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파고든 죄를 덮을 수 있는 것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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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던 사건에 대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냥 다윗의 잘못을 고발할 뿐 아니라 죄의 속성과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가 무엇인지 교훈합니다.
1- 죄의 유혹은 평온한 일상을 파고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죄의 유혹은 평온한 일상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이 늘 전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을 잘 감당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나날이 높아졌습니다. 1절에 보시면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는데 다윗은 그저 군사를 보내기만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닌 절대 권력을 잘 보여줍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전쟁을 하는 원정 시즌이 있습니다. 이 시즌에 전쟁을 나가서 왕의 위엄을 보여주며 권력을 다집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제 이런 퍼포먼스도 할 필요가 없이 왕권을 잘 안정시킨 왕이 되었습니다. 왕궁에 앉아서 명령만 하면 군사가 다윗의 뜻대로 움직여서 전쟁을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1절은 이런 다윗의 절대권력, 왕권의 안정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정적이고 평온한 순간에 죄의 유혹이 파고듭니다.
2절에 보시면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다윗이 이전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유가 있고 약간은 늘어진 모습입니다. 죄의 유혹이 틈타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교훈합니다.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그 장면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다윗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 여인은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것도 다윗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다윗은 이미 네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부터가 죄악이고 여기서 돌아섰어야 하는데 다윗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열 번째 계명의 말씀대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아야 하는데 다윗은 자신의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시면 다윗이 전령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려오게 합니다. 자신의 부하의 아내인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죄를 짓습니다. 한글 성경엔 그냥 전령을 보냈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상으로는 전령’들’을 보냈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윗이 전령들을 보냈고 밧세바 입장에서는 이것이 굉장한 압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왕이 부른다고 하며 건장한 남자들이 여럿이 가서 밧세바를 데려가면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밧세바가 부정함을 깨끗하게 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2절에 보시면 밧세바가 목욕을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여성의 생리로 인해서 부정해진 것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7절에 의하면 유출된 상태는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그래서 저녁에 목욕하는 것을 다윗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율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음욕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권력을 주의 일에 쓴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주의 일꾼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세워나가고 있을 때 죄의 유혹을 받게 되고 유혹을 받을 뿐 아니라 죄를 짓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안정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안정된 삶은 사명의 발판이 되어야지 유혹의 못자리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유혹은 고난 가운데 힘들 때에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평온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차라리 힘들 때는 영적으로 긴장하고 늘 기도하고 죄의 유혹을 피해가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 될 때는 영적인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죄의 유혹이 갑자기 밀고 들어오면 거기에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평온한 일상은 죄의 유혹이 우리 영혼에 들어오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윗도 평온한 일상 가운데 밀고 들어오는 죄를 극복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평온한 일상 이면에 도사리는 죄의 유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2- 평온한 일상에 파고든 죄는 통제할 수 없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평온한 일상에 파고든 죄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장 4절에 다윗이 전령들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리고 왔는데 밧세바가 집에 갈 때는 혼자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탐한 것이 순간적인 감정임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령들을 대동해서 밧세바를 인도하지만 보낼 때는 혼자입니다. 밧세바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탐심이고 그저 음욕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 보시면 그 여인이 임신하매 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다윗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이것은 일종의 권력의 역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불렀지만 이제는 밧세바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윗에게 이 상황을 책임질 것을 은근히 추궁하고 있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으니 이제 밧세바 뱃속에 있는 아이는 왕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뱃속의 아기는 다윗의 핏줄이니 다윗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때 다윗이 한 가지 수를 씁니다. 자신이 범한 밧세바의 남편을 부릅니다. 우리야입니다. 우리야를 부릅니다. 우리아는 아마 한창 전쟁 임무를 수행하다가 부름을 받은 것 같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전쟁 상황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우리아에게 집에가서 쉬라고 명령을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휴가를 명령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군인 입장에서 휴가는 명령입니다. 여기계신 성도님들 자녀들이 이전에 군 생활을 했을 때 휴가를 받아서 나오지 않습니까? 이 휴가는 명령입니다. 지휘관이 좀 쉬어서 전투력을 보존하라고 휴가를 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총 지휘할 수 있는 다윗이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에게 휴가를 명하면 사실 우리아는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8절에 네 집으로 내려가라는 말도 명령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9절에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항명에 해당합니다.
우리아는 그냥 집으로 휴가를 안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왕궁 문에서 잤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에 왕에게 항소하고 항의하고자 하는 이들은 왕궁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궁 앞에서 시위를 하곤 했습니다. 11절에서 우리아가 다윗에게 말하기를 언약궤와 이스라엘이 야영중에 있는데 어떻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한 말로 들리지만 상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우리아에게 처와 같이 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굳이 우리아는 처와 같이 잔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해서 밧세바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밧세바와 같이 있게끔 만들어서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우리아의 자식인 것처럼 꾸미는 것을 우리아가 알아차린 것을 보입니다.
사실 다윗이 우리아를 밧세바에게 보낸 것은 권력자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은 아마 공공연히 다 알고 있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전령들을 보내기도 했고 이 전령들을 통해 알음 알음 이 이야기가 퍼저 나갔을 것입니다. 밧세바도 다른 사람을 보내 임신을 알렸으니 다윗과 밧세바 둘 사이에 은밀한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아도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고 밧세바의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아는 다윗에게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위는 밧세바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도 될 것입니다. 우리아가 집에 내려가기만 하면 다윗은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우리아의 아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그런 술수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왕궁 앞에 머물고 있습니다. 충성의 표시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권력으로 밧세바를 탐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부하에게 명령하여 다윗이 밧세바를 임신 시킨 것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권력으로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이 무마되지 않았습니다. 11장 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움직이고 당시 주변의 국가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가졌지만 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그 결과를 자신의 권력으로 덮어보려 했지만 그 대단한 권력으로도 자신의 죄를 덮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대단한 권력을 가져도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 막강한 권력으로 죄 지은 것을 덮으려고 해도 덮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 뿐 아닙니다. 물질로도, 그 어떤 화려한 말재주로도 자신이 지은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덮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적용)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없습니다. 복음 만이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윗조차 극복하지 못한 죄의 문제를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권력과 자신의 꾀로 덮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게 덮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시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이 십자가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회개 해야 합니다. 회개는 비굴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고발에 분노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 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자신의 권력을 휘들렀을 때 해결되지 않은 죄가 회개 할 때는 해결되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직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죄의 유혹은 평온한 일상을 틈타서 기습합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의 특성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우리를 틈타고 들어왔을 때 방법은 오직 복음으로써 회개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어떤 권력도, 지혜도, 수단도 죄를 덮을 수 없고 오히려 죄가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복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의지하고 나아가는 성도님들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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