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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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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오늘 함께 이 자리에서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렇게 청년 선생님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인데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조금은 긴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금 당황하고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함께 말씀을 듣고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고서 함께 말씀에 집중해주시면 너무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 선생님들께서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마 다들 다양하게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제게 하나님은 저를 지켜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나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에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다녔다면, 대형 재난과 같은 사건이 있을 때, 왜 사랑의 하나님이 저들을 구하지 못하시느냐에 대한 한탄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공의의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다녔다면, 흉악한 범죄자들이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이들을 벌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밀양이라는 영화도 이러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전도연씨가 연기한 주인공이 아들을 유괴 사건으로 인해 잃게 됩니다. 다행히 그 범인은 잡힙니다.
당시 힘들었던 주인공은 교회에서 신앙의 힘으로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어렵게 그 범인을 용서하고자 찾아가죠.
그런데 그 범인은 찾아온 주인공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오히려 범인이 주인공을 위로하며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 것이죠.
주인공은 이 사건 이후 큰 충격을 받아 영화에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이러니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들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건가요!’ 라고 말이죠.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한 하나의 사건을 통해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이 아이러니한 일들에 대해 말씀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지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대표적인 예수님의 반대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사람은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하죠. ‘선생님, 이 여자가 지금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 율법에 따르면 현장에서 잡힌 자는 돌로 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누가봐도 의도가 있는 행동입니다. 일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은 원래 말씀, 즉 율법을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입니다. 말씀을 모를리가 없죠.
그렇기에 만약 정말로 그 간음한 여인을 벌하고자 했다면 그대로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처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죠.
심지어 그들은 간음한 여인 혼자만 데려옵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혼자 할 수가 없죠. 함께한 남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만을 데려옵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기보다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6절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죠.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이 물음은 예수님께는 매우 벗어나기 어려운 함정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보통 2가지 답을 생각할 수 있겠죠. 첫번째로는 나는 그 여인을 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기는 했지만, 아직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율법 말씀이야말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이었고,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오명은 예수님께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답을 생각해볼까요? 또 다른 선택지는 뭐죠? 그 여인을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가 아닌 수호자로서 그들 앞에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또다른 문제를 불러옵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의 이미지에 대한 손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하고 죄인들과 만나시는 등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명하신다면, 아무리 그것이 율법에 올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이미지는 어느정도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사법적 문제입니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법적인 사형은 오직 로마에게만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어겨 처형한 것이라고 해도, 로마의 입장에서는 그저 살인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이전 예수님의 사랑이 많으신 이미지는 타격을 입고 심지어는 로마에 의해 체포될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예수님 앞에 놓인 상황은 장기로 치면 외통수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아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역시도 그것을 기대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자 이러한 어려움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가장 먼저 몸을 굽혀서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땅에 뭘 쓰셨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썼다는 해석도 있고, 예레미야의 말씀을 따라 여호와를 떠난 이들을 흙에 기록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답은 알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결국 그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를 파악하시고 논쟁하기를 거부하신 것이 아닐까 라는 정도의 수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질문에 답을 하시지 않자 그들은 지속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그들에게 한 마디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8:7 NKRV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다시 앉으시고 흙에 손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쓰십니다.
아마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군중은 그 말씀에 크게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율법에 따르면 옳은 말씀입니다. 실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보겠습니다.
신명기 17:6–7 NKRV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의 말씀에도 먼저 그 행동을 보고 신고한 증인들이 처형에 가담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을 데려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먼저 돌을 던져야 했죠.
하지만 그들은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합니다. 무슨 이유였을까요? 본인들 역시도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자신들이 이전에 저질렀던 죄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역시도 간음의 죄를 몰래 저질렀을 수도 있겠죠.
결국 예수님이 땅에 무언가를 쓰시는 동안 젊은이부터 어른까지 하나 둘 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예수님과 그 간음한 여인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자 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시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인 간음한 여인에 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통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이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쪽만을 드러내보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사랑을, 어떨 때는 공의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바로 사랑과 공의의 모습을 모두 드러내 보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여인을 율법대로 죽이지 않으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신 율법 파괴자시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율법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 그 여인을 살리셨지만 그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이죠.
사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죄인이 여인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도망갔던 모든 무리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수님 앞에 선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발하시고 그들 스스로를 증인으로 삼으셨던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본문이 됩니다.
자신들은 마치 말씀을 잘알고 지키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내세우고 다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역시도 결국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과 다르지 않음을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앞에 기소된 모든 죄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왜 그 모든 이들을 벌하시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냥 그 모든 이들이 불쌍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이 모든 죄까지 모두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여인이 지었던 간음의 죄로부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품었던 죄악된 마음,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크고 작은 모든 이들의 죄까지 예수님은 모두를 짊어 지시고 십자가의 길로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스스로 그 정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스스로의 육신으로 공의를 행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공의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사랑과 공의를 모두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음에 분개합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왜 공의의 하나님이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느냐고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행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그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그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죠.
우리는 쉽게 우리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규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야.’,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야’ 이렇게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의 시선에 규정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을 뛰어넘어 그의 크신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이렇게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말이죠.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간음한 여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재판의 자리에 있던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여인과 무리들 뿐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을 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가만히 계시죠? 왜 이것에 대해서는 말하시지 않으시죠?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과연 죄가 없니?’
우리 역시도 서기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죄를 껴안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잊고 예수님께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공의로 인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한곡 하고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할 찬양은 내가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사실은 서기관과 다르지 않은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러한 우리마저도 살리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지금껏 나의 마음대로 주님을 생각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의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 혹시나 서기관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나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남들을 정죄하고 비방했던 모습들이 내게 있다면, 나의 잘못된 모습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러한 죄에서 벗어나는 내가 되게 해 달라고
-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 주님께 감사하며 앞으로의 나의 모든 삶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되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2. 우리의 신앙생활을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 원하시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 항상 나의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해달라고
-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3.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 우리 각 학교의 학생들이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아니하도록
- 세상의 잘못된 문화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도록
- 그들에게 어떤 삶의 순간들이 찾아오더라도 주님과 함께함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4.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 목사님과 제가 사역에 헌신함으로 임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 우리 모든 선생님들이 한마음이 되어 함께 모든 자리에 임할 수 있도록
- 각자에게 필요한 기도제목들을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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