄생하신 주님께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주님
에게 드려야 할 예물은 무엇입니까?
이시간 하나님 께서 황금을 요구하실까요? 아니면 값진 유향을 요구하실 까
요?... 하나님은 이 시간에 우리의 중심이, 우리 마음의 중심 삶의 중심이 드려지
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지기를 우리의 중심이 드려지기를 원하
십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을 이 시간 찾고 계십니다. 대하16:9 말씀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
시 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중심인
것입니다.그러면 이 시간 우리가 드려야 할 황금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몰약은 무엇 입니까? 우리의 상한,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유향은 무엇 입니까? 기도를 통한 그리스
도인의 향기로운 생활입니다.
이제 성탄은 1년에 한 번 오는 문자적인 12월 25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탄은
매일 매일의 삶이 성탄을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통해서 참된 기쁨의 구체적인 표현이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이 성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혜
마 1:1-6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 윤리가 확립된 사회는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문제점을 유발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윤리를 적용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이 값없는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 은혜를 얻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도저히 기록될 수 없는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놀라운 선물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강간하여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오면서 다소간에 잘못을 범합니다. 실수로 인해 평생 후회하며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탄 선물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 과거에 상관없이 말씀에 반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3D 업종의 하나인 옷감 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라합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올바로 반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이것은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들려온 말씀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입니다.
3. 소외되고 절박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
룻은 이방인이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셨고, 그녀의 이야기를 성경 66권 가운데 한 책을 할애하여 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외되고 절박한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 이들이 어떠한 범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 이 불안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또 우리 주위의 소외되고 절박한 이들을 찾아가 이 선물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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